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은 ‘책 읽는’ 하급 무사들이 15세의 어린 천황을 내세우며 '왕정복고'를 도모한 군사 쿠데타였다. 이들 사쓰마와 조슈의 하급 사무라이 출신들이 천황을 내세우고 군사력으로 유신을 이룩하는 동안, 대다수의 농민이나 상인 대부분은 사무라이 계층 간의 계급투쟁에는 무심하였다. 그건 자신들과 무관한 지배층 간의 싸움일 뿐이었으니까... 농민이나 상인들은 그저 양쪽에 보험이나 들어두는 듯이 매우 관망적인 태도를 지켰다.
하지만, '존왕양이'를 외치던 이들 사무라이들은, 막부의 쇼군과 각 지역 번주들의 권한을 빼앗아 천황에게 집중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메이지 유신을 지원하였던 모든 고급무사와 각 지역 번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개혁의 속도를 더욱 가속화한 유신 세력은, 유신을 지원세력이지만 근대화 시책으로 불만에 싸인 '사이고 다카모리' 중심의 사무라이들과 벌인 '세이난' 전쟁으로 수많은 하급 무사들까지도 제거하는 등, 오직 천황을 위해, 근대화와 개혁에 거역하는 세력은 자신을 도왔든 아니든 가차 없이 쓸어버렸다. 유신은 비정함의 산물이었다.
‘조슈-막부’ 전쟁에서 승리한 ‘삿-쵸동맹 (사쓰마-조슈 동맹)’의 ‘존왕양이’ 세력이 주도한 ‘왕정복고’ 쿠데타로 새로이 수립된 메이지 정부의 모든 권력은 당연히, 에도 막부타도의 1등 공신인 조슈와 사쓰마 등 ’도자마 다이묘‘의 하급 무사 출신들이 차지하였다.
대개 30~40대의 이들 혁명세력 중에서도 ‘유신 3걸’로 불리는 사쓰마번 출신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그리고 조슈번 출신인 ‘기도 다카요시’가 개혁의 주역이었다. 급진개혁파인 이들 사무라이 출신 메이지 정권 각료들은, 정권 성립을 전후하여 ‘양이론’을 버리고, ‘개국 화친’으로 대외정책 기조를 바꾸었다.
특히, 이들 중 ‘기도 다카요시’ 등 조슈번 출신들은 일본의 팽창주의를 주도한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전수받은 자들로, 하급 사무라이에서 출발하여 각종 테러와 암살, 전쟁을 거쳤었다. 그런 영향 탓일까? 이들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혁명을 이룩하고 국정의 주요 직위를 담당하자, 급격한 ‘서양화’ 정책을 추진하고, ‘대일본 팽창주의’를 위한 ‘부국강병’을 내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유신 정부의 직할령이 적어 세금수입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원래부터 적었던 천황가 영토에다, '보신전쟁'에서 항거하였던 '아이즈' 번 등의 영토를 몰수하였는데도 천황령은 800여만 석으로, 일본 전체 3,200여만 석의 석고에 비하면 겨우 25%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신정부 각료 중 가장 급진적인 개혁파인 ‘기도’와 ‘오쿠보’는, 메이지 정부가 번과 사무라이 계층을 신속하게 정리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실현시키기 위해, 판적봉환 (에도 막부가 설치한 번이 가지고 있던 토지와 호적을 천황에게 반납한다는 뜻)과, 폐번치현 (천황에 의한 중앙집권화의 일원으로 지방통치를 담당하던 번을 폐하고, 현으로 일원화한 것 의미)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메이지 정부가 서구 열강에 의한 ‘식민지’화를 피하고, 개혁을 추진하려면 군사와 재정 측면에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각 번은 제각각 토지제도, 세제, 법령, 가신단 봉록체제 등을 갖고 있었고, 일차적인 충성대상은 당연히 번주인, 주군이었다. 심지어, 메이지 정부의 고급 관료가 되었지만, 하급 무사출신이었던 ‘기도 다카요시’나 ‘오쿠보 도시미치’조차 옛 주군 앞에서 함부로 할 말도 못 할 정도였으니, '번'이라는 체제가 있는 한 중앙집권제는 불가능하게 보였다. 그 때문에, ‘기도 다카요시’나 ‘이토 히로부미’ 등은 급진적 군현제 실시를 주장했지만, 공경출신인 ‘이와쿠라’는 1869년에 먼저, '판적봉환'부터 추진하는 점진적인 방법을 선호하였다.
