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②에도 막부와 ‘책 읽는’ 무사

by 김성웅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본 통일과 ‘에도 막부’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에서 주도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적자 후계자인 ‘히데요리’ 세력과 대립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오사카성’ 전쟁 (1615)에서 승리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일본 전역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쇼군’ (征夷大將軍)이 되어, ‘에도 막부’를 열고,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직 세습체제를 확립하였다. 물론, 천황은 여전히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도쿠가와’ 가의 '쇼군' (征夷大將軍)의 역할로 그는 문자 그대로 ‘오랑캐를 정벌하는 대장군’이었지만, 정작 막부의 '가로'(家老)들은 해외 정벌보다, 내치와 국내안정에 주력하였다. 당시, 막부는 수많은 번들을 압도하는 막강한 군사, 경제적 권력을 지녔지만, 전쟁으로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막부에게도 가장 큰 위협은 역시 각 지역의 번이었다. 이에, 막부는 자신에게 맞설 수 있는 각 번의 다이묘 간 세력 형성을 방지하기 위해, 다이묘 간 동맹, 혼인금지 등으로 이들이 서로 연계하거나 천황과 가까워지는 것을 차단했다.

그 밖에도, 막부가 번의 반란을 막기 위해 시행한 여러 가지 제도로는, 각 번의 자체적인 ‘성의 개축과 수리 금지’는 물론, ‘주인선(朱印船)’ 제도로 외국과의 무역 제한, ‘무기 도입 허가제’와, 해군력 보유를 경계하여 500석 이상 적재 가능한 ‘대함보유 금지’, 그리고, 일종의 번주 인질 정책인 ‘산킨코타이’(參勤交代) 제도 등으로 각 번의 단결을 막고. 재정부담을 가중시키는 제도를 강요함으로써 성공적인 지방통제를 수행하였다.


산킨코타이(參勤交代) : 각 번의 번주들은 수백 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일정기간 의무적으로 교토에서 머물러야 했다.

다만, 막부는 번이 막부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복종하기만 하면, 당근책으로 번 내의 통치에는 별로 간섭하지 않았다. 일종의 중앙집권적 성격을 가지면서도 지방분권적인 지배체제였다.


이렇게, 막부가 번에 대한 강압적인 각종 제도로 옥죄이면서도, 상호 인정하는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 번은 사실상의 국가로서 통치에 필요한 자체적인 행정, 사법, 징세, 경찰권 등 거의 모든 권한을 갖게 되었고, 번의 권한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다이묘(大名)는 번의 군주로서, 가신들의 주군으로서 세습되었다. 그 결과, 번의 가신들이나 백성들은 다이묘를 넘어 막부나 쇼군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은 없었다.


‘에도’ 막부는 일본 전체의 1/4 지역과 주요 도시들을 통제하고, 전국의 주요 금, 은 광산을 장악하여 중앙 정부에 의한 통일 화폐를 발행하였다. 특히, ‘산킨코타이’(參勤交代) 제도는 전국적인 상업 발달을 촉발하여 훗날 자본주의가 번성하는 발판이 되었다. 또한, 번에 대한 지방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유교적 질서하에서 엄격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를 일본 역사상 처음 구현하였는데, 막부는 상근 5~6만의 병력을 유지하여 반대 세력을 정치, 경제적으로 억압하여 일본 역사상 가장 오랜 260여 년간 평화 시대를 구가할 수 있었다.

일본처럼, 조선도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제도였다. 다만, 조선의 사(士)가 선비를 지칭하지만, 일본의 사(士)는 무사(侍)를 의미한다. 조선의 선비는 책만 읽지 아무런 생산력이 없어서 그저 공자와 맹자를 논하며 현실 안주를 원했다. 변화는 자신들의 위상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추구하였고, 변화와 혁명을 억압하고 적대시하였다. 반면, 똑같은 ‘사농공상’ 신분제도를 가졌지만, 일본의 무사는 늘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었다. 무사들에게 안주는 ‘죽음’이니 살기 위해서라도, “더 낫게”를 찾아야 했다. 왜란 이후, 이어진 ‘에도 막부’는 찬란한 경제, 문화의 발전을 이루었으나, 조선의 실학사상은 그 빛을 잃었다.

