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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May 05. 2023

낯선 싸움터, 낯선 상대 - 미‧중 전쟁

글로벌 다양성 이해 (이해와 어울림, 제10화) 

낯선 전장(戰場), 낯선 상대 

적변아변(敵變我變): 적의 변함에 맞게 나도 변한다

과거의 경험에 집착하는 미래 전쟁 준비



낯선 싸움터, 낯선 상대 

진주만이 기습을 당할 때까지, 미국은 일본이라는 상대에 대해 별로 잘 알지 못하였다. 단지, ‘체구가 왜소한 일본인은 먹는 음식이나, 먹는 방식조차 다른,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인종적으로 다소 열등한 집단’으로서 일종의 외계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행하는 ‘반자이’ 공격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였고, 그들에게 '포로'가 된다는 것이 상대의 군사문화에서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자신들의 가치기준과는 전혀 다른 의미라는 것조차 몰랐다. 결과는 경악의 연속이었다.


일본의 도박, 태평양 전쟁

미군은 태평양 전쟁을 통하여 일본군과 남태평양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몇 년간 싸우며 동양의 고유한 문화와 유교적 사고방식을 많이 경험하였고, 경이로운 부분도 알게 되어, 동양인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에서 맞붙은 미‧중 전쟁은 어땠을까? 문화적 뿌리가 깊은 중국과 미국의 전쟁은 전혀 다른 차원의 전쟁이었다. 장구한 문화의 광대한 대륙 중국은 섬나라 일본과 전혀 달랐다. 일본과 중국의 차이가 프랑스와 독일의 차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다른 문화적 가치 기준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전쟁을 치르기 전까지 잘 알지 못하였다. 이처럼,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정확한 인식 결여는 6‧25 전쟁을 수행하던 ‘트루먼’ 정부나, 전투를 수행했던 지휘관과 병사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전장자료와 전장 교훈 수집에 공을 들인 국가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발발한 태평양 전쟁 동안 연합군의 일원으로 끌어들인 중국의, 국민당 군대는 물론, 중국 공산군 근거지 ‘옌안’에도 ‘옵서버(관찰조)’ 역할로 많은 군인과 종군 기자를 주재시킨 적이 있다. 이들은, 중공의 중앙군과 팔로군, 그리고 국민당 신 4군 지휘관들과 같은 밥을 먹고, 노래하며 훈련과 군사정보를 공유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평가한 보고서에는 미국이 중국 국민당에게 지원한 물자의 일부만이라도 중국 공산당에게 제공하면 이들은 언제든 중국 전역을 장악할 능력이 있다”라고 할 정도로 공산군의 의지나 능력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전장 지휘관들이 구사하는 전법에 대한 정보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내용이었다. 미‧중 전쟁을 되돌아보면, 미국은 중국의 낯선 전법에 허둥대었고, 중국은 미국의 엄청난 물자와 화력에 압도되었다. 미‧중 전쟁은 서로에게 그저 찌르고, 베어 버리고, 화력으로 제압하는 그런 단순한 살상의 의미와는 전혀 양상이 다른 전쟁이었다.


1950년 1차 공세시 운산근교에서 중공군에게 잡힌 미군(출처: 월간 조선)

미국과 중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 강국답게, 수많은 전쟁을 연구하고, 발전시킨 전법들을 전수받았다. 서구의 ‘전쟁론’과 중국의 ‘손자병법’이 대표적인데, 공통점은 ‘전쟁과 정치’의 조화에 있지만, 방법상의 주안은 다르다. ‘전쟁론’이 적을 궤멸시키고, 적 영토를 탈취하는 ‘양의학적 외과수술’이라면, ‘손자병법’은 ‘싸우면 이기되’, ‘싸우지 않고도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니, 기와 혈을 북돋우는 ‘한의학’과도 같은 맥락이라 할까…. 


예컨대, 미국인이 익숙한 양의 병원 치료는, 아픈 부위를 째거나 도려내거나 화학 약품으로 원인을 제거하는 직접적인 치료지만, 중국의 한방은 기와, 혈, 맥 등 인체의 조화와 균형을 다스리는 침이나 한약 등 간접적인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하였다. 어떤 의사가 환자를 잘 치료했다는 것은 결과로 알 수 있지만, 그가 ‘어떻게’ 치료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미‧중 국교 수립 이후, 양국 인사들이 왕래하자 에피소드가 많았다. 그중 하나로, 미국인은 심한 두통이 있는 환자에게 머리에 큰 침을 놓겠다는 한의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차이처럼, 동양과 서양도 싸우는 방법이 달랐다. 각자의 군사교리는 전술적 사고의 기준일 뿐, 실제로 운용되는 전법은 정공법과 기공법이 배합된 리더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는데, 이런 전술전법의 아이디어에는 서로의 능력과 전쟁 환경 차이에 의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발전되는 것이다. 미국은 애시당초 영국이나 프랑스, 일본 등과의 전쟁에서 형편없이 패한 중국(청) 군의 정규전 따위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이들의 관심은 광활한 유럽 대평원 지역에서 대규모 병력과 전차 등 기동력, 그리고 화력의 효과적인 운용과 배합에 있었다. 미군은 우수한 군대였지만 이들이 처한 한국 전장환경은 좁고 산악 지형이었고, 맞붙은 상대인 중공군은 비록 병력은 많다하나 전투기조차 거의 없이 소총과 박격포 정도의 화력으로 걸어다니는 군대였다. 