'판적봉환'은 번의 토지와 영지 내의 농민들을 천황에게 반납한다는 뜻인데, 여기서 막부시대 번주는 막부와 주종관계를 인정하고 막부로부터 영지를 다스리는 위임장을 받는 형태였기에, 신 정부도 판적봉환을 단행하며 번주의 지위를 명칭만 '번 지사'로 바꾸고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이 때문에 기존 체제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으나, 유신 정부는 번의 독립은 예전처럼 유지해 주되 '행정지도'를 슬쩍 끼워 넣었다. 그리고, 이 '행정지도'로 번의 '가신'들을 몰아내고 새 인물을 임용하는 형태로, 번의 독립성을 점차 약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런 조치에 대해 설령, 번이 반발하고 싶어도 이미 1868년 보신전쟁으로 인하여 번의 재정이 파탄 나고 군사력마저 소진된 상태라 반발할 여력도 없었다. 그리고, 판적봉환이 시행되자 1869년 1월, 친 유신 정부적인 사쓰마, 조슈, 히젠, 토사 등 '존왕양이' 4개 번이 자발적으로 판적봉환을 하였다. 이렇게 되자, 나머지 전국의 각 번들도 앞다투어 '판적봉환'을 하였기에, 번을 무너뜨리기 위한 유신 정부의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판적봉환'과 달리, '폐번치현'을 하게 되면 약 200여만 명이 넘었던 번의 사무라이(번사)들을 대량 해고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불만 세력에 의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야 할 신정부의 군대마저 각 번에서 파견된 군대여서 실질적인 통제가 어려웠다. 특히, 사쓰마번처럼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유신에 적극 참여했던 번조차 신정부의 새로운 정책에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자, 정부 내에서도 찬, 반간 대립이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중앙집권의 필요성이 점차 지지를 얻어가자, ‘야마가타 아리모토’ 등 일부 중간관료는 유력자 설득에 나섰다. 특히, ‘야마가타 아리모토’가 번 체제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사이고 다카모리’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자, ‘이노우에 가오루’는 중앙집권화를 목표로 하던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의 동의를 얻으며,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주도하여 비밀리에 진행하였다. 논의는 확산되어 ‘이와쿠라 도모미’ 등 조정대신들의 지지도 확보하였고, 반발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강력한 무력조치도 준비하였다. 또, 하나의 쿠데타인 셈이었다.
1871년 8월 29일, 메이지 정부는 교토에 주재하고 있는 56명의 번주들을 차례대로 황궁에 불러 천황 명의의 칙령을 하달하였다. 천황의 칙령에 모두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사이, 전광석화처럼 ‘폐번치현’이 달성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개혁에도 번주들이 별다른 반발 없이 받아들인 데에는 3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경제적인 이유로서, 유신 정권은 그간 종신제였던 각 번주들의 직위를 면직하되, 각 가문에는 번 전체 수익의 10%를 지급하였는데, 이는 번주들에게 엄청난 금액이었다. 게다가, 이들이 소유하였던 저택이나 각종 건물들도 모두 사유화하게 인정하였다. 둘째 이유는, 예하 번사에 대한 ‘가록 지급’ 의무를 없애고, 전쟁 등으로 번이 짊어진 엄청난 부채를 유신 정부가 변제해 주기로 한 것이고, 세 번째는, 번주라지만 수백 년 동안 가신들과 분란을 겪었고, 툭하면 터지는 '잇기'라는 농민들의 반란도 골칫거리였는데, 이번 '폐번치현'으로 경제적, 정신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어서 매우 협조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 3가지 이유에는 포함되지 않으나 눈에 안 보이는 이유가 더 있다면, 1868년 보신전쟁때 신정부에 저항하였던 '도후쿠' 지방의 여러 번들을 제압한 후 '기도 다카요시' 등 신정부 인사들이 그들을 지배하기 위해 '부현제' 등을 시행한 경험이 있어 치밀하게 준비한 때문일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유신 혁명파는 만일에 대비하여 강성 군인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대장으로 하여 사쓰마와 조슈 번 무사들 약 1만여 명으로 천황을 옹위하는 '친어군'을 편성하여 포진하였는데, 그 위엄이나 기세에 각 번주들이 눌린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당초의 '폐번치현' 계획은, 각 번을 그대로 현으로 재편하여 3부 302현이 존재하는 것이었으나, 이후 영토 조정 등으로 3부 72현 (1871년)으로 재편하였다가, 다시, 1889년에 현재와 같은 ‘3부 42현’ 체제가 정립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기도 다카요시’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일본 제국의 수도를 ‘교토에서 에도(도쿄)’로 옮기는 책임과 함께, 중앙 정부에서 임명된 지사들이 각 현을 다스리도록 작업하였다.
