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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 - ①신무기와 침략주의 태동

by 김성웅

‘팽창주의’와 ‘쇄국주의’


역사의 흐름에는 항상 변곡점이 있었다. ‘게임체인져’가 된 신무기의 등장 역시, 변곡점의 중요한 요소였다. 1467년부터 시작된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는 그 시대적 특성이 ‘하극상’이었다. 절대 맹주가 없어지자, 각 지방 영주는 이웃과의 전쟁 소용돌이 속에서도 ‘부국강병’을 추구하여, 이 시기에 오히려 국가 전체 경제력이 급성장하였던 아이러니도 경험하였다.


전국시대가 한창인 1543년 어느 날, 태풍으로 표류하던 포르투갈 난파선이 일본 남단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상륙하였다. 일본에 ‘조총’이라는 신무기가 소개되던 순간이었다. ‘다네가시마’ 도주 ‘도키다카’는 포르투갈 선원으로부터 조총이라는 ‘머스킷(Muskeet, 화승총)’ 2정을 샀다. 대가는 은 2,000냥. 지금 가치로는 대략 20억 원으로, 당시 가치로 병사 200여 명의 1년 동안의 유지비용이었다. ‘조총’의 가치를 알아본 그의 혜안이 놀랍다.


비록, 사거리 약 50보라는 위력에 비해 재장전 시간이 3분 정도 걸려 너무 길고, 우천 시 사격이 제한된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아시가루’라는 농민 출신 잡병들의 ‘조총’ 사격 한 방에 수십 년간 익힌 무예로 전장을 풍미하던 사무라이들도, 그야말로 맥없이 쓰러졌다. 전국시대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조총의 위력을 극대화했다. 한두 정의 위력은 별로지만, 수백 정의 조총을 3개 조로 정렬시켜 소위 '철포(뎃포) 3단 총격'이라는 방식으로 계속 교대하며 동시 사격을 해대면 그 위력은 과히 압도적이었다.


실제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철포 3단 총격’으로, 당시 최고의 무력집단이었던 1만 5천여 명의 ‘다께다’ 기마군단을 격멸하였다. 겨우 800여 기만 살아서 도주했다. 포르투갈 선원에게서 입수한 조총(화승총, 철포)이 ‘게임 체인저’가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승승장구하며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가 1582년 ‘혼노지’에서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되자, 부장이던 ‘하시바 히데요시’가 급히 회군하여 ‘아케치 미쓰히데’를 무찌른 후, 그동안 ‘노부나가’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물려받고 다시 일본 평정에 나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로 개명한 그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아키국’의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등 다수의 영주에게 복속을 요구하여 항복을 받았고, 158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신하의 예를 갖추고 복종을 맹세하였다.


1590년 ‘쿠슈’와 ‘오다와라’ 정벌을 끝으로 일본 통일을 완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미카와’ 영지를 거두고, 시골 바닷가 ‘에도’로 내몰았다. 잠재적인 경쟁자의 힘을 뺀 것이다. 그리고, 통일 전쟁 기간 부하들에게 약속한 녹봉을 확보하기 위해 영지 확장을 위해, 전쟁으로 엄청나게 비대해진 군사력을 조선과의 국제전에 투입하여, 영지확보는 물론, 국내 정세의 안정을 목적으로 침략을 구상하였다.


조총이 일본에서는 이미 전장의 주요 무기로 사용되고 있던 1591년, 조선에 조총이 소개되었다. 하지만, 당대 최고 무장 ‘신립’ 장군을 비롯한 조선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별다른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사거리가 짧고, 위력에 비해 장전시간이 길고, 우천 시 사격이 제한된다는 단점 때문이었다. 일본은 발상의 전환으로 역사를 바꾸었는데, 조총을 가볍게 생각한 조선의 단견이 너무 아쉽다. 그 이듬해, 1592년 임진왜란 시 조선은 무참한 참패를 기록하게 된다.