하지만, ‘에도’ 막부 말기에는 긴 평화로 무디어진 정치, 행정으로, 서세동점(西勢東占)으로 점증하는 외세의 통상 요구에 따른 침입과 산업, 과학, 무기체계 등의 발달에 따른 시대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다만, 이 시기에도 각 번들의 부국강병, 근대화 개혁의 경쟁이 있었다. 그 결과, 반 막부 사상을 가진 번의 가신단이 주군을 제쳐두고 번의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속출했다. 그리고, 이를 막지 못하면 번이나 막부에게는 종말의 빌미가 되었다.



막부 후반의 ‘책 읽는 사무라이’(무사)


전국을 통일한 ‘도쿠가와’ 막부는 ‘병농분리 정책’이라며, 사무라이를 농민들과 분리시켜 상급 무사와 하급 무사들을 나누어 ‘죠카마치’(城下町)라는 번주의 성아래 마을(죠카마치), 에 살게 하여, 수많은 무사들이 성아래 마을에서 일종의 도시를 형성하며 모여 살았다.


죠카미치(城下町)의 사무라이 거주지(조슈번)

자연스레, 각 번의 각 성아래 ‘죠카마치’에는 방대한 도시민이 생겨난 셈인데, 이렇게 도시 인구가 급증하자 이들에게 생활 물품을 제공하는 상인(죠닌)들의 거주지도 덩달아 형성되면서 도시는 규모의 경제를 가지고 점차 커져갔다. 260여 년간 지속된 평화 덕분에 상업과 화폐경제가 놀랄 정도로 발달하여 농민과 상인들은 다양한 경제활동으로 막대한 부를 챙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배계층이지만 경제에 무지한 사무라이는 이런 성장의 혜택을 입지 못하였다.


당시, 사무라이의 인구는 전체 인구 3,500여만 명 중 대략 7% 정도인 250여만 명이었는데, 무(武)를 최고의 가치와 자부심으로 여기며 살아온 사무라이들의 근본은 칼을 든 무인이기에, ‘주군에게 복종하며 전투에 대비하여 강건한 군인정신과 심신의 단련하는 것’이 이들의 일상이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이렇다 할 전쟁이 없었으니 출세할 일도 없고, 별다르게 칼 쓸 일도 없다 보니, 성내의 자잘한 사무나 보며 쥐꼬리만 한 녹봉을 받는 게 고작이다 보니, 점점 군인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힘들어졌다.


한편, 특히, 하급 무사들은, 그저 전쟁에 대비하여 ‘다이묘’ (번주)로부터 100석 미만의 일정한 봉록을 받으며 살다 보니, 세월이 갈수록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농민이나 상인보다 삶이 더 빈한하였다. 그런 데다가, 쌀값이 계속 상승하자 고정된 임금으로는 갈수록 생활이 점점 궁핍해져 이런저런 모양으로 이들의 불만은 점점 고조되었다. 하지만, 세습되는 지배계층 고급무사가 모든 권한을 갖고 있으니 하급 무사로서는 번정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거나 정치에 관여할 수도 없었다. 자연히, 두 계층 간에 점점 간격이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극적인 변화는, 1790년대부터, 막부가 하급 사무라이들의 불만 무마와 무위도식 방지를 위해 ‘주자학’ 등 유학(儒學) 중시 정책을 ‘무술단련’과 병행하도록 펼친 것이다. 이후, 1830년까지 약 40여 년 동안, 유학(儒學) 관련 교과로 80여 개 이상의 번교가 설립되었다. 각 번마다 학교 설립 붐이 일어난 셈이다. 그러자, ‘책 읽는 사무라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군사적 역할이 줄어든 하급 무사들은 이제 학교에서 배울 것이 많아졌고, 유학(儒學)과 정치권력과의 관계도 더욱 밀접해져서, 고위 권력자조차도 ‘정치참여’라는 어려운 과제를 풀기 위해 유학적 소양을 갖추는 것이 필요할 정도로 학문의 비중이 커져갔다. 게다가, 과거제도가 전혀 없었던 일본에서 사무라이를 대상으로 ‘주자학’ 실력을 평가하는 과거제도도 생겨나서 무예뿐만 아니라, 학문이 출중한 사람에게도 출세길이 열리다 보니, 무사들에게도, 행정 능력과 정치적 감각이 중요해졌다.