이번 조치로써, 무인들에 의해, ‘헤이안’ 시대 후반부터 ‘카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 그리고 전국시대와 ‘에도’ 막부를 거치는 약 700여 년간의 쇼군 통제하에, 번을 국가처럼 생각하던 번 중심의 지방 분권적 체제에서부터, 중앙 정부가 각 지역에 대한 모든 행정을 직접 관할하게 되었으니, 이 ‘폐번치현’이야말로, 과히 '근대화'를 향한 메이지 유신의 최대 개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기도 다카요시’ 등은, 그 여세를 몰아 1873년 조정대신 ‘이와쿠라 도모미’를 설득하여 번청이 소재한 각 성을 ‘폐성령(閉城令)’으로 허물며 마지막 봉건제의 잔재마저 일소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하자, 다이묘(번주)들의 권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전국에 소재한 각 번의 400여 개 성을 허물었지만, 그래도, ‘1국 1성’ 령(1615년)으로 각 번청이 소재한 170여 개의 성은 용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쿠가와 (에도)’ 막부를 타도한 유신 정권은 260여 년이 후, 1871년 8월에 전격적으로 ‘폐번치현’을 단행하고, 전국의 성곽을 일본 육군이 관리하게 하고, 육군은 필요에 따라 보존할 성과 폐쇄할 성을 구분하였다 (폐성령, 1873년). 이 조치로 번주들의 성은 대부분 허물어 버려져 현재는 18개 정도의 성이 남아있다.
'폐번치현'이 진행된 '조슈'의 예를 들면, 비록 지리적으로 다소 외진 마을이지만, 삼각주 지역으로 바다와 산을 등진 천혜의 방어지역인 ’하기‘에 1604년 성을 구축하고 본거지를 두었지는 데(하기성을 건축한 모리 조상 ‘모리 데루모토’), 막부 말기 당시 인구는 5만, 쌀 석고는 약 37만 석이었다, 그러나, ‘하기성’과 성내의 번청은 ‘폐번치현’으로 해체되고, 행정의 중심인 현청은 ‘야마구치’ 시로 옮겨갔다. 그리고, '모리'가는 시모노세키로 이주하였다. 이로써, 조슈번은 역사에서 사라졌고, 현재의 '하기' 시는 인구 15만 정도의 중소형 도시로 남아있다.
하지만, 유신 정권은 이 과정에서도 번주들에게 강압과 당근을 함께 제시하였다. 유신 정부는 1869년, 영국 등 서구의 귀족제도를 본떠 '화족' (공작, 백작, 자작, 남작, 후작 등)이라는 귀족 제도를 만들어, 폐번치현처럼 어려운 지시에도 천황의 지시에 순응하였던 조슈 번주 ‘모리’ 가에는 ‘이노우에 가오루’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천황이 '공작'직을 부여하였고 ‘시모노세키’ 시 인근에 거대한 저택을 하사하였다. 또한, 사쓰마번도 1871년 폐번치현으로 ’ 가고시마‘현이 되었지만, ’시마즈‘ 가문 역시 1884년 메이지 천황의 화족령에 의거, 세습 '공작'이 되었다. 이들 이외에도, 약 400여 개 가문도 세습 귀족을 부여받아 '귀족원'이라는 이름으로 의회의 일부로서 1947년까지 존속되다가, 다른 국가의 상원 격인 '참의원'으로 계승하여 운용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