조선 침략과, ‘모리’가(家)와 ‘시마즈’가(家)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의 명분으로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밀었으나,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히데요시’의 출병 지시로 각지의 다이묘(大名, 지역 군벌)들이, 왜구가 한반도 남부 약탈 시 출발하였던 쿠슈 지역에 집결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출발지 히젠 '나고야'성(나무위키)

항해술이 미비하던 시절, 일본에서 ‘눈으로 보면서’ 한반도로 항해하려면, 조슈 번의 항구도시인 ‘시모노세키’나, 인근 구슈 북부 ‘히젠’ 번의 '나고야'성에서 출항하였다. (나고야 성은 조선출병 중지이후 폐성되어, 사가현의 '가라츠 성으로 옮겨간다) 이곳에서 '현해탄'이라 불리는 대한해협(쓰시마 해협)을 항해하려면, 구슈에서 출발하여, 50Km 정도 떨어진 ‘이키섬’에 도착한 뒤, 다시 50Km를 항해하여 ‘대마도’를 마치 징검다리 건너듯 거치고 나면 부산이나, 한반도 남부해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개시 직전에, ‘히데요시’는 이 뱃길을 잘 아는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왜구 활동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이들을 활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초기에는 구슈와 주고쿠 등 서부 일본 지역의 각 번에서 가장 많은 병력이 차출되었다.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최적 항로 (출처: 조슈번이야기, 김인호)

임진왜란 시, 조선 공격의 선봉을 놓고 다투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나 ‘가토 기요마사’의 군세보다도, ‘모리 데루모토’의 군은 조선에 상륙한 16만여 일본군 중 3만+1만 (양자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병력으로 정벌군 중 가장 규모가 컸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핵심 부하로서 ‘쿠슈 정벌’ (1586-1587)에 나선 ‘모리 데루모토’가 미리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의중을 파악하고, 조선 침략을 준비해 온 탓일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 조선은 각 지역 수령들이 소속 군사를 이끌고 거점 지역으로 이동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의 지휘를 받는 일종의 분권법적인 전략인 '제승방략'으로 대응하였으나, 기동전환이 늦었고 훈련 부족, 지휘관의 무능에다, 조총의 위력과 전쟁 기계로 단련된 일본군에게 속수무책 연전연패하였다. 특히, 도원수 신립은 이씨 왕조의 운명을 짊어졌지만 '조령'이라는 천혜의 방어진지를 버리고, 총탄을 피할 곳도 없는 허허벌판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5천 여 병사와 함께 호기롭게(?) 싸우다가 조총의 위력에 몰살당하였다. 이 전투로 마지막 예비병력마저 소진된 조선은 왕부터 한없는 도망 길에 오른다.


하지만, 한동안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은 원군으로 나선 명군의 개입과 조선 의병의 활약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초 구상과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은 점차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이에, ‘히데요시’는 ‘조선 8도’를 각 도별로 심복 부하 장수에게 분할 (평안도-고니시, 함경도-가토, 황해도-구로다, 충청도-후쿠시마, 전라도-고바야카와, 경상도-모리 테루모토, 경기도-우키다 히데이에) 지배하여, 조세를 거두어 양식을 비축하고, 왜성을 축조하여 장기전에 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로 ‘모리’군이 경상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모리’ 가문은, 1550년대까지 ‘오우치 요시타카’(大內義隆)가 지배하던 조슈지역 영토 - 일본 혼슈의 가장 남단에 위치한 지금의 야마구치현과 시모노세키시 일대를 차지하였는데, 이는 일본 열도 중에서 역사적,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장 밀접한 지역이었다. 아마도, ‘모리가’(毛利家)가, 임진왜란 이전부터 통치하던 조슈 번의 번청이 있던 ‘하기(萩)’가 경상도에서 가장 가까웠던 이유로, '히데요시'가 경상도 일대를 지배하게 배려해 주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모리’군은 경상도 남부에 많은 왜성을 축조하고, 방어체제를 갖추어 영구 지배까지 도모하였다. 이들의 흔적은, 부산 ‘자성대 공원’ 안에 이들이 세운 성 (부산진성)으로 지금껏 남아있다.


한편, 쿠슈 남단에 위치한 ‘사쓰마’ 번은 지리적으로 나가사키, 가고시마 등 여러 항구가 발달한 지역이며, 동아시아와 남만 (서구 세력)과의 무역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해상 세력을 키워온 지역이라, 일본 전역에서도 가장 오지였지만, 면적 (경기도와 유사), 경제력, 인구 (특히, 사무라이 숫자가 일본 평균 약 7~10 퍼센트에 비해 두 배 정도 높았다) 등을 고려할 때, 전국의 약 270여 개 번 중에서 경제적,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번의 하나였다. (에도 막부시대 자료 참고) 이른바, 일본식 용어로 ‘웅번’(雄藩)의 하나였다.


