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조선은 왜 말할 수 없는 나라였는가
훈민정음의 창제는 문자 체계의 발명이라는 단일 사건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구조적 언어 문제, 다시 말해 ‘말하고 있으나 말할 수 없었던 사회’라는 모순에 대한 응답이었다.
조선은 분명 언어가 존재하는 사회였으나, 그 언어가 문자로 기록되고 제도 속에서 기능하는 데에는 엄격한 장벽이 존재했다. 훈민정음은 이 장벽을 인식한 데서 출발한, 언어 질서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였다.
문자를 가진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표기하는 수단을 확보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고를 기록하고, 기억을 축적하며, 권리와 의사를 공적으로 표명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일이다.
따라서 조선이 ‘말할 수 없는 나라’였다는 진단은,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말이 제도적으로 배제된 사회였다는 의미에 가깝다.
✔우리는 흔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소리를 낼 수 있음과, 제도 안에서 말이 효력을 갖는 것은 같은 일일까?
✔오늘날 우리는 모두 말할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여전히 말은 하지만 기록되지 못하는 존재는 아닌가?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면서도, 성리학을 국가 운영의 이념적 근간으로 삼았다. 성리학은 학문 체계를 넘어 정치·윤리·교육 전반을 관통하는 통치 이념이었고, 이 질서 속에서 문자 역시 권위의 일부로 기능하였다. 한문은 단순한 기록 수단이 아니라, 유교 경전과 학문 전통을 담아내는 유일한 정통 문자로 간주되었다.
문제는 이 한문 체계가 조선어의 구조와 본질적으로 어긋나 있었다는 점이다. 한자는 표의문자로서 문자 수가 방대하고, 조선어의 교착적 문법과 음운 체계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한문은 극소수 사대부 남성 계층만이 장기간의 교육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고급 기술이 되었고, 문자 사용 능력은 곧 신분과 권력의 지표로 작동하였다.
백성은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은 기록될 수 없었고, 기록되지 않는 말은 공적인 세계에서 효력을 갖지 못했다.
자신의 억울함을 글로 호소할 수 없었고, 행정 문서를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는 개인의 학습 능력 문제가 아니라, 언어 접근권 자체가 구조적으로 제한된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세종은 이러한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훈민정음해례본』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 문장은 단순한 동정의 표현이 아니다. 언어 문제가 개인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제도와 문자 체계가 백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구조적 진단이다. 즉, 조선은 말이 없는 나라가 아니라, 말할 수 없게 만들어진 나라였다.
✔문자 접근권이 특정 계층에만 허용될 때, 그 사회는 과연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문자는 누구에게 가장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는가?
조선 사회에서 말은 일상적으로 사용되었으나, 글은 권력의 언어였다. 말은 사적 영역에 머물렀고, 글은 공적 영역을 독점했다. 이 단절은 단순한 표현 수단의 차이를 넘어, 사회 구성원을 발언 가능한 주체와 침묵해야 하는 대상으로 구분하는 기준으로 작동하였다.
이두·향찰·구결과 같은 표기법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체계적 문자로 기능하지 못했다. 제한된 계층만이 부분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 일관된 규칙을 갖춘 독립 문자 체계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백성의 언어는 언제나 ‘보조적’이거나 ‘비공식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제도적으로 안정된 국가였으나, 언어적으로는 심각한 불균형 상태에 놓여 있었다.
국가는 백성에게 말을 요구했지만, 백성이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수단은 제공하지 않았다. 이 모순이 바로 훈민정음 창제를 요청한 역사적 조건이었다.
✔말은 하지만 글로 남길 수 없었던 사람들의 삶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오늘날 디지털 공간에서도, 여전히 ‘말은 있으나 기록되지 않는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는가?
세종이 직면한 문제는 단순히 새로운 문자가 필요하다는 기술적 요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정치적 질문이었고, “백성을 어떤 존재로 볼 것인가”라는 인문학적 물음이었다. 세종은 백성을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언어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국가의 지속 가능성 또한 확보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조선이 ‘말할 수 없는 나라’라는 상태를 자각한 결과이자, 그 상태를 전환하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이는 문자 하나를 더하는 일이 아니라, 언어 질서를 재편하는 선택이었다. 말과 글 사이의 단절을 해소하고, 백성의 언어를 공적 세계로 초대하려는 시도였다.
이 점에서 훈민정음의 창제는 단순한 애민 정책이 아니라, 국가가 언어를 통해 구성원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에 대한 선언이었다. 조선은 이 선언을 통해 비로소, 말할 수 없는 나라에서 말하게 하는 나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국가는 언제 개인에게 ‘말할 권리’를 허락하는가, 그리고 언제 그것을 제한하는가?
✔만약 훈민정음이 창제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떤 언어적 삶을 살고 있을까?
✔당신은 지금, 자신의 말이 온전히 기록되고 전달되는 언어 안에 살고 있다고 느끼는가?
✔훈민정음은 과거의 문자일까, 아니면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질문일까?
이 장의 질문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다만, 훈민정음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도
이 질문들은 이미 조선 사회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김슬옹. (2010).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적 배경」, 『한국어문학연구』 46, 11–35.
이기문. (1994). 『국어사개설』. 태학사.
최현배. (1970). 『우리말본』. 을유문화사.
『훈민정음해례본』, 1446.
세종대왕 이미지 자료 / 나무위키
제2장. 『훈민정음, 처음부터 다시 읽다』「조선은 왜 말할 수 없는 나라였는가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