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 이번 글은 극장 개봉 영화 <<얼굴>>을 시청하고 적은 후기입니다.
- 객관적인 기준보다는 개인적 취향과 인상을 토대로 편하게 감상을 남겨보았습니다.
- 주요 인물 설명, 결말을 포함한 스토리 전반에 대한 간략한 언급, 그에 대한 의견 등이 글에 포함되어 있어 열람에 주의를 요합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께서는 먼저 작품을 보고 읽어주세요! (26년 1월 10일 기준으로 넷플릭스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임영규 장인은 맹인임에도 뛰어난 도장 전각 솜씨를 발휘해 세간에서 '기적'이라고 불린다. 아들 임동환의 도움을 받아 도장 공방을 운영한다. 임동환은 아버지를 보필하는 매니저의 역할로 일하고 있다.
어느날, 두 사람은 공방의 운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 김수진PD가 기획한 다큐멘터리의 촬영에 임하게 된다. 그 기간에 임동환에게 경찰이 전화를 걸어와 오래전 가출한 줄로만 알고 있었던 어머니의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알린다. 유골의 상태로 보아 사망은 오래전 발생했으며, 타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며 자라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는 그는 남아 있는 사진이 없어 영정에 백지를 걸고 장례식을 치른다. 고인 측이 남긴 유산을 차지하려는 심산으로만 장례식에 찾아온 초면의 외친들이 무례한 태도로 임영규 부자를 들볶는다. 임동환이 매우 불행한 일을 겪고 있는 중인데, 곁에서 그를 지켜보고 엿들은 김수진 pd는 이 모든 상황이 특종거리라는 생각에 들떠 있다. 혼란에 빠진 임동환은 사망한 어머니의 지인들을 취재해 보자는 김수진 pd의 부추김에 어영부영 동조하게 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죽은 정영희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방송작가 행세를 하며 어머니 지인들의 진술을 듣는다. 그러면서 어머니에 대한 달갑지 않은 세평들을 하나하나 알아가게 된다. (여기까지가 시놉시스쯤 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달갑지 않은 세평들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은 첫째로 정영희 씨가 대단히 추한 외모를 가졌다는 진술이다. 외모가 추할 뿐 아니라 행동거지 또한 타인과 잘 조화되지 않았다고 한다. 정영희 씨의 외모를 비웃는 지인들의 일관된 모멸적 태도에 임동환은 괴로워하며 김수진 pd가 밀어붙이는 취재에 회의감을 내비치지만, 김수진 pd는 특유의 어르는 듯한 태도로 임동환을 종용한다.
김수진과 임동환은 정영희가 일하던 피복공장(청풍섬유)의 다른 직장동료를 수소문해 찾아간다.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으나 같은 팀으로서 정영희를 가까이서 부리며 재봉사로 일하던 '진숙'이다. 진숙은 정영희의 부고를 듣고는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이 당한 일을 털어놓는다. 청풍섬유의 사장인 백주상이 자신을 강간했고, 정영희가 이에 부당함을 느껴 항의했으나 자신이 당한 일이 주변에 널리 알려지는 것을 괴로워한 진숙이 오히려 정영희를 나무라며 손찌검까지 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백주상 사장에게서는 믿기 힘든 진술을 듣게 된다. 다름아닌 아버지 임영규가 아내 정영희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충격에 빠진 임동환이 아버지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묻자, 임영규는 자신이 시각장애인으로 살며 겪어온 모멸을 토로하면서, 앞이 보이지 않는 그에게 정영희의 외모가 빼어나다며 두 사람의 연애를 부추기던 공장 사람들 사이에서 실은 정영희가 추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그것을 깨달았을 때의 배신감을 이야기한다.
임동환은 아버지가 결국 살인자라고 생각하여 그를 비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상을 덮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김수진 pd를 만나 백주상 사장 인터뷰 때 빼앗았던 카메라를, 내용을 일부 삭제한 뒤 돌려 준다. 정영희의 지인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을 도촬하는 용도로 김수진 pd가 줄곧 숨기고 사용해 왔던 카메라로, 백주상 인터뷰 때 빼앗았다가 아버지에게 불리할 만한 내용을 지워 돌려준 것이다. 김수진pd는 비아냥거리는 말과 함께 카메라를 받아들며 백주상에게서 입수한 정영희의 사진을 건넨다. 김수진 pd가 떠난 뒤 사진 봉투를 열어 어머니의 얼굴을 본 임동환의 오열과 함께 영화가 끝이 난다.
