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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May 06. 2023

미‧중 전쟁, 문화차이와 전법의 변화  

글로벌 다양성 이해 (이해와 어울림, 제11화)

전장 환경과 전법의 변화

인해전술?

‘문화 차이’ 이해와 전투의 승패


전장 환경과 전법의 변화

한국전쟁을 돌아보면, 새로운 군 지휘부의 리더가 전략적인 시도를 모색할 때마다 전쟁의 국면은 크게 바뀌었다. 그 사례를 보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덩화의 ‘기동전’이나 리지웨이의 ‘군수전’, 그리고 밴 플리트의 ‘화력전’과 천껑의 ‘갱도 전술’ 등으로 상대의 작전에 대응하는 전략전술 변화로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다. 


그런데, 양측 지휘부의 이러한 시도의 공통점은,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며 상대에게 어려움을 강요한 것이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문화적 차이'의 간극을 파고들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많은 전투사례를 보면, 상대를 알고 적의 의도를 파악하여 대처하거나 의표(意表)를 찌르면 승리하였지만, 그 반대는 참혹한 패전을 겪었다.


가장 먼저, 미군과 중공군의 차이는 경제력의 격차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보급물자의 부족을 거의 느끼지 못했던 유엔군은 중공군이 열악한 보급지원에 시달리며, 작전지속 능력이 제한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까지 무려 5개월 이상이 걸렸다. 자신이 물자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니 상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장의 주도권 쥐었다가도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는 중공군의 모습에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리지웨이’의 호기심과 의문으로 군수지원 능력이 적의 취약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전장의 주도권을 뒤집어 놓았다. 이후부터 휴전 시까지,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막강한 화력과 엄청난 기동력을 바탕으로 양공, 양동작전을 병행하며 정면 돌파 전법을 선호하는 한편, 공습 등 후방지역 차단 작전을 수행하며 중공군을 괴롭혔다. 

  

하지만, 중공군의 전법은 미군과의 전투에서 상대의 허를 찔렀다. 한반도는 전 국토의 70% 이상이 산악으로 미국과 유럽과 달리, 도로가 제한되었지만, 많은 장비와 물자를 가지고 차량 등 ‘탈 것’에 익숙하던 미군은 그나마 제한된 도로지만 도로 따라 평지에 진지를 구축하였고, 웬만한 산악 지역 방어는 국군에게 맡겼다. 그러나, 전장환경이 다르니 드넓은 유럽 평원에서 싸웠던 도로 위주 '거점방어' 전술로는, 산악으로 우회 침투한 적에게 후방이 뚫리고 끊임없는 포위 위협에 시달렸다. 중공군의 공세 때마다 산악침투를 당하면서도 도로위주로만 싸우려 드는 프로답지 못한 미군의 태도에 새로 부임한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은 크게 분노하였다.


이처럼, 침투, 우회, 포위 격멸을 시도하는 중공군의 공세에, 유엔군이 허둥지둥 후퇴하며 엉성하게나마 ‘어깨 대 어깨’로 맞닿은 방어선을 구축한 제3차 공세까지 수많은 침투공간을 그저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일점집중의 원칙에 따른 인해전술(출처: 미국가기록원)

허둥대던 미군과 달리, 중공군은 비록, 기동과 화력이 열세하고 ‘걷기’에 의존하는 군대였지만, 오히려, 한반도 같은 오밀조밀한 산악지형에서의 작전에 유리하였다. 산악을 이용하는 그들은, ‘일점집중(一點集中)’의 원칙으로 원하는 곳에 상대적으로 많은 병력을 집중운용하여 훈련이 부족(?)한 국군과 유엔군 진지를 유린하였다. 이른바, 인해전술이었다. 


인해전술?

중공군하면, 이른바 ‘인해전술’이라고 불리는 집요하고 맹렬한 병력집중 방식―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달려드는 적을 떠올린다. 실제, 이런 모습은 미군에게는 무한 공포였다. 중공군은 미리 준비한 교묘한 전략, 전술을 펼쳤으나 미군으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기습이었다.


그런데, 중공군의 전법으로 널리 알려진, ‘인해전술’을 단지 수적으로만 무모하게 몰아붙이는 야만적인 중국인의 인명 경시’ 전술 정도로 폄훼해서는 안 된다 ‘인해전술’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과는 완전히 차원 다른 전술이었다. 백선엽 장군도 그런 점을 인정했다. 백선엽장군은, 중공군과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을 치고도, “병력이 부족해서… 적의 ‘인해전술’에 당했다는 것은 자기변명이었다"라고 했다. 엄밀히 따져보면, 초기 중공군의 공세 시 중공군과 연합군은 숫자적으로 대등한 수준이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 녹표를 향해 새까맣게 몰려드는 중공군

중공군은 ‘인해전술’ 감행 이전에, 타격목표를 선정하고, 철저한 사전정찰로 적 방어망의 전면이 넓거나 종심이 약한 곳, 가장 약한 적이 배치된 곳, 전투지경선이 지나는 곳, 화력과 장애물이 미약한 곳, 그리고 주요 장비 위치, 탄막, 약점 등을 면밀히 파악하였다. 그리고 야음을 이용, 선정된 목표상 ‘좁은 정면(주로 전투지경선상)’에 쐐기를 박고 망치로 때리듯, 엄청난 화력으로 공격준비사격을 퍼붓고 적 방어선을 초토화시킨 다음, 고도로 훈련된 병사들을, ‘일점집중(一點集中)’의 원칙으로 지형지물의 사이, 병력배치 사이에 ‘제파식’으로 ‘총 돌격’하여 저항선을 '돌파'하는 식의 정교한 병력운용 기술이었다.