적변아변(敵變我變): '적의 변함에 맞게 나도 변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던 중국의 '마오쩌둥'은 미국을 더욱 경계하였고, 북한군과 미군의 첫 전투였던 ‘오산 전투’를 계기로 미군의 한국전 개입을 확신하고 대비에 들어갔다. ‘오산 전투’ 이후 2주가 지난, 7월 19일, '마오쩌둥'은 광둥성 ‘광저우(廣州)’에서 대만 공략을 준비하던 제13병단(6개 군 총 25만 명) 사령관 ‘덩화’를 ‘인민지원군’ 부사령관으로 임명하며, 만주로 이동하여 대기할 것을 지시하였다.


‘마오’는 중공인민해방군 내 '전술의 대가'라는 ‘덩화’에게, 트루먼은 조선을 포기할 것 같지 않다동북 변방을 지키며 필요시미국과 싸울 준비를 하라미국을 종이호랑이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미국은 감당하기 어려운 강국이다며 미국과 전쟁 준비를 지시하였다. 중공군의 10월 25일 한국전 개입 3개월 전이었다.


중공군 제1 부사령관 겸 제13병단(군사령부급) 사령관 ‘덩화(鄧華)’는, ‘마오쩌둥’의 지시로 '동북변방군'으로서 전쟁 초기 만주 단둥(丹東)으로 이동, 한반도 전황파악과 맥아더와 주요 군 지휘관들의 전투 수행 방식 및 미군 전략연구에 몰두하여, 1950년 10월 1차부터 5차까지 대공세를 주도하는 '전술 개념'을 제안하였다. 


이처럼,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최강 미군과 맞붙은 중공군의 1~5차 공세의 ‘기동전’은, 작전기지를 확보하고, 유엔군을 소멸시키려는 전술로서, '덩화'의 전술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덩화'는, 미군의 전투력은 세계 최강이다조직도 치밀하고화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미군은 정면 방어에 능하니정면공격은 승산이 없다밝은 대낮에는 잠복하고어두울 때 공격하되과감한 침투 전술을 써야 한다. 약점은 측면과 후면이다전방과 후방의 연락을 단절시키고분할해서 포위한 뒤 중심을 섬멸하자”는 중공군의 전술개념을 제시했다.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 이후, 1951년 5월 제5차 공세까지 중공군에 무참하게 당한 국군의 군단, 사단은 2군단, 3군단, 3, 6, 7, 8, 9사단 말고도 숱한 부대가 있었다. 최근까지도 중공군(홍군)은 중공군 1~5차 공세 당시의 여러 가지 전승 기록을 국영 CCTV 방송 연례행사용 자료 화면에 담아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로 대대적으로 홍보한다. 국군으로서는 이들과의 전투가 6‧25 전쟁 최대의 패전이었고 두고두고 기억할 굴욕적인 참패였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군대로 성장한 국군이지만, 당시에는 중공군만 만나면 그토록 등을 보이고 꽁지를 내뺐는지?” 와신상담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무제한 화력지원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사용한 장약통(포사격 후에 남은 폐자재)

그런데, 신출기묘하던 중공군도 약발이 떨어진 것일까? 중공군 제5차 2단계 공세에서 작전초기 대승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던 중공군은 어느 순간 골짜기를 따라 북쪽만 바라보며 철수하는 신세가 되었다. 중공군의 공세 실패는, 아사 직전에 몰릴 정도로 고질적인 군수지원 제한 이외에, 유엔군이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무제한 화력전으로 반격을 실시하여 결정적 타격을 가하자,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는 획일적이고 정형화된 전법이 문제였다. 전선이 확대되자 깊은 산속으로 흩어진 중공군 말단 부대들은 통신의 제한으로 그들이 그토록 강조했던 ‘적변아변(敵變我變)’ 융통성 강조 원칙은 지켜지지 못했다.