예술 활동에 종사하는 캐릭터가 등장하기 때문에 난해한 내용이 동반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한 시간 반 남짓한 상영시간(약 103분) 내에서 일종의 탐정영화처럼 밀도 있게 스토리를 진행하기 때문에, 애초에 '심오한 사변의 삼천포'에 빠질 여유가 없는 영화다. 영화의 진행을 큰 어려움 없이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인물들의 행적을 나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멋진 작품이라고 느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의 생산과 평가에 대한 영화의 직설적 문제제기에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감상의 초점이 아름다움으로 집중되어 여러 가지 의문의 형태로 구체화된다. 심미안이란 무엇인가? 그 심미안은 개인의 취향을 넘어서는 객관적 선구안의 영역에 있는가?
주인공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정영희라는 인물에 대해 말할 땐 가장 먼저 그 '추한 외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의 다른 장점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아 예컨대 그녀의 선한 심성에 대한 이야기는 뒷전이다. 그들에게 정영희의 '선함'은 말할거리가 아니다. 이 영화는 거의 피카레스크 영화로 읽힐 정도다. 인터뷰어라는 관찰자의 입장을 취한 채 영화 속에서 능동적으로 행위하지 않는 임동환을 제외하면, 영화 속 인물들이 체면이나 타인에 대한 예의같은 중요한 규범들을 등한시한 채로 한 인간이 얼마나 추한지를 성토하는 데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외모에 대한 논평에는 최소한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 현실에서는 상식임을 감안한다면 이 영화의 세계는 약간은 가상의 공간, 과장된 공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성싶다. 피카레스크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은 금고 속에 든 금괴를 원한다. 금고 속에 있다는 것은 그 소유권이 정해져 있음을 뜻하므로 현실에서라면 그 금괴는 인간의 탐욕이 미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피카레스크적 인물은 끝내 금괴를 열어젖힐 때까지 탐욕의 마수를 거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인물이 있는 세계에서 제일의 미덕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의 설계상, 한 인간의 외모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를 진술하는 데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되고 있다. 이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따라서, 앞을 보지 못하는 전각 장인의 예술관에 대한 이해도 달라질 것이고, 그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영화적) 참작의 여지도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 천금같이 무거운 이 피카레스크적 세계관을 받아들일 때, 임영규의 악행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임영규의 작중 사회적 입지가 어떻게 자리잡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임영규의 인생부터가 예술적 가치로써 규명되고 있는바, 조각예술가로서는 치명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작업물을 생산해 낸다는 점에서 그가 '이 영화 속에서' 얼마나 위대한 인물일지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이다. 김수진 pd가 촬영하는 인터뷰에 응하면서 임영규가 어떤 대사로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지를 상기해보자. "못 보는 사람은 아름다운 것이 뭔지 모를 거다. 아니야. 일종의 오해야 오해."(예고편에도 담긴 장면이라서 대사를 정확히 적어올 수 있었다.) 이 주장은 자신이 이 영화 속에서 가장 막중하게 다뤄지는 가치의 척도로써 잘 기능할 수 있는 자임을, 자신이 비록 앞을 보지는 못하지만 안심하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아름다움의 감정평가사'임을 홍보하는 자화자찬의 멘트로도 읽힐 수가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임영규는 일종의 위대한 권력자다. 진시황의 도량형 통일이 그가 확보한 권력과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었던 것처럼, 임영규 장인이 가진 정확한 심미안의 기적은 <<얼굴>>이라는 영화 속에서 강력한 힘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멋진 도장 작품을 제작해내는 전각 실력보다는 무엇이 아름답고 추한지를 분별하는 능력이 더 강조되고 있음에 주목해볼 법하다. 그가 도장을 실제로 제작하는 장면, 제작한 도장을 날인해 결과물을 보여 주는 장면은 영화 내에서 두세 번밖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기억되는데, 담백하게 연출된 그 장면에서 볼 수 있는 도장과 날인은 평범한 관객의 입장에서 그렇게 대단한지 의문이 드는 것이었고, 영화의 연출로도 그 도장이 정녕 아름다운지를 강조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도장을 새겨 보이는 장면 중 하나는 청풍섬유 공장 앞 길거리의 좌판대에서, 하나는 떠들썩한 술자리에서 이루어진다. 그의 실력이 영화 내에서 그렇게 존귀하게 다루어진다고는 볼 수 없었다. 인터뷰에 응해 조각을 제작하는 도입부 장면은 앞서 인용한 대사가 나오는 장면으로, 여기서조차도 도장의 가치를 확보하는 것은 그 결과물 자체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그의 심미안에 의존하고 있다. 명품 가방과 모조품의 가치변별이 명품회사 로고에 일부 의존하고 있다는 이야기처럼, 관객의 눈으로든 연출적으로든 평범해 보이는 그 도장은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움의 퍼뜩함이 없고, 결국 임영규 자신의 심미안의 보증을 통해서야 미적 가치가 확보된다.
