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③‘쇄국정책’과 ‘흑선내항’

by 김성웅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잔재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초대 ‘쇼군’(征夷大將軍)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는 주변국 ‘오랑캐들을 정벌하려던' '히데요시'의 팽창정책을 폐기하고, 변화보다는 안정을 내세우며, 할 수 있는 한 많은 국가와 수교 등 관계 정상화를 목표로 선린외교에 주안을 둔 대외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바탕 큰 전쟁을 치른 조선 등과의 국교재개에도 노력하였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전대미문의 피해를 입어, 철천지 원수였던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미 죽어버린 데다, 그의 흔적을 지우고 접근하는 새로운 막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태도 전향에 마음을 돌렸다. 그리고, 이후 1607~1811년 사이 200여 년 동안 12회의 조선 통신사를 파견하여, 당시 중국(청) 대륙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달하였다. 당시, 조선통신사 일행은 일본이 조선 침략 시 사용하였던 항로로 왕래하였는데, 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쓰시마’가 조선과 대외교섭 창구로서 이들을 안내하였다. 훗날, 한국 정부는 '시모노세키'의 명소인 ‘간몬 대교’ 근처 바닷가에,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구슈와 혼슈를 잇는 시모노세키의 ‘간몬 대교’(우) 근처의 ‘조선 통신사’의 상륙지점(좌)

막부는 조선 이외에도 ‘히데요시’ 집권 시 허가받은 선박만 외국인과 무역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주인선’(朱印船) 제도를 활용하여 남만(포르투갈)이나 중국 등을 '통상국'으로 지정하고 ‘나가사키’ 항을 서양과의 교류 중심지로 삼아, ‘주인선’(朱印船, 빨간색 도장이 찍힌 무역허가서) 무역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천주교) 국가인 포르투갈, 스페인 등 남만과의 무역이 점점 활발해지자, 무역선과 함께 따라온 이들 국가의 선교사에 의해, 구슈와 주고쿠 등 서부 일본 지역에서 많은 ‘기리시탄’(크리스천)이 생겨났다. 이에, ‘도쿠가와’ 막부는 1612년 ‘기리시탄’ 금교령을 내리고, 서양과는 오직 무역만 하려 하였다. 쇄국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구슈의 ‘시마바라’ 번 지역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공의 선봉장이었던 ‘기리시탄’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였으나, ‘고니시’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요시’ 잔재의 서군(西軍)으로 출정하여 패하자 이후 영지의 주인이 바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은 여전히 크리스천이 다수인 지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막부의 금교령 이후, '기리시탄'에 대한 억압이 이어지던 1638년, 번 주가 축성작업으로 ‘기리시탄’을 혹사하고, 기근에다 과중한 세금까지 겹치자, 약 4만여 명의 ‘기리시탄’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시마바라’ 반란이다.


시마바라 성

이 반란으로 막부는 고전했다. 하지만, 사쓰마 등 규슈 일대의 '도자마' 번 병력을 동원하여 난을 진압하고, '천주교'를 선교하여 온 ‘포르투갈’과 단교하고 ‘그리스도교’ (천주교)의 세력 확대를 금지하였다. 반란이 다시 쇄국의 빌미가 된 것이다. 다만, 반란 진압에 도움을 준 ‘네덜란드’(蘭)에게는 선교금지를 조건으로 1860년대 '에도' 막부 말기까지 약 200여 년간 일본 무역 독점권을 주었다. 1636~38년경 이때, 막부는 ‘나가사키’에 인공섬 '데지마' 섬을 만들어, 그곳에 상관(商館)을 설치하였다. 굳이 인공섬을 만든 이유는 외국인과 일본인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곳은 이후 약 200여 년 동안 일본에서 유일하게 서구에 열렸던 창구로서, 일본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막부시대 무역을 위해 나가사키에 만들어진 인공섬 '데지마'


‘검은 화륜선’ 출현


1853년 7월 8일,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페리 원정대’ (‘서스케하나’ 등 증기선 군함 4척, 대포 63문, 승조원 980명) '에도만' '우라가'에 내항하여 통상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본은 오랫동안 네덜란드 와 무역하는 동안 보아왔던 배(帆船, 범선)와 달리, 배 중앙 부분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를 내뿜고 선박 중앙 양옆에 바퀴형 물갈퀴가 달려서(화륜선) 바람에 무관하게 신속하게 달리는 시커먼 배를 흑선(黑線, 선체 부식을 막기 위해 '타르'로 시커멓게 칠을 한 군함)이라 불렀다. 신무기에 열광하는 일본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전 통고 없이, '새까맣고, 거대한' 미국 함대가, 자신들의 안마당 격인 '에도만' 깊숙이 들어와서 엄청난 대포(공포탄)를 쏘아대자 일본인들은 대혼란에 빠졌지만, '페리'제독 등 미군 300여 명은 평화를 상징하는 듯이, 움직이는 모형 증기관차 등 많은 선물과 함께 군악대를 앞세우고 '구리하마' 해변에 상륙하였다. 당시, 대형 증기기관을 장착한 흑선 이외에도 자체 동력으로 달리는 모형 증기관차는 많은 일본인들을 놀라게 만들었고, 산업혁명과 관련되는 이런 모습은, 일본의 근대사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 되었다.


