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처음부터 다시 읽다』

제5장. 세종이라는 질문/‘창제자의 문제의식과 정치철학’

by 이다연


훈민정음은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한 문자가 아니다. 그것은 세종이라는 한 인간이, 군주로서 그리고 사유하는 존재로서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질문의 결과였다. “왜 문자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통치란 무엇인가,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었다.


세종은 문자 이전에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사람 이전에, 사람이 말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던 구조를 보았다. 훈민정음은 그 구조를 향한 질문이자, 그 질문에 대한 제도적 대답이었다.


1. 세종은 왜 문자를 만들려 했는가


세종이 문자를 만들려 했던 이유는 단순하지 않았다. 흔히 훈민정음을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문자”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결과에 가까운 표현이다. 세종의 출발점은 가르침이 아니라 배제였다. 백성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어리석게 만들어진 구조가 문제라는 인식이었다.


백성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글이 되지 못했고, 글이 되지 못한 말은 국가의 언어가 될 수 없었다. 세종은 이 간극을 교육의 부족이 아니라, 문자 체계의 한계로 보았다. 그래서 그가 던진 질문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으로 기록할 것인가”였다.


2.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라는 선언


훈민정음해례본 서문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단순한 언어 차이의 진술이 아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 선언은 조선이 중국과 다르다는 정치적·문화적 자각이자, 기존 문자 질서에 대한 정면 비판이었다. 이는 사대의 부정이 아니라, 언어의 주권에 대한 선언에 가깝다. 조선의 말이 중국과 다르다면, 그 말을 담을 문자 또한 달라야 한다는 인식. 세종은 언어의 차이를 결함이 아니라, 새 질서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이 문장은 곧 이렇게 읽힐 수 있다.
“조선의 백성은, 조선의 말로 말할 권리가 있다.”


3. 세종의 통치는 언어에서 시작되었다.


세종의 통치는 법과 군사, 경제 이전에 언어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백성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관심을 가졌고, 그 말이 왜 국가에 닿지 못하는지를 질문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통치 방식이었다. 대부분의 군주에게 언어는 명령을 전달하는 수단이었지만, 세종에게 언어는 백성과 국가가 만나는 첫 지점이었다.


그래서 훈민정음은 정책의 부속물이 아니라, 통치 철학의 핵심이었다. 백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법은 온전한 법이 아니며, 백성이 읽지 못하는 국가는 진정한 국가가 아니라는 인식. 세종은 언어 접근권을 통치의 기초로 삼았다.


4. 애민은 감정이 아니라 제도였다.


세종의 애민은 연민의 감정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백성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울지 않았다. 대신, 울지 않아도 되는 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훈민정음은 바로 그 지점에서 탄생한다.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권력을 나누는 일이다. 기록의 권한을 독점해 온 지배층의 지위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세종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문자를 만들었다. 이는 애민이 감정이 아니라, 제도로 구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선택이었다.


5. 훈민정음은 왕의 취미가 아니었다.


훈민정음을 두고 “왕의 취미”나 “개인의 학문적 관심”으로 치부하는 시선도 존재한다. 그러나 문자 창제는 결코 개인적 취향의 산물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국가의 질서를 바꾸는 행위이며, 통치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결정이다.


훈민정음은 왕의 여가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왕의 책임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백성이 말할 수 있으나 기록할 수 없는 나라를 그대로 둘 수 없다는 판단. 세종은 그 책임을 문자로 감당했다.


요약 및 논의 ― ‘세종’이라는 질문


세종이라는 질문은 하나로 수렴된다.
국가는 누구의 언어로 말해야 하는가.


세종은 백성의 말을 국가의 언어로 끌어올리고자 했다. 훈민정음은 그 의지의 산물이자, 언어를 통해 정치의 주체를 확장하려는 시도였다. 그것은 문자 발명이 아니라, 통치 철학의 실천이었다.


다음 장에서는, 이 질문이 어떻게 구체적인 문자 설계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왜 훈민정음이 ‘과학’이자 ‘사상’으로 동시에 읽혀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유 질문 ― 이 장을 읽고


1. 국가는 누구의 언어로 말해야 하는가.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과연 모두의 언어인가,
아니면 여전히 특정 집단의 언어가 공적 기준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2. 세종은 백성을 ‘가르칠 대상’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주체로 보았다.
우리는 지금, 타인의 말을 어디까지 주체의 언어로 인정하고 있는가.


3. 애민은 감정이 아니라 제도였다고 할 때,
오늘 우리의 제도는 누구를 위해 설계되어 있는가.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는 없는가.


4.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권력을 나누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나누지 않고 있는 권력은 무엇인가.


5.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라는 선언처럼,
지금 우리가 다시 선언해야 할
‘다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참고 문헌


『훈민정음해례본』(1446) 서문 및 해례

『세종실록』

이기문, 『국어사개설』

최현배, 『우리말본』

김슬옹,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적 배경」

세종의 애민 정치·민본주의에 대한 역사학·국어학 연구 전반

문자사회학(문자–권력–기록–통치의 관계)에 대한 인문학적 논의



제5장. 『훈민정음, 처음부터 다시 읽다』「세종이라는 질문/‘창제자의 문제의식과 정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