사쓰마의 ‘시마즈’가(家)는 해군력이 강하여, 임진왜란 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쓰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일본 수군을 맡겼다. 그는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 이순신 장군에게 수차례 참패를 당하였으나, 정유재란 중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을 전사케 한 인물이다. 그는, 전쟁 이전부터 서구와 무역을 해왔던지라, 도자기의 가치를 잘 알았기에 임진왜란 중 수많은 조선인 도공과 그 가족을 끌고 가, 지금의 ‘가고시마’ 인근에 집단거주 시키며, 도자기를 생산하고, 이를 ‘다도’(茶道)를 즐기는 ‘히데요시’에게 진상하였으며, 많은 도자기를 남만 지역으로 수출하였다. 지금껏 일본 도자기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1598년, 조선 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각 다이묘(大名)들은 조선에서 철병하였지만, 최초 위풍당당하게 앞장섰던 ‘모리 데루모토’나, ‘가토 기요마사’ 등 대부분의 ‘친 히데요시’ 다이묘들은 7년간의 조선 전쟁에서 엄청난 비용과 군사를 잃어버렸다. 일본으로서는 비록 영지는 얻지 못했지만, 수많은 조선인 기술인력을 얻었고 일본 국내안정에 불필요해진 군사력도 처분한 셈이었다. 반면, 조선은, 전체 백성의 ⅓이 죽고 수많은 문화재와 도자기 등 당대 최고의 기술들을 약탈당하며 거의 망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출병 전, ‘히데요시’는 무슨 영문인지 ‘조선 출병’ 지시를 받고 달려온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출병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아마도, 조선 출병 직전에 좋은 영지를 빼앗고 전혀 황폐한 바닷가를 개척하도록 내몰았던 잠재적 경쟁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을까? 어쨌든, ‘도쿠가와’는 전장에 나가지 않고 일본에 남아서 예하 병력을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막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1600년, 조선에서 철수한 각 다이묘들은 권력자 ‘히데요시’ 사후에 일어난 권력 다툼에 곧바로 말려들었다. 그리고, ‘세키가하라’에서 ‘이시다 미스나리’ 주도로 결집한 ‘친 히데요시 파’ (서군)와 ‘히데요시’ 세력에 반대하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동군) 간에 운명을 건 전투가 벌어졌다. 공격 개시 전에는 서군의 세력이 더 우세해 보였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서 조선 정벌군 총사령관을 하였던 서군의 주력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전투 직전에 갑작스레 변심하여 동군에 가담하자, 허를 찔린 서군은 크게 패배하였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양자였지만, ‘히데요시’에게 아들 ‘히데요리’가 뒤늦은 탄생하자, 다시 ‘모리 테루모토’의 양자로 재입적되었던 인물이다. 전투 직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서군의 지도부로 참전한 조슈 지역의 ‘모리 데루모토’에게 참전 책임을 물어, '주고쿠' 지방을 거의 석권하였던 120만 석의 영주에서, 지금의 야마구치현에 불과한 40만 석의 영지로 감액한 후, 자식에게 양위하고 은거시켜, ‘모리 히데나리’가 조슈 번의 번주가 되었다.


사쓰마 지역의 ‘시마즈 요시히로’도 역시 서군 편에 가담하였다가, 큰 낭패를 당하였다. 그런데, ‘시마즈’에 대한 일본 전사(戰史)의 기술은 약간 과장적이다. '요시히로'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1,500여 명의 군을 이끌고 서군편에 섰다가 동군에 포위되고 퇴로가 차단되어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자, 최후의 생존 수단으로, 남은 500여 명의 병사와 동군 본진을 정면 돌파하여 철수하는 ‘스테가마리’라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작전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는 본대가 도주하도록 죽기를 각오한 군사들이 연달아 적의 추격을 저지하는 방식으로, 사쓰마로 돌아간 병력은 불과 80여 명이었다고 하니, 주군을 위해 처절하게 싸운 병사들의 모습이 상상된다.


어쨌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도, ‘도쿠가와’는 기세를 몰아 사쓰마에게 공격을 계속하며 ‘요시히로’에게 항복을 강요하였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사쓰마 군을 쉽게 정벌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동안 전투를 계속하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도쿠가와’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신하를 자처하였다. ‘시마즈’ 가문은, 자신의 영지를 보존하고 사쓰마의 77만 석 석고를 지켰다. 이처럼, 전투에서 용맹하였던 사쓰마 군의 전통도 막부 이후 유신 시대까지 이어졌다.


