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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Mar 27. 2023

기억해야 할 '희생'과 '헌신'

글로벌 다양성 이해 (문화 차이, 제13화)

서로 다른 보훈의 방법 

기억해야 할 희생과 헌신

우리들 가운데의 조용한 애국자



서로 다른 보훈의 방법 

'온고이지신'(溫故以智新)으로 역사는 늘 되새기는데서 그 가치를 찾는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의사가 순국하였다. 그런데, 2023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기일에 대한 이야기보다 모두가 활짝 핀 벚꽃 구경에 열중인듯하다. 시간이 많이 흐른 탓인가? 물론, 그 전날 대통령이하 많은 이들이 '천안함' 추도식을 가지며, 전몰자에 대한 '기억과 예우'를 울먹이며 가슴에 새기기도 했다. 역사 평가의 잣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분들을 얼마나 잘 기억하느냐?”이고, 그 일은 국민들의 관심과 기억력에 달렸다. 


'알링턴'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미국 대통령(출처: 연합뉴스)

미국 워싱턴 근교, ‘알링턴’ 국립묘지는 많은 미국인들은 물론, 외국 원수들이나 국빈들도 찾아 헌화하는 곳이다. 녹색 잔디밭 위에 가로 세로줄 맞추어 꼽아 놓은 수많은 흰색 십자가는 이들 역사의 자부심이다. 다 민족국가이지만 미국민들의 군인에 대한 사랑과 신뢰는 유별나다. 국가가 그만큼 많은 전쟁을 치르며 성장하였고, 개인들도 각종 전투에서 계급의 고하를 불문하고, 희생과 헌신의 모습을 보인 탓이다. 


미국민들은 행여 전투 영웅들을 잊을세라 항공모함 '니미츠', '에이브럼즈' 전차 등등 군의 주요 전투장비는 물론, 주요 거리나 건물, 각종 기관에도 숱한 전몰자들의 이름을 붙이고 해마다 이들을 기념한다. 아마도, 살아남은 자로서 죽은 자들에 대한 도리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도 그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게 하여 국가나 국민들이 부를 시 언제든 나설 수 있는 용기와 자부심을 갖게 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필자가 근무하였던 오스트리아는 '전쟁으로 흥하였고 전쟁으로 망한 나라'였다. 전쟁 때마다 많은 군인이 죽었다. 이 나라 각지를 여행하다 보면, 국가급 박물관은 물론, 시골마을 교회나 고등학교 곳곳에 자신들의 마을 출신 참전 용사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새겨 그 면면을 후손들이 기억하게 하고 있다. 당시 상황이 어떠했든 모두 국가의 부름을 받고 희생된 죽음이었으니...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영국, 독일 등 유럽 각국들도 희생자에 대한 추모의 발길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현리'지구 전투 위령비와 '다부동' 전투 전적비

1950~53년 동안 벌어진 한국전쟁으로, 수 십만 명의 군인들이 산화하거나 불구자가 되었다. 그 긴 기간, 수많은 전투현장 곳곳에 명예와 희생의 스토리가 점철되어 있을 터이다. 전투 하나, 하나가 치열했던 만큼 국군 용사 중에 영웅으로 기릴만한 사람이 수 없이 많겠지만, 정작 영웅으로 알려져 조국과 민족으로부터 추앙받는 사례는 많지 않다. 전쟁 이후, 어려운 국가 형편으로 그랬다지만 그저 몇몇 '전적비'와 '무명용사 기념비' 정도로 기리는 것도 안타깝다. 그리고, 더욱 황당한 것은 전쟁통의 기록 부실을 이유로 일반 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 일일이 제대로 예우를 갖추지 못하는 것인데…, 국가가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 군은 또한 군부 독재에 연루된 과거의 아픔을 갖고 있다. 하지만, 몇몇 정치군인으로 인한 부정적인 편견 때문에 군의 역할과 존재가 폄훼될 수는 없다. 군은 '국민의 사랑을 먹고사는' 집단이다.


일본에서 의인 '이수현'을 추도하는 행사(출처: 연합뉴스)

2001년, ‘이 수현’이라는 한국 유학생이, 일본의 지하철 역에서 철길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고 자신은 열차에 치어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고인이야 본능적으로 ‘사람을 살리겠다’며 앞뒤를 돌보지 않고 취한 행동으로 보이지만, 일본인들은 한국인이 목숨을 던져 일본인을 구하였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동받은 모습이었다. 이 유학생의 의로운 헌신에 당시, 일본 총리까지 조문할 정도로 일본인들은 칭찬과 애도 일색이었다. 


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인들의 의인에 대한 추모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고, 영화 제작은 물론 장학재단까지 설립하고 고인을 기리는 모습에, 오히려 고인의 모친이 ‘고맙다’고 인사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에 비해,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일이나 고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당시에도, 우리들의 반응은 언론에서 보도되자. ‘그냥, 누군가가 그렇게 했구나’ 정도였다. 


우리 주변에도 세월호 사고는 물론, 화재 사건 등 여러 사고 현장에서, '의인'으로 삶을 희생한 분들이 한, 두 명이 아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희생과 숭고한 삶을 추도하며 그 정신을 이어가려는 움직임은 드물다. 기념 동상 등을 제작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모두가 일상을 핑계로 그 일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이런 식의 망각이 계속되면, 기억해야 할 사회적 가치마저 빛을 잃고, 희생과 헌신은 요원해진다. 이제야, 보훈이 강조되고 보훈처가 보훈부로 승격되었다. 보훈의 질도 처에서 부로 승격된 만큼 향상될 수 있을까?


