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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Apr 19. 2023

서구의 '이슬라모포비아'(이슬람공포증)

글로벌 다양성 이해 (이해와 어울림, 제2화)

중세 말, '이슬람 공포증'을 극복한 서구 기독교 사회

서구의 '외국인 혐오증'(‘제노포비아’)과 이슬라모포비아'('이슬람 공포증')



중세 말, '이슬람 공포증'을 극복한 서구 기독교 사회

십자군 전쟁과 '오스만 터키'의 동 로마제국 함락에 이은 이슬람과 기독교(구교) 세력의 세 번째 대결이, 서구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현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에서 벌어졌다. 1683년은 서구의 역사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해였다. 발칸반도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이슬람군이 서구의 기독교의 심장인 ‘비엔나’까지 진출하자, 전 서구 기독교 사회가 이슬람 공포증(‘이슬라모포비아’)에 떨었고, 이슬람은 한껏 서구에 대한 우월을 과시하였다. 


무슬림과 기독교의 '비엔나' 공방전(출처: 위키백과)

당시, 서구는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검'이라는 이슬람의 호전성에 강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목숨처럼 여기는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항복해서 개종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신념을 심어주기 위한 구호가 아니었나 생각되지만, 서구 기독교 사회는 이를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러한 정신 무장 탓일까? 이슬람이 ‘비엔나’를 포위하자 공포에 떨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주도한 서구 기독교(구교) 연합군은, 함께 ‘비엔나’에 진입한 터키군을 천신만고 끝에 물리치고, 퇴각하는 터키군을 추격하여, 발칸반도의 상당한 영토까지 확보하면서 서구는 안정을 되찾았다. 그로부터, 250여 년 전 무슬림과의 전쟁에서 동로마를 외면하였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기독교도가 결속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하자, ‘이슬라모포비아(이슬람 공포증)’에 시달렸던 오스트리아는 수도 '비엔나'의 중심에 왕궁과 더불어 도심의 상징물로 자리 잡은 고딕양식의 거대한 성당인 ‘스테판 대성당’ 외벽에 포획한 터키군의 포판을 박고 그 위에 개머리를 조각하여 매달아 놓았다. 또한, 이슬람이 패퇴하며 남기고 간, 대포를 녹여서 큰 종을 만들어 달았다. 이것은 동로마를 멸망시킨 ‘오스만 터키’가 정복지 교회의 종을 수거하여 ‘콘스탄티노플’ 공략 시 대포의 탄환으로 사용한 것을 설욕한 것으로, 모두 ‘이슬라모포비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발칸반도까지 영역을 넓히며, 1865년 ‘프러시아-오스트리아(보-오) 전쟁’에서 프러시아(독일)에 패할 때까지, 약 200여 년 간 서구의 종주국으로서 행세하였고, 이슬람은 1683년 패퇴 이후부터 계속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서구 각국의 공세에 밀리는 형세가 되었다.


서구의 '외국인 혐오증'(‘제노포비아’)과 이슬라모포비아'('이슬람 공포증')

제국주의가 종말을 고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구는 출산율 감소 등 정치, 경제적 이유로 식민지 출신의 많은 무슬림 이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슬람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서구가 이슬람을 몰랐던 이유는 자신들이 믿는 종교의 무게가 과거와 달라진 것도 한몫했다. 


쇠퇴하는 서구의 교회(출처: 기독일보)

무슬림은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지만, 서구가 한때 믿었던 기독교라는 종교는 그 영향력이 쇠락하였고, 종교적 관심도 예전 같지 않다. 예컨대, 건립되는 교회 수가 많지 않고, 교회에 가보면 주일 예배나 미사 시간조차 좌석이 듬성듬성하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자연스레, 서구인은 무슬림 등 주변인의 종교적 행위에 별다른 존중과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분위기였고, '히잡'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서구의 태도도 그런 예의 한 부분일 터다. 


과거, 영국, 프랑스 등 서구제국주의 국가들은 많은 식민지를 운영하였지만, 이들 식민지는 독립한 이후에도 지배했던 국가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한 탓으로 노동력을 찾는 과거의 지배 국가로 이주하였다. 이처럼, 가난 탈출을 위해 서구에 정착한 무슬림 이민 1세대는 자신을 받아준 국가에 감사하며 별 탈 없이 성실하게 살았다. 다만, 이들은 주류 사회에 동화되기보다, 이슬람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갔다. 마치, 2,000여 년간의 '디아스포라'(방랑)의 유태인처럼... 그러나, 살고 있는 지역과 전혀 다른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 유지가 그리 쉬울까? 더구나, 저들의 종교적 교리와 비화합성을 고려하면…?


모든 무슬림은 테러리스트??

많은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겉모습은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여느 무슬림과 다를 바 없이, 경건하게 신을 모시며 평범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 종교 지상주의자들은, 그들의 종교가 모멸감을 받는 순간, ‘알라(신)의 이름으로!’라며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느닷없이 자행한다. 즉, 특별히 테러리스트가 아닌 평범한 무슬림도 언제든 종교적 신념에 따라 테러리스트로 바꿜 수 있다. 