그가 정확한 심미안으로 대상의 미적 가치를 분별하고 있고, 그 심미안으로 자신의 결과물을 보증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뛰어난 전각 장인으로 공인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의 아름다움은 그 자신의 중개가 없이는 유통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론적으로 임영규가 가진 권위의 근원은 일단은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능력보다는,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능력 쪽으로 연출되어 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자기 반려자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채로 공장 사람들에게 기만당했다는 사실은 (영화의 피카레스크적 세계관 내에서) 심미안의 공신력에 치명적인 결함이 된다. 얼마나 그게 치명적이나 하면 그 결함을 '물리적으로 제거해야만 한다'는 충동을 참아낼 수 없을 정도다. 단순히 아내가 추하다는 것에 괴로움이 있는 게 아니다. '아름다움에 관한 알기 쉬운 사실'이, 아름다움에 관해서는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자에게는 영영 파악할 수 없다는 것에 해결하기 어려운 괴로움이 있다. 그가 '극복했다'는 동사를 통해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변호하고 있는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임영규의 살인을 옹호하는 인물은 없지만, 아들조차도 임영규를 살인자라고 비난했고 그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다름아닌 이 영화의 세계관이 임영규의 변호를 맡은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가 관객 된 입장에서 정영희와 임영규의 과거 이야기를 따라가다가도 한번씩 아들 임동환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면, 영화는 사뭇 다른 색채를 내비친다. 임동환은 지금 상당히 당황스러운 사건들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휘둘리고 있다. 뜬금없이 어머니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연락이 왔다. 뜬금없이 장례식에 찾아온 불청객들에게 어머니가 못생겼다는 둥, 유산은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둥 싫은 소리를 들었다. 이런 괴로운 상황에 처한 남자를 보며 동정은커녕 공명심에 부푼 pd가 멋대로 자기 어머니의 과거지사를 들쑤시고 거기를 마지못해 따라가서 사람들에게 들은 내용은 하나같이 불쾌하고, 배려심 없는 말뿐이다. 그는 당혹스럽다. 이 당혹감이 박정민 배우의 뛰어난 표정연기로 생생하게 전달되기 때문에, 나는 비로소 이 영화가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되고, 인터뷰이들과 그들의 진술이 짜놓은 피카레스크적 세계의 액자 바깥에 있는 임동환의 상식적 시선을 알아차린다. 당연하게도 내 시선 또한 임동환의 입장과 동기화되어, 외모에 대한 평가로 타인에게 상처 입히기를 서슴지 않는 그들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임영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그가 극단적 외모지상주의 세계관 속에서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저지른 일 또한 상식인이 묵과할 수 없는 악행이었음을 상기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그들이 살던 세계관 자체에 대해서도 점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는 이 영화가 다소간 교훈적인 메시지를 설파하는 효과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가지고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아름다움이 가장 중요한 세계에 사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 다음, 그 세계 속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인물(임영규)이 취하게 되는 결말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그것을 관찰하는 자의 입장에 관객을 이입시킴으로써 그 세계가 부당함을 상기시킨다.
