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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May 03. 2023

나의 문화, 그리고 나와 '다른 문화'?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

내 방식대로” 

종교문화에 대한 미국의 둔치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

서구가 동양이나 이슬람 등의 타 문화권과 관점이 달라서일까? 서로가 같은 일을 하거나, 상거래를 할 때, 심지어 서로가 싸울 때 등 일상 속의 사소한 일조차 상대를 가늠하고 평가하는 잣대가 달랐다. 당연히, 상대에 대한 무지로 인한 충격과 대가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미국이나 소련이 핵무기가 없어 베트남과 아프간에서 패했을까?” 현지 문화와 종교에 대한 무지가 패배를 불렀다. 상대의 문화나 정서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현지 이해가 부족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는 손자병법 제일 첫 구절이다. 전쟁은 상대가 있으니, ‘나 자신을 아는 것’과 ‘상대를 아는 것’이 ‘전승의 요체’라는 것인데….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면 무력으로만 승리할 수 없다. 상대에게 접근하려면 ‘문화 차이’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전제되어야 한다. 


‘문화 차이’의 예를 들어보자. 필자가 미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을 때, 같은 반에 아프리카 ‘수단’ 공군 조종사가 있었다. 소련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MIG 전투기를 자국으로 받아갔던 인물인데, 쿠데타로 친미정권이 들어서자, 이제 미국 정부가 제공하는 전투기를 인수하러 왔었다. 미소 냉전 시절, 초강대국 두 나라를 경험한 그에게 양국의 차이를 물었더니, 그의 관점은 뜻밖에도 ‘정치 군사적’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 관점이었다.


그는, 소련은 비록 많은 전투기를 주지 않았지만 한 대를 주더라도 주요 본체와 더불어 수리부속품예비부품 및 필요 공구까지 심지어 탄약까지 포함하여 한꺼번에 무상으로 주었다”라고 한다. 하지만, 미국은 처음에는 다수의 전투기를 무상으로 제공하였지만나중에는 탄약은 물론각종 수리부속품이나 공구류는 별도로 구매하게 하였다.” 마치 ‘잉크젯’ 프린트처럼 기기는 싸지만, 잉크값을 비싸게 파는 방식인데….


이 때문일까? 그는 소련인(불신자)들은 마음이 따뜻한데미국인(이교도)들은 마음이 친절’하다"라고 평하였다. 이슬람의 무슬림으로 살아온 철저한 유신론자로, 세계 적화를 지향하던 무신론자인 소련인(불신자)에 대해 화를 내어야지만, 오히려 자본주의적, 물질중심적인 미국인(이교도)의 태도에 좀 더 화가 났던 것 같다. 이런 걸 보면, 미국은 원조를 제공하면서도 준 만큼 감사받지 못했던 것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아마도, ‘물질’보다 ‘정신’적 경건함을 추구하는 무슬림에게조차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의 답변에… 필자의 시각도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무지를 많이 느꼈다.


그런 관점에서, 미국이 다문화 다인종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에 대한 문화적 다양성(Cultural Divergence)’의 이해는 다소 부족하지 않나 싶다. 과거, 미국이 참전하였던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지역의 각종 분쟁을 들여다보면, 미국이 전쟁에 임하는 잣대나 기준이 불분명하고 흔들려 보여서다. 미국도 당연히 이런 점에 대한 보완책을 강구했을 것이다. 전 세계 미국 대사관 중에서 (주)이집트 미국대사관이 가장 크다고 한다. 직원이 3,500여명 이상이라는데... 대사조차 직원들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요원이 근무한다. 뿐만 아니라, (주)수단 미국 대사관의 직원도 800여 명이 넘어 수단 내전으로 미국이 이들의 안전한 탈출을 위해 고심했다는 말도 들릴 정도로 미국은 그야말로 아랍 각국에서 정보수집, 문화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내 방식대로” 

21세기 이후 미국의 전쟁은 모두 해외 원정이었다. 1, 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에서 싸우는 동안, 미국은 힘든 전투를 겪긴 했으나 문화, 종교적으론 별 어려움 없이 승전국이 되었다. 하지만, 전쟁 범위가 태평양전, 한국전, 베트남전, 이라크전, 아프간전이라는 다양한 지역으로 확산되고, 전혀 생소한 전장 환경에서 싸우게 되자, 문화와 종교에 따른 가치관과 시각이 다른 동양권이나 무슬림 등 현지인에 대한 무지는 크나큰 고통이었다.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더구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부터 베트남 전쟁까지 미군의 대부분은 징집병이었다. 타국에 대한 별다른 이해나 군사적 경험도 없이 전투에 투입되다 보니, 상대의 문화, 종교적 배경에 대한 몰이해, 무례, 무지 등 다양성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민군 관계(Civil Affairs)에서 현지인과 잦은 문화 충돌을 빚었다. 