‘적변아변’과 같은 융통성의 의미로, 국군은 선조치후보고를 항상 강조하였다. 그런데, 훈련이 덜된 군대일수록 선조치하며 주도적으로 상황을 이끌어 가기보다, 그저 상급자의 ‘지시를 받고 시키는 대로만’ 하려고 하는 보신주의가 판친다. 욕만 안 들어 먹으면 되지 뭐더 잘할 필요가 있나?”라는 건데…. 의욕 없는 군대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한때, 국군을 ‘폄훼하는 말’로, 상황이 다급해도 쏠까요말까요?”라는 보고형 질문이 있었다. 그러면, 보고받은 상급자가 어서 쏴!” 하면 적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서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린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은 절대로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중공군이 야간작전에 침투 및 우회 전술을 사용한 ‘덩화’에 의한 ‘기동전’을 구사할 때, 전혀 대비하지 못한 미군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노심초사하던 미군은 막강한 ‘화력전’으로 중공군을 소멸시켰다. 이에 따라, 전선이 교착되자 ‘갱도전’이 뒤를 이었다. 항상적을 바라보고 적변아변 하는 것이 지휘자의 책무이다. 그런데, 적의 변화를 상대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로 바라보면, 어느 정도 적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과거의 경험에 집착하는 미래 전쟁 준비 

그런데, 전쟁이 멈춰어도 쌍방의 전술적 고민은 그칠 줄 몰랐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례에 집착하여 이른바, '삽질'에 물질과 노력을 낭비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6.25 전쟁 이전에, 한국에 처음 온 미군 군사고문단은 한반도가 그저 산악이 많다는 이유로, 한국은 전차가 기동 하기에 부적합한 지형이라고 평가하였는데 이는 정말 아쉬운 부분이다. 이를 근거로 미군이 한국군에 단 한 대의 전차도 주지 않은 탓에, ‘스탈린’으로부터 250여 대의 전차를 제공받은 김일성 군대가 전쟁 초기에 한국군 전선을 종횡무진 헤집으며 궤멸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전차에 대한 교훈은 뼛속깊이 아로새겨졌다.

하천에 설치된 대전차 '용치장애물'

덕분에, 휴전 이후 1980년대까지, 한국군은 적 전차의 접근을 분쇄하기 위한 대책에 골몰했다. 대전차 방벽을 만들고, 용치 장애물을 만드는 등 전차가 접근할만한 공간이 있으면 산이나 들녘, 하천까지 화력과 장벽으로 꽁꽁 틀어막았다. 이미, 중동전쟁을 계기로 전차의 유용성이 거의 사라진 상황에서도 유독 전차 방어에 집중했던 것은, 한국군 고위 간부들의 전차에 대한 인식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격이었을까? 이런 점은 북한도 다를 바 없었다. 미공군 등 연합 공군의 엄청난 공중공격과 폭격에 혼쭐이 난 북한군은 '전 국토의 요새화'를 부르짖으며, 온 지역에서 지하요새와 땅굴 파기에 몰두하였으며, 전, 후방 구분 없이 엄청난 숫자의 고사총을 돌리느라 '노농적위대'라는 조직으로 여념집 아녀자까지 군복을 입히고 훈련시켰다.


프랑스가 구축한 마지노 라인상의 한 요새진지 (Fort De sainghain) - 출처: 나무위키

서구는 어땠을까?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비참한 '참호전'을 수행하느라 엄청난 전력을 희생시켰던 프랑스는 전쟁 이후 국경선을 따라 난공불락의 엄청난 요새 진지인 '마지노'라인을 구축했다. 이들과 똑같이, 처절한 '참호전'을 수행하던 독일군은, '솜므' 전투에서 영국군 전차의 출현에 기겁하였다, 독일군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전차로 인해 독일군은 향후 전차를 이용한 '전격전'을 구상하여 적의 중추 신경을 기동과 화력으로 마비시키는 '마비전략'을 구사하였다. 덕분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하고 그 안에 들어앉아 편안하게 전투를 하려던 수동적 사고의 프랑스군은 공세적인 독일군의 대 우회 전략에 진지를 사용도 못해보고 항복하였다.    


독일의 침공사레에서 보듯이, 누구든 이미 알고 있는 상대가 강력하게 구축한 진지에 무작정 돌진하는 어리석은 군대는 없을 것이다. 서구의 교훈이 6.25 전쟁 때 중공군에게 혼이 난 미군에게는 충분한 학습이 되었을 것이다. 1983년 신모라는 북한군 대위 1명이 귀순하였다. ‘김일성 대학’을 나온 군 엘리트로 개인의 사생활 문제로 월남했다. 그는 귀순 후, 땅굴정보를 제공하고 북한군 대대 작전 등 전술적 지식은 물론, 박격포 등 공용화기와 각종 통신장비 등 각종 장비까지도 능숙하게 다루어 한국군 간부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군사 지식이 자신의 계급 이상의 전문성이어서, 국군 장교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국군에게 충분한 학습이 되었다.


지난 세기, 미국은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등 지구상 수많은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그 어떤 나라보다도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적들과 싸우며 많은 경험을 축적하였다. 그리고, 쓰라린 패배의 기억도 많이 있다. 베트남전 패퇴로 미군은 모병제로 바뀐 뒤에, 더욱 고도화·전문화되었고, 상대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도록 늘 훈련하고 있다. 그토록 무시하던 중국의 전법에도 열을 올린다. 요즘, 미군의 분위기는 공부하지 않는 군인은 국가와 국민에게 죄를 짓는 일로 간주할 정도다.  뻔한 논리뻔한 전법으로 상대의 의표를 찌를 수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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