이처럼, 인해전술에서 '돌파'는 모든 작전의 시발점이었다. 신속한 전투력의 집중으로 작은 틈이라도 벌어지면 파고들어 종심으로 기동하고 '포위'를 시도하며, 후속 부대의 전진을 보장해야했다. 다만, 제공권과 화력이 우세한 미군에게 백주대낮에 이런 식의 엄청난 병력집중을 감행하면 피해가 속출하니, 은폐를 위해 야간에 기동 하였고… 일단 야습으로 돌파구가 형성되면, 어둠 속에서 달려드는 ‘야차’처럼 죽음을 불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며 계속 달려들었다…. 이런 집중공격을 당하는 자들은 엄청난 공황상태에 빠지게 마련이었다.          

    

이처럼, ‘인해전술’은 죽이고 죽더라도 끝없이 달려드는 과감한 용기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아무리 사명감이 있다 해도, 그런 의지를 장기간 지속하기 어렵다. 그래서 세뇌와 집단 최면으로 전투 전 사상교육과, 전투 후 강평과 가혹한 ‘자아비판’이 따랐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대단했지만, 중공군의 기동에서 ‘인해전술(?)’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무기는 어이없게도 ‘뿔피리’와 ‘꽹과리’였다. ‘뿔피리’와 ‘꽹과리’는 중공군의 상호 연락수단인데, 이들 악기는 이질적(?)인 소리로 국군과 미군에게 기묘한 심리전 효과를 주었다. 마치, ‘초한전’의 사면초가(四面楚歌)처럼… 적의 우회포위 전술에 수차례나 대책 없이 당하였던 국군이나 미군은 그저, 야간에 뿔피리 소리만 들리면 적의 접근에 대처하기보다 그 이상한 소리에 극도의 공포에 시달린 나머지, 전후좌우, 너나없이 슬금슬금 꽁지를 내뺐다. 중공군의 뿔피리와 꽹과리조차 그 낯선 소리로 미군의 전투의지를 꺾어버리는 '심리전' 도구가 되었다. 이는 미군 지휘부가 예상치 못한 뜻밖의 문화충격이었다. 그 바람에 중공군에게 대책 없이, 그리고 형편없이 당했다.


또한, 중공군이 구사한 다양한 작전 중에서도 특히, 야간작전은 미군과 국군을 엄청나게 괴롭혔다. 누군들밤에 편안하 자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미 공군기들이 시도 때도 없이 화력과 기동력이 약한 중공군에게 공폭을 가하니, 백주대낮에는 정면공격보다 숨어있는 게 차라리, 더 나은 생존의 수단이었다. 결과적으로,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만 활동하여, 오히려 상대가 싫어하는 전장 환경을 만든 것이다.


‘문화 차이’ 이해와 전투의 승패

한반도에 기습 개입한 ‘덩화’의 중공군은 이미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부군을 무찌른 강력한 군대였다. 잘 훈련된 엄청난 병력이 야간에, 산악지형으로 침투, 우회하여 후방을 노리는 대규모 ‘기동전’을 구사하자, 중공군을 난생처음 접한 미군은 중공군에 대한 무지와 다른 잣대로 생각과 행동이 얼어붙었다. 누가 감히 신생 중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최대의 승전국인 미국을 공격하리라고 생각했겠는가? 때문에, 미군은 야간전투, 위장, 매복, 침투, 우회, 유인 격멸 등 각종 기공법을 구사하는 상대에 대한 연구도 없었고, 이질적인 문화 차이로 인하여 상대의 전술적 의도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전혀 모르는 적으로부터 '완벽한 기습’을 당한 셈이었다.  


한국전에 참전한 중공군(출처: 연합뉴스)

중공군은 허둥대는 미군에게 같은 전법을 반복해서 구사하며 전과를 확대했다. 제1차 공세의, ‘운산 전투’도 매복과 기습, 우회침투, 포위격멸이었고, 제2차 공세 때, 서부와 동부전선에서 미군 1개 사단씩이 곤욕을 치른 '군우리 전투'와 '장진호 전투'도 모두 매복과 기습, 우회침투, 포위격멸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2차 공세에 앞서 중공군은 교묘한 심리전을 전개하였다. 유엔군의 전략상 오판과 오만 심리를 유도하기 위해, 1차 공세에서 포획한 포로들을 풀어 주며 중공군이 불과 6~7만여 명에 불과하다거나,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여 본국으로 철수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유엔군의 북진을 계속 유도하는 교활함과, 유엔군 공세에 ‘밀리는 척’ 중공군을 가볍게 보도록 유인한 뒤, 대담한 우회포위 실시로 예상보다 큰 전과를 올렸다. 놀라운 것은, 실제 미군이 중공군의 기만전술에 넘어가 상황판단을 오판하여, 중공군에게 ‘수세에서 공세’로 국면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거다.