‘도자마’ 다이묘 (쿠슈의 ‘사쓰마’, ‘히젠’. 혼슈의 ‘조슈’, 시코쿠의 ‘토사’ 번)

당시, 일본 전역 약 270여 개의 번중, 사쓰마와 조슈처럼 ‘히데요시’의 심복으로서 서군편에 섰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어쩔 수 없이 ‘도쿠가와’ 막부에게 신종하게 된 여러 번들 - 사쓰마, 조슈, 히젠, 토사번 등을 함께 ‘도자마’ 번으로 부른다. (반면에, ‘도쿠가와’ 편에 서서 전투에서 충성한 여러 번을 ‘후다이’ 번이라고 한다)


전쟁에서 패배한 ‘도자마’ 번은 경제적으로 많은 타격을 받았지만, 막부는 사쓰마, 조슈 등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자신을 적대했던 번의 영주들을 우대하여 유화책을 써서, ‘에도’ 성의 각종 의식이나 행사에서도 늘 높게 대우하였고, 위신도 세워 주었다. 특히, 사쓰마에서는 2번이나 쇼군의 부인이 나왔다. 하지만, 막부 정치의 요직은 거의 ‘후다이’ 번의 차지였다.


‘도쿠가와’에 반대했던 ‘도자마 다이묘’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와신상담’을 다짐하며, 숨을 죽이고 살았다. 그리고, 260여 년이 지나서 이들 ‘도자마 번’ (조슈, 사쓰마, 히젠, 토사) 출신의 하급 무사들이 천황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켜, 막부를 지지하던 ‘후다이 다이묘’와 ‘에도 막부’를 타도하였다. 그것이 ‘메이지 유신’이었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의 계기는 뿔뿔이 흩어졌던 번들이 힘을 모은 사쓰마와 조슈번이 맺은 ‘삿-쵸동맹’이었다. 이들 양 번의 많은 하급 사무라이들이 막부 말기에 가진 ‘막부 타도’, ‘존왕양이’를 공유하면서 맺은 조슈와 사쓰마의 결합은 임진왜란으로부터 이어온 '정한론'의 뿌리이기도 하다. 특히,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조슈 번은, 조그마한 일개 번이었지만, 막부보다 천황에 충성하려는 번주의 지원으로 하급무사들이 단단히 뭉쳤고, 해양세력 사쓰마 번도 번주 '시마즈 히사미스'의 지원으로 하급 무사들이 ‘존왕양이’를 내세우며 막부 타도에 앞장섰다.


이처럼, 일본 전역 약 270여 개의 번중, 사쓰마와 조슈처럼 ‘히데요시’의 심복으로서 서군편에 섰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어쩔 수 없이 ‘도쿠가와’ 막부에게 신종하게 된 번들 - 사쓰마, 조슈, 히젠, 토사번 등을 함께 ‘도자마’ 번으로 부른다. (이에 비해, ‘도쿠가와’ 편에 서서 전투한 충성파 번을 ‘후다이’ 번이라고 한다)


전쟁에서 패배한 ‘도자마’ 번은 경제적으로 많은 타격을 받았지만, 막부는 사쓰마, 조슈 등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자신을 적대했던 번의 영주들을 우대하여 유화책을 써서, ‘에도’ 성의 각종 의식이나 행사에서도 늘 높게 대우하였고, 위신도 세워 주었다. 특히, 사쓰마에서는 2번이나 쇼군의 부인이 나왔다. 하지만, 막정의 요직은 거의 ‘후다이’ 번의 차지였다.


‘도쿠가와’에 반대했던 ‘도자마 다이묘’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와신상담’을 다짐하며, 숨을 죽이고 살았다. 그리고, 260여 년이 지나서 이들 ‘도자마 번’ (조슈, 사쓰마, 히젠, 토사) 출신의 하급 무사들이 주축으로 반란을 이르켜, 막부를 지지하던 ‘후다이 다이묘’와 ‘에도 막부’를 타도하였다. 그것이 ‘메이지 유신’이었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의 계기는 뿔뿔이 흩어졌던 번들이 힘을 모은 사쓰마와 조슈번이 맺은 ‘삿-쵸동맹’이었다. 이들 양 번의 많은 하급 사무라이들이 막부 말기에 가진 ‘막부 타도’, ‘존왕양이’를 공유하면서 맺은 조슈와 사쓰마의 결합은 임진왜란으로부터 이어온 '정한론'의 뿌리이기도 하다. 특히,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조슈 번은, 조그마한 일개 번이었지만, 막부보다 천황에 충성하려는 번주 ‘모리 다카치카’를 중심으로 단단히 뭉쳤고, 해양세력 사쓰마 번도 번주 '시마즈 히사미스'의 지원으로 하급 무사들이 ‘존왕양이’를 내세우며 막부 타도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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