나는 마지막에 어머니의 사진을 받아들고 오열하는 임동환을 보면서, 그 오열이 마침내 어머니의 사진을 되찾았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측했다. 임동환은 취재를 pd가 주도하게 내버려 두면서도 어머니의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이 없는지만은 꼭 물어보곤 했었는데, 그 어디서도 어머니의 사진을 찾아낼 수 없었다. 액자 안의 회상씬이 진행될 때에도 정영희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관객과 임동환은 마지막에 가서야 그 얼굴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의 혹평 속에서만 그려지던 어머니의 얼굴을, 비로소 그 사진을 통해 확인하게 되므로 그 구출에 영화의 방점이 찍혀 있는 듯싶다. 정영희의 얼굴이 드러나도 좋은 세계로 그녀의 모습을 구출해 오는 듯한 여운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며칠전에는 이 영화를 봤다는 친구 P가 마지막 장면에 대한 해석을 제시해 주었는데, 그것이 아주 설득력 있었다. 임동환이 받아든 사진 속의 얼굴은 우리가 봤을 때 사람들이 입을 모아서 흉보던 만큼 못생기지 않았다는 점에 결말의 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저 사람들의 말로만 상상하게 되는 추악한 외모만으로 임영규가 살인을 저질렀으니, 그가 못생긴 사람을 예쁘다고 속아 결혼을 해 버렸다는 수치심으로 괴로워했듯, '그 정도로 못생기지는 않은 사람'을 그 정도로 못생겼다고 생각해 살인을 저질러 버렸다는 사실을, 아들인 임동환은 깨닫고 우는 것이 된다. 친구의 해석이 정말 명쾌하게 들어맞아서 나는 영화를 본 뒤에 감상을 나누는 기쁨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재미있게 본 한편으로 어딘가 석연찮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어디가 마음에 걸렸는지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고 나서, 나는 그것이 김수진pd라는 인물의 만듦새에 대한 아쉬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게 되었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의견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답지' 못한 인물이 김수진pd이라고 생각한다. 김수진pd는 언행이 불쾌하다. 액자 안의 세계에 속한 인물이 아닌데도 액자 안의 인물들에 준하는 무례함으로 임동환과 관객을 자극한다. 액자 바깥의 상식적 세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그 세계가 요구하는 상식의 코드를 따라가지 않는다. 유별나기 때문에 자꾸만 눈에 걸리는 캐릭터다. 김수진pd는 영화 내의 모든 사건들을 특종거리라고만 생각하는 듯하다. 원하는 것만 생각하고 그것을 쟁취하는 데 필요한 수고와 고려사항은 안중에 없어서 유아적이다. 정영희의 유족들이 고인의 재산을 당연히 자기네 것이라고 여기는 듯한 태도를 내비쳤던 것처럼, 김수진 pd는 정영희와 임동환의 사연에 대한 취재권이 천부적으로 보장되어 있다는 듯이, 그 권리에 비하면 그들의 고통은 사사로운 감정에 불과하다는 듯이 일을 밀어붙인다.
이야기의 진행을 주도하는 인물이 김수진pd이므로, 김수진 pd의 태도는 영화의 안내자로서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일단 김수진pd에게는 인간을 대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응당 가지고 있을 만한 노련미가 없다. 임동환에게 어머니의 과거를 파헤쳐 보자고 권할 때, 노련함을 갖춘 상식적인 pd였다면 먼저 그가 처한 괴로운 상황에 대한 유감의 말을 진심을 다해 전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영화 속에서 김수진pd는, 동물원에서 솜사탕을 보채는 어린아이처럼 임동환에게 칭얼거린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정확한 대사가 하나하나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내내 조르는 듯한 멘트밖에 없다.
"그 얘기를 좀 해 주실래요?"
"아이... 그건 좀."
"에이... 그냥 좀 말해 주세요."
"사실은... 이랬습니다."
"이번엔 그걸 좀 해 볼까요?"
"아이... 그건 좀."
"에이... 좋잖아요. 해 보자고요."
"그러시죠..."