'군우리' 전투에서 널브러진 미군 장비(출처: 미국가기록원)

이런 혼란의 와중에, 제2차 공세시 서부전선 ‘군우리’ 지역을 방어하던 미 2 사단이 ‘군우리’ 전투에서 상대의 전법에 휘말린데 더하여 상대에게 '지휘관의 의도'마저 읽힌 결과로, 미군 역사상 가장 처절하게 눈뜨고 볼 수 없는 패배를 당하였다. 

당시, 청천강 선에서 철수를 강요받던, 미 2 사단장 ‘카이저’ 소장에게는 2개의 철수로가 있었으나, 철수에 양호한 도로는 그 일부가 인접부대 관할이었다. 군사작전에서 ‘전투지경선’의 의미에 충실한 ‘카이저’는 양호한 도로보다 자신이 관할하는 ‘애로’ 지역으로 철수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미 2사단을 파멸로 이끈 패착이었다. 미군은 작전 간 전투지경선의 의미에 충실한다는 속성을 아는 중공군이 미리 국군 복장으로 위장하여 애로지역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계곡 속으로 들어온 미군을 가두고, 고지대에서 내려다보며 난타하였다. 적정파악은 미숙하였고, 적은 ‘나의 의도를 간파하고’ 대응하였고... 결과는 참담한 패전이었다.


'장진호' 전투의 미군 병사들(출처: 미국가기록원)

뿐만 아니라, 동부전선의 ‘장진호’ 전투에서도, 후에 비록 전세를 뒤집기는 했지만, 초기에는 중공군의 은폐와 위장 전술에 완전히 당한 꼴이었다. 맥아더 사령부나 미 10군단은 항공정찰에만 의존한 결과, 중공군의 포위망 시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영하 30도의 날씨에 수만 명의 중공군이 눈 덮인 산악지형에서 포위망을 형성하고 매복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 미군 장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미군의 상식과 가치 기준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중공군은 이런 상식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전장에서 상대에게 작전 의도를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무수한 비상식을 여과 없이 감행하였다. 그렇지만, 이런 비상식의 결과는 참혹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6만여 명 이상이 동상으로 사상당했다.


이에 비해, 중국인의 특성을 알고 잘 대비한 사례도 있다. 예컨대, 미 해병 1 사단장은 어릴 적 부모와 중국에서 생활하여 중국 문화와 중국인에 대한 어느 정도 감각이 있었다. 그가 받은 인상은 중국인들은 음흉한 면이 있어 조용하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미스’ 해병 1 사단장은 적이 공격하기 바로 직전의 소강상태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장진호 남단의 야지에 공중보급과 환자수송을 위한 임시활주로를 건설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게 미군의 체면을 살렸다. 이곳에서 수천 명의 부상병을 일본으로 이송하였다.


이처럼, 중공군의 낯선 전법에 전혀 대비하지 못한 미군에게는 중공군의 기습이 새로운 충격이었으며, 그 결과 미육군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참패를 당하면서, 청천강에서 38도선 상으로 최단시간 내에 대후퇴를 초래했다. 전사학자들은 이 전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세 전환의 모멘텀이 되었던 ‘미드웨이’ 해전이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필적할만한 대사건으로 평가하였다. 그 주인공은 중공군 부사령관 '덩화'였다.


이어지는 다른 공세에서도 예상을 뛰어넘는 중공군의 침투 전술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1951년, 5월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 1개 중대는 야간 13시간 동안 무려 25km의 길도 없는 산악을 달리다시피 하여 ‘오마치 고개’를 확보하고 국군 3군단의 퇴로를 차단했다. 퇴로차단 공포에 질린 3 군단장이 항공기로 탈출하자, 군단 6만여 병력이 대부분 장비를 유기하고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 중공군 1개 중대는 침투하는 동안, 휴식도 없이 오로지 ‘오마치’라는 목표만 보고 내달렸다. 이들의 행군속도는 국군의 2배 이상 빠른 것으로 각종 포로 증언에서 나온다. 2배 이상의 행군속도는 상대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엄청난 기습효과를 발휘한다. 전 부대원이 개인을 희생하고 내어달린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이들은 전투영웅(?)이 되었다.


그런데, 창과 방패랄까? 중공군이 ‘기동전’이라는 새로운 전술로 단숨에 38도선 이남까지 진출하는 등 전략적 성과를 확대하자, 염전사상과 패전론에 노심초사하던 미군은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에 의한 새로운 개념의 '위력 수색'을 전개하여 적을 찾아 나섰고, 이에 맞선, 중공군이 엄청난 병력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남하를 시도하자 '리지웨이'의 후임인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무제한적인 공중 폭격과 포병 사격으로 엄청난 ‘화력전’을 전개하여, 승승장구하며 남하하던 중공군을 일거에 소멸시켰다. 중공군이 미처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으며, 이로 인해 전선은 '휴전 회담'이라는 의제로 다시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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