미국의 흑선 (포문들이 보이고, 함선 가운데 있는 증기 엔진이 보인다)

미국 함대는 "1년 후에 다시 오겠다"며 불과 9일 만에 철수하였지만, 이 ‘흑선 내항’을 계기로 충격을 받은 막부는, 1주일 만에 네덜란드에 함선을 주문하고, 지금까지의 ‘대선건조 금지령’을 해제하여, 각 번에도 군함건조를 장려하며, ‘포대(砲臺)’를 구축하여 해안방어를 강화하도록 지시하였다. 막부가 각 번을 옥죄이던 신무기 통제까지 풀어준 것이다.


그렇지만, 막부의 이런 조치는 너무 늦었다. 무인 정권인데도 상대에게 군사적으로 약점을 보였으니, ‘도쿠가와’ 막부체제의 약화는 불가피하였다. 이로 인해, 책을 읽고 나름의 정치적 식견과 국제정세에 대해 약간이라도 관심 있는 전국 사무라이들이 하나같이 막부의 무능을 질타하였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는, 막부 타도를 외치는 ‘존왕양이’ 파가 점차 등장하기 시작했다.



미일 화친조약과, 미일 수호통상조약 체결

그런데, 1년 후에 오겠다던 미국함대가 불과 6개월 후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협상 끝에 1854년 3월, '미일 화친조약'이 체결되었다. 여기에는, 18개월 후에 '주일 영사'를 둘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당연히, 미국은 '해리스'를 영사로 파견하였고, 그의 부임은 일본과의 '통상조약'이 목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막부는, 쇄국에서 개국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일본은 '화친'은 몰라도 '통상조약' 체결은 여전히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미국 영사 '해리스'는, 당시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을 언급하며, "영국과 프랑스가 중국에 승리하게 되면, 그 다음은 일본이다"라는 등 서구 특유의 협박작전으로 막부를 압박했다. 그 결과, ‘고메이’ 천황과 조정의 신하들의 통상조약체결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침입을 우려한 '에도' 막부는 "영국의 침입을 막아주겠다"는 미국과의 조약체결을 서둘렀다. 그렇지만, '고메이' 천황은, "통상조약의 체결은 일본을 더립힐 것"이라며 칙허를 거부하였다.


이처럼, 천황의 반대가 확고한데도, 막부의 '로쥬'(老中) ‘이이 나오스케’는 "영국과 프랑스가 쳐들어 오기 전에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라며 천황의 칙허 없이, 1858년 미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칙허 없이 조약을 체결한 것도 문제인데, 조약 내용마저, '5개 항구를 개항하고, '협정관세'로 관세 자주권 포기 및 영사재판권을 인정'하는 등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러고도, 막부가 계속해서 유럽 열강과 하나씩 유사한 조약을 체결해 나가자, 분노한 ‘존왕양이파’들은 조정 대신들과 힘을 합쳐 막부의 불평등 조약 체결에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즈음(1858년)에 '쇼군'이 병약하여 후계자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이번에도 ‘이이 나오스케’가 '쇼군'의 후계자 문제를 독단으로 처리하였다. 당연히, 조야에서 막부에 대한 비난은 극에 달하였다. 그러자, ‘이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기에게 반대하는 조정 신하들과 다이묘 및 그 가신들마저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이것이 ‘안세이 대옥’인데, 이 탄압 과정에서 조슈번의 유신 선각자 ‘요시다 쇼인’도 처형당하였다.

하지만, ‘안세이 대옥’ 사건으로 막부가 많은 사람을 처벌해도, 반대가 가라앉기는커녕 더 많은 사람이 막부를 증오하며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그리하여, 미토번 출신 일부 무사들이 ‘안세이 대옥’의 원흉인 막부의 료주 ‘이이 나오스케’를 백주에 많은 사람이 보는데서 암살하고 도주하였다. ('사쿠라다'문 밖의 변) 반면, 암살단을 막지 못한 막부의 위신은 더욱 추락하였고, 존왕양이파의 '막부 타도'의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그런데, 비록 막부 타도세력이 점증하고 있다고 하지만, 일부 실권을 가진 급진파 '미토번' 출신들이 생각하는 '존왕양이' 운동은, 막부 내의 권력지향적인 막부 간신들을 소탕함으로써 ‘보다 훌륭한 막부’로 변신하여, 이들로 하여금 국정을 수행해야 한다는 소극적 생각이었다. 즉, '미토번'의 존왕은 ‘존왕경막’(왕과 막부 모두 존경)의 사상이라, ‘막부 타도’ 움직임이 점점 본격화되어 가는 시점에서는,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자연스레, 조슈 번 등지에서 ‘존왕양이’라는 다소 과격한 새로운 대안이 부상하게 되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②에도 막부와 ‘책 읽는’ 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