"에이~ 그냥 좀~" 하고 말끝을 늘이면서, 솜사탕 정도는 별 것도 아니니 좀 사 달라는 느낌의 말투를 쓴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반복된다. 이 인물만이 유독 심하게 드러내고 있는 미성숙한 태도와 대사의 불쾌감이 혹시 의도된 것인지를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었다. 의도된 것이라면, 그 불쾌감으로 관객에게 부하를 줌으로써 얻는 영화적 효과가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 될 텐데, 나로서는 어떤 특별한 영화적 효과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수진 pd의 무례한 언동이 작품 내에서 단 한 번도 제동이 걸리지 않고 거듭되기 때문에 영화의 몰입에 내내 방해가 된다. 아무도 그 무례한 요구를 거절하거나 질책하지 않으므로, 이 어리숙한 종용이 예외 없이 먹혀들어가는 셈인데, 나쁘게 말하면 왜 저런 뻔한 수작에 여지없이 넘어가는지 오히려 당하는 쪽이 의아하게 여겨질 지경이 되는 바람에, 김수진의 응석을 받아주는 인물들조차도 미더운 현실감을 잃는다. 영화에서만큼은 '그렇게 뻔한 수작을 번번이 당해 주는 녀석들이 문제다.'라는 비난이 부당하지 않다. 모든 캐릭터가 연출가의 의도로 빚어졌기 때문이다. 즉, 그녀의 무례가 당연하다는 듯 받아주는 이 영화의 세계관은, 문제삼을 만하다.
점입가경으로,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다가 갑작스레 정의감을 표출하는 돌연함이 김수진의 성격을 더욱 이상하게 만든다.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취재를 강행하던 인간으로만 묘사되었던 인물이, 진숙이 당한 성폭행에 대해 듣고 나서는 돌연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김수진pd가 정말로 정의감에 불타 눈물 흘릴 줄 아는 인간이었다면, 임동환의 어머니가 겪은 직장내 괴롭힘에 대해서는 왜 한 번도 응분의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던 것인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김수진pd의 눈물을 본 임동환의 표정이 마치 내 마음의 얼굴이 짓고 있을 법한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지켜보는 사람의 당혹스러움을, 박정민 배우는 너무나도 훌륭하게 연기해 내고 있는데, 바로 이 장면 때문에 나는 김수진pd라는 인물의 불쾌한 말투와 이중성에 연출 의도가 있는지를 다시 한 번 곱씹어봤지만, 결국 그럴듯한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아무래도 '매 먼저 맞기' 권법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나는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인물의 성격에 대한 설계상의 실수를 그 영화 안에서 사전에 지적함으로써 관객이 떠올릴 비판의 말을 무마하려는 방식을 취했다고 추측하면, 너무 터무니없이 넘겨짚는 것일까? 같은 이유로 마지막 장면 또한 의아했다. 도촬용으로 쓴 카메라를 돌려받으면서도 현실과 타협하는 선택을 한 임동환에 대한 조롱을 잊지 않는 김수진pd의 모습은 당혹스러웠다.
'인물의 성격이 입체적이다'라는 평은 호평으로 읽히지만, '인물의 성격에 일관성이 없다'라는 평은 악평으로 읽힌다. 김수진 pd는 왜 입체적인 인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일관성 없는 인간으로 받아들여질까 생각해보았다. 결국엔 그 인물이 아무 이유 없이 관객에게 강제하고 있는 불쾌감 때문인 것 같다. 불쾌감이 필요했던 영화적 명분이 마땅치 않다면, 그 불쾌감을 관객에게 강요해야 할 이유가 없다. 또한 악해 보이는 인물이 선한 선택을 하고도 불쾌하지 않으려면, 해당 인물의 악함에 대한 작품 내에서의 자각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매 먼저 맞기' 권법이 여기서 사용되었다면 좀더 슬기로운 활용이 되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영화는 정말 재밌었다. 한 캐릭터의 ng가 영화의 전체적 만듦새에는 감점 요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영화를 감상하면서 얻은 재미와 감상을 마친 뒤의 여운을 생각한다면 해프닝으로 넘어갈 정도였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로 표출되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 자체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교훈적 비판의 메시지가 영화의 연출과 구성을 통해 짜임새 있게 시도되고 있다는 것이 멋지다. 아름다움이라는 규명하기 어려운 가치에 대한 물음을 던져 보고 거기에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답하는 과감함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리고 선명한 주장은 건설적인 토론의 장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운 시청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영화가 그런 교훈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교훈을 전달하는 효과를 가진 그 구성이 일차적으로 관객의 흥미를 돋우는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미더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