그런데,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동양과 서양이 맞붙은 미‧중 전쟁을 살펴보면, 무수한 전투에서도 서로가 상대의 접근 방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상대에게 헷갈려하는 부분이 많이 보인다. 


대민지원으로 혼자 남은 아낙의 농삿 일을 돕는 중공군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은 전투 외에, 대민관계에서도 단련된 규율과 기강이 엄격하였다. 하지만, 자유 수호를 내걸고 징집된 미군 병사들이, ‘트루먼’ 대통령이 주장하듯이, 훌륭한 전술전기와, ‘자유, 반공’ 등 사상적 무장까지 갖추었는지는 의문이다. 전장에 나선 많은 미군들은 ‘문화 차이’에 대한 이해 부족, 물질이나 여자 희롱 등 본능적 문제, 전우 간 흑백 인종 차별문제 등 개성 강한 개인주의로 인하여 부대 전투력 발휘에 장애가 된 사례가 많았다. 


전술,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일선 지휘관이 오히려, 정치권을 설득하기 위해서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한국전이 발발하자,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는 1950년 6월 말 한국전선 시찰 후, 미국의 이익이 걸려있는 일본열도 방위를 위한 효과적인 GOP(General Out Post: 적의 접근을 조기에 경고, 지연, 와해시킬 목적의 전초기지)로서 '한반도라는 전장종심'(戰場縱深)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지만, '투루먼'은 한국전 참전을 주저하고 있었다. 이에, 맥아더는 우선적으로 주일 미군을 전용하여 한국전에 투입할 것을 트루만에게 건의하여 승인을 얻었다. 이는 미국의 한국전 개입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이어서, 유엔의 깃발아래 참전한 미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후 승리와 자만에 빠졌기에, 오히려 중공군 공세 때마다 실기와 오판을 거듭하여 엄청난 전략적 후퇴까지 초래하였다. 


6.25 전쟁에 임하는 미국의 정책적인 허점도 많아서, 전쟁의 틀을 바꾸는 실수도 많이 하였다. 대표적으로, ‘트루먼’ 정부가 한국 전쟁이 한창인 1951년 5월에 결정한 ‘한국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아시아 정책(NSC 48/5)’와 동년 12월에 내린 ‘정전협정에 임하는 지침(NSC 118/2)’에 따르면, 한국은 일본,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와 달리 미국의 방위동맹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이는, 애치슨’ 라인으로 한국을 버렸다가, 다시 한국을 지키겠다며 출병해 놓고서는 또다시 한국을 버리겠다는 지침이었다. 그것도 한창 전쟁 중인 상황에서… 


맥아더와 이승만 대통령(출처:월간조선)

이런 부분은 다분히 맥아더의 퇴진과 관련지을 수 있다. 개전 초기, 미국의 직접개입을 꺼려했던 트루만은 묘수를 찾아 유엔의 이름아래 개입했고, 이후 중공군의 수차례에 걸친 대규모 공세에 버티는 동안, 미군은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패퇴를 거듭하자, '트루만'은 결국 맥아더를 해임하였다. 이 정책이 나온 1951년 5월은 바로 맥아더의 해임 직후였다. 하지만, 미국이 아무리 강대국이고, 한국이 별 볼  없는(?) 약소국이라 하더라도, 한국을 대하는 미국 대통령의 너무나 이율배반적인 태도는 지금 생각해도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이처럼,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역사 인식은 매우 단견적이었다. 


미국이 그렇게 오만했던 것은 한반도가 일본의 패망으로 우연찮게(?) 얻어진 전리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한국 전문가라고 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38선 획정’ 단계에서부터 한국전 참전, 전쟁 수행과 휴전, 그리고 미군 철수와 최근의 북한 핵 문제 등에서 보듯, 어느 하나 선제적으로 잘 대처하거나 매끄럽지 못했다. 어떻게 된 셈인지 그냥, 부딪히면 해결해 나가는 식으로 고뇌에 찬 전략적 사고나 배려가 결여된 모습이었다.


