『훈민정음, 처음부터 다시 읽다』

제6장. 문자의 설계자들

by 이다연



문자의 설계자들

― 설계는 우연이 아니라 선택이다


문자는 흔히 결과로 기억된다. 어떤 글자가 남았는가, 얼마나 오래 쓰였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가. 그러나 문자사의 핵심은 결과가 아니라 설계의 순간에 있다. 어떤 질문에서 출발했는가. 누구를 기준으로 삼았는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남겼는가.


훈민정음은 바로 그 질문의 흔적이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문자다. 이 문자는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았다. 소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인간의 몸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배움이란 무엇이며 기록의 권한은 누구에게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연속된 사유와 선택의 결과다.


이 부에서는 훈민정음을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설계의 과정’으로 다시 읽는다. 자음과 모음은 어떻게 사유되었는지, 왜 그 수가 스물여덟이었는지, 그리고 왜 이 문자가 닫힌 체계가 아니라 확장을 전제로 한 구조였는지를 따라간다. 여기서 훈민정음은 더 이상 “쉽고 과학적인 문자”라는 수식어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을 신뢰한 설계, 이해 가능성을 전제로 한 문자, 그리고 정치적 책임을 구조 속에 품은 체계로 드러난다.


이제 질문은 바뀐다. 훈민정음은 어떻게 가능했는가가 아니라, 왜 그렇게 설계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1️⃣ 왜 스물여덟 자였는가

― 체계로 완성된 문자, 확장을 전제로 한 설계


훈민정음을 떠올릴 때, 많은 사람들은 “스물여덟 자”라는 숫자에서 멈춘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수. 마치 직관적으로 정해진 것처럼 보이는 이 숫자는 그러나 결코 임의적인 선택이 아니다. 스물여덟 자는 목표가 아니라 구조가 도달한 결과였다.


1. '원리를 먼저 세운 문자'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에서 자음과 모음의 개수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먼저 세워진 것은 원리였다. 자음은 발음 기관의 위치와 움직임을 기준으로, 모음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드러내는 기본 축으로 설계되었다. 이 원리들이 서로 맞물려 작동하면서 필요한 만큼의 글자가 자연스럽게 도출되었고, 그 결과가 스물여덟 자였다.


글자의 수는 설계의 부산물이지, 의도적으로 제한된 결과가 아니었다.


2. '자음: 발음기관을 기록한 설계도'


훈민정음 자음의 핵심은 소리의 위치와 방식을 형태로 보여준다는 데 있다. 예컨대 ㄱ은 혀뿌리가 윗입천장 쪽에서 막히는 모습을, ㄴ은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위치를 본떴다. ㅁ은 입술이 완전히 닫히는 모양을,ㅡㅅ은 이 사이로 공기가 지나가며 마찰이 생기는 구조를, ㅇ은 목구멍의 빈 통로를 상징한다.


자음은 “소리를 적은 기호”가 아니라, 소리가 만들어지는 위치와 방식을 기록한 구조다. 여기에 획을 더해 소리의 성질을 확장하는 방식은 발음 변화의 논리를 문자 안에 포함시킨다. 학습자는 글자를 외우는 사람이 아니라, 원리를 읽는 사람이 된다.


3. '모음: 세계관을 소리의 방향으로 바꾸다.'


모음은 또 다른 차원의 설계를 보여준다. 훈민정음은 모음의 기본 요소를ㆍ(하늘), ㅡ(땅), ㅣ(사람)으로 두고, 이 세 요소의 결합과 방향으로 음가를 확장한다. ㅣ를 기준으로 점이 오른쪽에 놓이면 ㅏ, 왼쪽에 놓이면 ㅓ가 된다.

ㅡ를 기준으로 위아래에 점이 놓이면 ㅗ와 ㅜ로 확장된다. 모음은 음가를 나열하지 않고, 방향과 결합의 원리로 설명된다. 이로써 소리는 암기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 가능한 구조가 된다.


4. '닫힌 목록이 아닌, 열린 체계'


중요한 점은 스물여덟 자가 ‘더 이상 늘어날 수 없는 완성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훈민정음은 처음부터 확장을 전제로 한 체계였다. 새로운 소리가 등장하더라도 그 소리를 어디에 배치할지, 어떻게 설명할지에 대한 기준을 이미 내부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훈민정음은 완성된 문자이면서 동시에 계속 완성되어 가는 문자다.


5. '숫자에 담긴 정치적 선택'


스물여덟 자라는 구성은 학습자의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표현의 가능성을 최대한 열어두는 선택이었다. 이는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을 수동적 암기자가 아니라 이해하고 확장할 수 있는 주체로 본 설계다. 문자의 수마저도 권력의 편의가 아니라 사용자의 이해 가능성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숫자는 기술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 속한다.


요약 및 다음으로

훈민정음의 스물여덟 자는 적절해서 남은 숫자가 아니라, 필요해서 도달한 구조다. 그리고 그 구조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다음 장에서는 이 문자 체계가 실제로 어떻게 조합되고 운용되었는지, 그리고 왜 훈민정음이 ‘쉬운 문자’를 넘어 지속 가능한 문자로 남을 수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사유 질문 ― 이 장을 읽고


1. 훈민정음은 무엇을 ‘먼저’ 설계했기에 문자가 가능해졌는가.

소리인가, 인간의 몸인가, 아니면 배움의 조건이었는가.


2. 글자의 수가 목표가 아니라 결과였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가 만드는 제도와 시스템을 어떻게 다시 보게 하는가.


3. 자음과 모음을 ‘외워야 할 기호’가 아니라 ‘읽어야 할 구조’로 만들었을 때,
학습자의 위치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4. 닫힌 목록이 아닌 열린 체계로 문자를 설계한다는 것은,
완성보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긴 선택이었는가.


5. 훈민정음의 설계가 끝까지 신뢰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지식의 권위인가, 설계자의 통제인가, 아니면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었는가.


■□ 참고 문헌


훈민정음해례본 서문 및 해례

세종실록

이기문, 『국어사개설』

최현배, 『우리말본』

김슬옹,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적 배경」

세종의 애민 정치·민본주의에 대한 역사학·국어학 연구 전반

문자사회학 (문자–권력–기록–통치의 관계에 대한 인문학적 논의)



제6장. 『훈민정음, 처음부터 다시 읽다』「문자의 설계자들/‘설계는 우연이 아니라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