이처럼, ‘칼만 든 사무라이’보다 ‘칼과 책을 든 사무라이’, 즉 무인 정신에 유학 지식을 더한 무사가 ‘시대적 엘리트’로 자리 잡으며, 이들의 생활방식이 점차 무에서 무와 문을 겸비하도록 전환되었다. 18세기 후반, 막부가 각 번에 건립한 메이린콴(明倫館)에는 이러한 문, 무 교육 시설이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


하기시에 있는 메이린콴(명륜관)과 함께 있는 유비관(무도수련장)

그런데, 문무를 겸비한 ‘책 읽는 사무라이’들의 유교적 소양이 점점 커지자, 이들은 대권을 위임받아 전국을 통치하는 ‘도쿠가와’ 쇼군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그럼, 교토의 천황은 정치적으로 어떤 존재인가? 등 쇼군 권력의 근거에 대한 의문 등으로 현실정치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에 막부는 ‘위임론’으로 ‘존왕론’을 만족시켰으나, 권력 정당성의 원천을 쇼군 자체의 독자적인 정당성이 아니라, 천황에게서 찾았기에 만약에, 막부더러 "권력을 포기하고 천황에게 반환하라"라면 막부가 거부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을 터였다.


게다가, 서양문물의 유입으로 난학 (네덜란드 학문)과 새로운 신무기 총포가 도입되고, 아편전쟁 등 외세의 침략에 따른 동북아의 정세가 변화하자, 외세의 침략 등 내우외환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려는 무인들은 강한 대외 위기의식을 느끼며, 여느 집단보다 먼저 '정치 세력화'하여 정치, 외교 등 시시각각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민감하게 대응하려 하였다.


특히, 막부의 쇄국정책과 안일한 외세 대응에 실망하여 온 이들 ‘책 읽는 사무라이’들은, 전, 평시에 주군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던 과거 사무라이들의 행태에서 벗어나, 점점 천하나 국가 대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사이고 다카모리’나 ‘오쿠보 도시미치’와 같은 ‘책 읽는 사무리아’들은 번의 권력자나 고급 사무라이를 능가하는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사무라이 의식을 버렸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처럼, 지배계층인 사무라이 내부적으로는 상급 무사와 하급 무사 간에 서로 투쟁하며 점차 진화하여 갔지만, 오랫동안 사농공상의 계급주의가 정착한 사회에서 자라난, 사무라이 아래의 농민, 상인 계층은 자신의 직분에만 충실할 뿐 정치참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대다수의 농민 계층은 모든 걸 지배층의 뜻에 맡기고 관망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상인 계층 등도 변혁의 과정에서 양쪽 모두에게 보험을 들어두는 정도였다.

‘메이지 유신’은 '하급 무사'출신인 급진개혁파가 지배층인 보수파에 대해 주도권을 잡아 (일종의 반란으로) ‘서구화’를 이루어 낸 변혁으로, 상, 하 사무라이 간의 다툼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다 보니, 지배계층으로부터 변화와 혁신이 이어져도 일반 대중의 사회질서는 별다른 변화 없이 여전히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학습효과 탓인지, 최근까지도 일본 대중의 정치참여 관심은 덜하다.


하지만, 대중들의 이런 무관심은 향후 군부 출신의 국가 대외전략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사들은 비록 학식이 있다 하나 그 근본이 주군에게 복종하고 군인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집단이어서, 이들에 의한 개혁은,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과 국가 전체를 군인화된 집단으로 만들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하는 군국주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부국강병’만이 일본의 생존을 보장할 국가시책으로 삼으며, 메이지, 다이쇼, 히로히토 천황을 거치는 동안, 타국에 대한 침략 위주 팽창주의로 국가를 파멸로 몰고 갔다.

이처럼, 정치적 통치 이념보다는 국가정책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였던 일본의 유학과 달리, 조선의 유학은 '주자학'이 지배적인 사상으로, 왕은 '천명'을 받은 통치자로 여기며, 충효사상을 정당화하는 이념이었기에, 이를 지지하는 양반 계층은 유학으로 사회적 지배를 강화하며 신분제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역할에 충실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임금이 없어지고, 양반제가 붕괴되자, 갈피를 잃은 조선 사회가 한동안 혼란에 빠졌던 이유이기도 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 - ①신무기와 침략주의 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