예컨대, 문화적 차이로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무시'는 경제활동 전반으로 전이되어 많은 무슬림이 영향을 받았다. 특히, 서구 각국에서 살아가던 무슬림 이민 2세가 느끼는 사회적 괴리감은 대단하였다. 서구의 어떤 지역은 '외국인 혐오증'(제노포비아)이 심하여, 이런 지역에서 살아가는 이민들은 자신들이 지켜온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 때문에 원주민들의 혹심한 차별과 소외 속에서 성장하며 마음 아픈 생채기를 가졌다. 실제로, 해당 국가에서 성인으로 성장해도 이들은 여전한 차별과 무관심으로 주류사회에 진입하지 못하고 높은 실업률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니, 이슬람적 정체성을 고집하며 성장한 무슬림 이민 2세들에게, 만약 원리주의 테러집단이 나서서 교묘히 사주라도 하면 자신을 키워준 공동체에도 분노를 표출할 수밖에 없을 거다. 


반면에,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무슬림의 일상에서 벗어난 일부 무슬림이 서구 문화에 잘못 중독되어 ‘물질 추구’는 물론, 서구 각지에서 마약과 성폭행, 테러 등 '동물적인 삶'을 살고 있어서 문제가 되었다. 후에 수상을 역임하였던 '테레사 메이' 전 영국 내무장관은 이슬람계 흉악범죄자에 대한 엄격한 시민권 박탈로 유명하다. 2014년, 한 영국태생의 파키스탄계 이민자가 테러조직에 연루되자 '메이' 전 장관은 그의 가족 4명의 시민권을 모두 박탈해 버렸다. '테러 연루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영국이 무슬림의 시민권을 박탈하자... 그런데, 이게 한동안, '이슬람' 대 '서방국가', 혹은 '무슬림' 대 '비 무슬림'으로 증폭된 '무슬림 혐오주의'가 되어 서구 무슬림 이민자들의 정체성과 위상에 큰 위협으로 작동하였다. 


이런 걸 잘 아는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분자들이, 영악스럽게 이런 점을 노렸다. 우선 서구에 대한 무력감으로 원망과 분노에 찬 이슬람 청년을 ‘직업과 돈, 아내’를 제공한다는 내용으로 인터넷으로 선전하고, ‘지하드’의 명분으로 저항정신을 주입하였다. 또한, 이들과 더불어, 이슬람계 흉악 범죄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키워준 서구사회에 대한 반감을 테러로 보복하도록 강요하고, 전 세계의 불평불만자에게도 함께 동참하도록 선동하였다. 서구로서는 서구에서 살아온 이민 2세들을 부추겨 테러를 가하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헤드라인 뉴스(출처: YTN)

이러한 서구에 대한 반감의 사례로는 수백여 명이 사상된 ‘파리 테러’ 사건으로 나타났다. 2015년 11월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 테러가 발생하였다. 시민 150여 명이 사망하였고 수백 명이 부상했다. 이듬해 3월, 또다시, 벨기에 ‘브뤼셀’에서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하였다. 다수의 시민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했다. 두 테러 집단의 뿌리는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었다. 


서구에서 무슬림 테러가 일상화되어 가는데, 테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서구 사회를 바라보면 참담한 마음이었다. 이런 사건들을 주도한 이슬람 수니파 원리주의 테러분자들은, 각종 테러가 ‘서구에 대한 자신들 분노의 표현’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자신들이 자라났던 서구 공동체로부터 받은 차별이나 무시로 가슴속에 맺힌 게 많았다. 


정점으로 치닫는 반이슬람 정서(출처: 경향신문)

서구 사회는 그제야, 무슬림 이주민이 주류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여전히 그들만의 방식을 고집하며 사회에 대한 커다란 불만 집단이었음을 확인하였다. 무슬림 이민자가 많은 곳은 30% 이상 실업률과 경찰의 통제를 벗어난 곳이 많았다. 뒤늦게, 소외된 이슬람 이주민에 대한 친화정책을 내놓았지만, 일시적인 대책으로는 이들의 원망과 분노를 가라앉히기에는 미흡하다. 그렇지만 만약에, 서구가 '이슬라모포비아'(이슬람 공포증)를 극복한답시고, 이주민 무슬림을 '테러주의자'로 배척하고 차별하면 차별할수록, 그에 반발하는 테러는 끝없이 이어질 뿐이다. 


그런데, 우리라고 안전할까? ‘파리 테러’ 가해자들은 전 세계 62개국을 테러 대상국으로 선정하여 공개적으로 발표하였다. 그 대상국 중에는 우리 대한민국도 포함되었다. 놀랍고 황당한 일이다. 우리가 선진국으로서 ‘천박한’ 물질을 추구하는 나라여서일까? 아니면, 대규모 기독교 선교국가의 이미지 때문 일까? 이유야 어쨌든, 중동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아온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저들의 테러 대상이 되었다. 위협이 다가오는데, 우리는 저들에 대해 너무 모르고, 무관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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