기억해야 할 희생과 헌신

한국전쟁 이전에 우리가 식민지배를 당한 굴욕의 현장에서, 많은 분들이 나라 잃은 한과 울분을 못 참고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하지만, 예전에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한(恨) 섞인 자조까지 있었다. 일단, 독립운동에 뛰어들면 집안은 일제에 의해 풍비박산이 났다. 그 여파로 아들, 딸은 도피를 해야 했으니, 손자, 손녀까지 덩달아 무식꾼이 되고, 무식하니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유명 가문의 손자가 일자무식으로 막노동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껏 정부가 그분들의 행적을 찾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가 그분들을 기억지 못하고, 그분들의 후세들을 돌보지 못한 경우도 많다. 


친일행위자 명단(출처: 경향신문)

반면에, '반민족 행위자' 처벌이 흔들리는 동안 정치적 혼돈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친일파들은 오히려, 해방 이후 신생 정부에서 자신들의 경륜과 행정 경험으로 고위 관리직을 독점하고, 부마저 대물림하며, 그 자손들을 유학까지 보내었다. 그리고, 유학을 다녀온 자식들은, 다시 사회 각계각층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한국의 근세사는 오랫동안 '이념 분쟁'과 더불어 '가치의 혼돈'이라는 암울한 시기를 겪었다. 


비록,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이제부터라도, 특권과 반칙을 떠나서, '친일잔재 척결'만큼은 더디더라도 끝까지 해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외압이 거세다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희생과 헌신에 몸을 사리고 외면하는 사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단 한순간이라도 이민족의, 무력에 굴종하는 사회라면 얼마나 비겁한 사회인가? 굴종의 반복은, 국민성마저 비열하게 만들고, 모두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굴종의 모습 때문일까? 일부 일본 정치인들은 아직도 우리 국민성 폄훼하거나, 업신여기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이를 보면, 분노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이 앞선다. 항상 ‘옳고, 그름’에 집착하던 우리 조상에 비해, 현재의 우리는 점점 무기력해지고, 더욱 불건전한 사회로 흘러가는 것은 아닐까?... 해서이다.

 

우리들 가운데의 조용한 애국자  

문득, 소리 없이 국가에 기여하던 젊은 애국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앞서 언급한 수많은 '의인'들처럼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여전히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기개가 살아있는 듯하다. 


2015년 목함지뢰 폭발사건(출처: 한국일보) 

2015년 8월, GOP수색대 간부들이 수색 도중 북한군 지뢰폭발 사고로 큰 부상을 입었다. 함께 있었던 수색대 병사들은 평소 훈련받은 대로 침착하게 사주경계를 하였고, 부상당한 동료를 긴급하지만 차분하게 구조하는 모습이, 근처에 설치된 CCTV로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알려졌다. 불행한 일이었지만, 국민들은 우리 젊은이들의 의연함과 훈련된 모습에 군을 더욱 신뢰하였을 것이다.


당시 상황은, 북한의 지뢰도발에 이은 대북 심리전으로, 그리고 상호 포격으로 북한이 '준전시' 상태를 선포하는 등 대한민국을 위협하여 남북 간 긴장상태가 최고조에 달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한 방송은 얼토당토않게 '시민들의 생필품 사재기'와 '예비군 외국 도피설' 등을 흘리며 대남 심리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성숙된 모습으로 침착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하였다. 국가와 군의 안보 태세를 신뢰한 결과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공고한 자세는 북한 지도부의 생각을 변화하게 하였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단합되고, 의연한 자세를 보임으로써, 적 도발의 기를 꺾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당시, 전방 각급 부대의 우리 병사들의 결연한 태도였다. 당시 분위기는 자칫 전면전으로 번질 위기감까지 차 있었다.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인간 본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국가와 전우를 위한 헌신을 평상시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실제 위기 앞에서도 이를 실천할 수 있을까? 그럴 때, 하필이면 전역명령을 받은 병사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얼른 집으로 가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터인데...? 많은 병사들이 "동료를 두고 혼자만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며, 자원해서 전역 연기를 신청하였다. 전방에서 위기가 고조된 상황에서 전역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병사들이 내리기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긴장이 가라앉자, 전역하려는 이들에게 L 모 그룹 등 많은 기업들이 채용하겠다고 제의하였다. 기업 홍보를 노린 이벤트성이라기보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높이 평가한 결과일 것이다. 사실, 그 어떤 자기소개서나 스펙보다 가장 어려울 때, 가장 진실하고 실질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보여준 것이니까... 이런 모습이 우리 모두의 가치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 


군의 사열을 받는 '샤를르 드골' 대통령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아메리칸 퍼스트!”를 주저 없이 부르짖었고, 한때,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도 ‘위대한 프랑스!”를 외쳤다. 푸틴, 시진핑, 아베… 모두가 자국민에게 던지는 '국가 사랑' 메시지는 유사하다. '위대한 대한민국!'은 '국가주의'를 내세우자는 게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헌신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국가는 저절로 강해진다. 나만 잘 산다고 잘 사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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