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처음부터 다시 읽다』

제3장. 한자는 문자였고, 백성의 말은 소리였다

by 이다연


훈민정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말로 생각하고 어떤 글로 자신을 증명하고 있을까.
그리고 오늘의 우리는, 또 다른 ‘소리로만 남는 언어’를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한자는 문자였고, 백성의 말은 소리였다

― 문자로 기록된 언어와 기록되지 못한 언어의 경계


조선 전기의 언어 현실은 하나의 역설로 요약될 수 있다. 언어는 분명 존재했으나, 그 언어를 기록할 수 있는 문자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한자는 문자였고, 백성의 말은 소리였다. 이 구분은 단순한 수사적 대비가 아니라, 어떤 언어가 기록되고 제도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구조적 위계를 의미한다.


문자는 단순한 표기 수단이 아니다. 문자는 사고를 고정하고, 기억을 축적하며, 권리와 의무를 명문화하는 장치다. 문자로 기록된 언어는 법과 제도가 되지만, 소리로만 존재하는 언어는 사적 영역에 머무른다.

조선에서 한자가 유일한 공적 문자로 기능했다는 사실은, 곧 국가가 승인한 사고 체계가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준다.


1. 문자로서의 한자와 지배 질서의 고착


한자는 이미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에서 정치·외교·학문의 공통 문자로 확립되어 있었다. 조선 역시 이러한 문자 질서를 계승하며, 국가 운영 전반을 한문에 의존하였다. 법령, 실록, 외교 문서, 유교 경전은 모두 한문으로 작성되었고, 이는 문자 사용 능력이 곧 정치 참여의 자격 요건으로 작동했음을 의미한다. ¹)


그러나 한자는 조선어를 기록하기에 구조적으로 부적합한 문자였다. 표의문자인 한자는 의미 단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교착어인 조선어의 조사·어미·문장 구조를 온전히 반영할 수 없었다. ²) 그 결과 한문은 조선어를 기록하는 언어라기보다, 조선 사회의 지배 이념과 학문 체계를 유지하는 별도의 문자 언어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자는 문자 이상의 의미를 획득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록 도구가 아니라,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가르는 권력의 경계선이 되었다. 사대부 남성 계층만이 장기간의 교육을 통해 한문을 습득할 수 있었고, 문자 능력은 곧 신분과 정치적 영향력을 증명하는 지표로 작동하였다.


2. 소리로만 존재한 백성의 언어와 기록의 배제


백성의 언어는 일상 속에서 풍부하게 사용되었다. 노동의 현장, 가족과 공동체의 삶 속에서 조선어는 끊임없이 발화되었다. 그러나 이 언어는 문자로 고정되지 못한 채, 소리로만 소비되었다. 소리는 순간적이며, 기록되지 않는 소리는 사회적 기억으로 남지 않는다.


이두·향찰·구결과 같은 표기법은 조선어를 기록하려는 시도로 존재했으나, 이는 체계적인 문자로 발전하지 못했다. ³) 제한된 계층과 특정 목적 안에서만 사용되었으며, 백성 전체가 학습하고 활용할 수 있는 독립 문자 체계로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표기법은 한문 중심 질서를 보조하는 수단에 머물렀다.


그 결과 백성은 자신의 억울함을 글로 호소할 수 없었고, 국가가 발행한 문서를 스스로 이해하는 데에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말은 있었으되, 그 말은 공적인 기록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이는 개인의 학습 능력 문제가 아니라, 언어 접근권 자체가 구조적으로 제한된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3. 문자와 언어의 분리가 초래한 사회적 불균형


문자와 언어가 분리된 사회에서, 글은 곧 권력이 된다. 이해할 수 없는 문서는 권위로 작동하고, 해석할 수 없는 글은 복종을 요구한다. 이때 문자는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통치의 도구로 기능한다. 조선 사회에서 한문은 바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세종은 이 구조를 단순한 교육 문제로 보지 않았다. 그는 백성이 말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말이 문자로 옮겨질 수 없기 때문에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훈민정음해례본』 서문에 분명히 드러난다.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⁴)


이 진술은 백성의 무지를 탓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기존 문자 체계가 백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구조적 비판에 가깝다. 따라서 해결책은 한자를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언어를 온전히 기록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통합 사유 질문]


한 사회에서 어떤 말이 ‘문자’가 되고, 어떤 말은 끝내 ‘소리’로만 남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지금, 모두의 언어가 기록되고 해석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어떤 목소리는 구조적으로 글이 되지 못한 채 사라지고 있지는 않은가.


요약 및 논의

“한자는 문자였고, 백성의 말은 소리였다”는 진술은 조선 전기의 언어 현실을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언어의 부재가 아니라, 문자의 독점이 만들어낸 사회적 침묵이었다. 기록될 수 있는 언어와 기록되지 못한 언어 사이의 간극은 곧 발언권과 권력의 격차로 이어졌다.

훈민정음은 이 구조를 전환하기 위한 시도였다. 소리로만 존재하던 언어를 문자로 만들고, 백성의 말을 공적 기록의 영역으로 초대하는 일. 이는 문자 발명을 넘어, 언어를 통해 인간을 다시 정치의 주체로 위치시키려는 국가적 실천이었다. 조선은 이 선택을 통해 비로소, 말과 글이 하나의 언어로 만나는 가능성을 열게 된다.

■□ 각주

이기문, 『국어사개설』, 태학사, 1994, 23–27쪽.

최현배, 『우리말본』, 을유문화사, 1970, 15–18쪽.

김슬옹,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적 배경」, 『한국어문학연구』 46, 2010, 19–22쪽.

『훈민정음해례본』 서문, 1446.


■□ 참고 문헌

김슬옹. (2010).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적 배경」. 『한국어문학연구』 46, 11–35.
이기문. (1994). 『국어사개설』. 서울: 태학사.
최현배. (1970). 『우리말본』. 서울: 을유문화사.

『훈민정음해례본』. 1446.



제3장. 『훈민정음, 처음부터 다시 읽다』「한자는 문자였고, 백성의 말은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