6.25 전쟁이 휴전된 지 10여 년 뒤의 베트남에서도 미국의 실수는 재현되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1960~1975)’에서 엄청난 전비와 압도적인 군사력을 퍼부으며, 남베트남의 민주주의 수호를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절대다수의 베트남인은, 미국이 국가 경제력의 70~80%를 장악한 1%도 채 안 되는 화교 보호를 위해 남베트남 꼭두각시 정권을 지원한다”라고 생각했다. 상황인식과 관점이 달랐다. 그리고, 현지민의 염원을 읽지 못하자 물없는 고기처럼 미군은 결국, 패배하였다. 미군 내적으로도, 병역 의무로 전장으로 내몰린 많은 미군 병사들이, 염전사상(厭戰思想)과 마약, 프리섹스 등으로 국민 정서상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종교문화에 대한 미국의 둔치

2001년 9‧11 사태가 발생하자, 세계 최대 석유 소비국 미국은 석유 의존도가 높은 중동에 즉각 개입하였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우고,  ‘이라크’와 ‘아프간’ 등지에서 이슬람권과의 전쟁을 동맹과 함께, 다국적군을 구성하여 미군 사상 가장 장기간인 무려 20여 년 동안이나 싸웠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이라크전쟁 참전 미군을 격려하는 '부시' 미 대통령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은 초기에 대단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고, 주민들의 지지 속에 ‘후세인’을 쓰러뜨렸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이라는 독재자를 쫓아내면 이라크인들이 민주주의 회복에 동참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불과 몇 개월 만에, 이라크 주민들의 종교, 문화적 정서를 전혀 고려치 않은 각종 정책에 이어, 전쟁 범죄행위마저 속속 밝혀지면서, 오히려, 이라크인들의 결사항전을 초래하며 살벌한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곳곳에서 반미시위와 도발이 이어졌고, 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더구나, ‘여성 인권 신장’ 등 미국이 제시한 ‘대 중동 구상’은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여성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더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무슬림 사회인데, '여권 인권 신장'이라니... 오히려, 미군 병사들이 여성들에게 성적 공격을 가하거나, ‘모스크(이슬람 사원)’에 군홧발로 진입하여 종교를 모독하였던 행위나, 일부 파렴치한 행위들은 현지인의 정서를 자극하는 등 미군의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력은 거의 ‘둔치’ 수준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책적으로도 미국의 실수는 계속 반복되었다. 2019년 10월, ‘트럼프’ 대통령은 시리아에서 미군 철수를 전제로 튀르키예와 협정을 맺었다. 당시, 세계인의 공분을 자아냈던 시리아 내 IS(이슬람 국가) 잔적을 소탕하던 미군이 쿠르드족과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미군의 이라크 침공 이래, 미국을 도와주며 막대한 인명을 희생한 쿠르드족의 염원은 독립국가 건설이었다. 튀르키예가 영내 쿠르드족 이탈을 우려하여 시리아 북부 공격을 자임하자, 미국이 그 말을 듣고 빠지면서 쿠르드족을 저버린 꼴이다. 지역 내 시아파 견제 전략이나 쿠르드족 미래에 대한 인도적 고려가 없었다며 미국의 조야는 거세게 비판했지만, 이미 끝난 일이다. 


이후, 중동에서 러시아의 입김은 더욱 커졌고, 미국은 중동에서 우군을 찾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최근 사우디가 중국과의 친교를 강화했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대미 불신의 여파일 것이다.


미군의 아프간 철수 

사실, ‘아프간’에서도 ‘베트남’과 닮은꼴이었다. 둘 다 친미정권이나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였다. 미군이 ‘베트남’에서 패배할 때처럼, 무기 등 원조물자는 적에게 팔려나갔고, 정보 공유는 유출을 의미했다. 또한, 적과 아군, 일반 민중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싸워야 했으니 불의의 기습은 일상이었다. 막강한 미 공군력조차 현지의 ‘땅굴’과 ‘산악동굴’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무엇보다, 전쟁 장기화에 따른 국민여론 악화에 견딜 수 있는 정부는 없었다. 수 천여 명의 병력 희생과 수 천역 달러의 소모에도 ‘테러와의 전쟁’은 미완이었다. 하지만, 이라크에서 철수한 ‘트럼프’처럼, 그를 뒤이은 2021년 '바이든' 정부도 ‘아프간 완전철수’를 선언했다.


필자가 한때 근무하였던 이집트는 미국으로부터 매년 수십 억 달러의 경제, 군사원조를 받았던 친미국가이었다. 그렇지만, 미군이라면 수백 년 전의 ‘십자군 전쟁’을 들먹이며 치를 떠는 서민 무슬림이 많았다. 무슬림들은 '형제'라는 인식이 강하여서인지, 소련의 ‘아프간 침공’ 때도 여타 무슬림의 외국군 증오는 비슷하였다. 이는,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양 문화 간 정서적 차이가 상당하였다. 결국, 문화와 이념에 대한 서로 다른 잣대는 상대에 무지한 이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난감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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