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주요 각료 반 정도가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약 2년 정도 자리를 비웠지만, 사절단과 동행하지 않고 도쿄에 남아있던 소위 ‘잔류 정부’의 책임자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행적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및 ‘이와쿠라’ 우대신과 함께 그들이 출국하기 전에 맺은 12개 약조를 무시하고, 임의로 각 번당 1명씩이던 ‘참의’ 숫자를 일부 번에 더 할당하였을 뿐만아니라, 남아있는 동안 대표적인 서양통인 ‘이노우에 가오루’ 등과 함께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여, 외국인 고문단과 기술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관제개혁, 징병령 등 민감한 문제는 물론, 근대적 학제 도입, 국립은행 설립, 양복착용, 태양력 도입, 서양식 회계제도, 진료소, 전신선, 가스등, 노동 적립금, 기독교 금지 해제 등등 많은 정책을 도입하였다.
그런데, ‘사이고’의 12개 약조 무시는 ‘이와쿠라’는 물론, ‘오쿠보’나 ‘기도’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징병령’(1873년)이 문제가 되었다. 사무라이들은 유신 정권을 위해 ‘보신전쟁’에서 함께 싸웠고, ‘양이’를 위해, 서양과의 조약을 체결한 막부를 타도하였는데, 새로운 유신 정부가 사무라이를 우대하거나, 서양을 쫓아내기는커녕 막부보다 더 강력하게 개화정책을 추진하며 자신들을 홀대하였을 뿐 아니라, 조슈번 출신들이 주도한 ‘징병령’까지 ‘사이고 다카모리’가 묵인하자 ‘가고시마’ 출신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사실, ‘징병령’ 등 메이지 정부가 ‘서양화’를 내세우고, 각종 개혁정책을 추진할 때, 가장 큰 장애물은 기존의 봉건제도와 사무라이들의 기득권 문제였다. 특히, 이런 문제가 나올 때마다, ‘사무라이에 의해 탄생된 정권이 사무라이를 배신한다’라며 사무라이에 동정적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무라이와 관련되는 개혁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동안, 그렇지않아도 12개 약조 무시로 ‘사이고 다카모리’에 섭섭하던 ‘오쿠보 도시미치’, 그리고 ‘기도 다카요시’ 등 권력의 중심에 있던 세 사람 사이에 개혁의 속도와 방향에 대해서 조금씩 이견이 생겼다.
막부 타도 이후 유신 정부가 ‘징병령’으로 군사제도를 바꾼 것은, '조슈-막부' 전투에서 ‘다카스기 신사쿠’가 이끈 농민군 ‘기헤이타이’(기병대)가 눈부신 활약을 펼쳤고, 훗날 ‘일본군 군대의 아버지’라는 ‘오무라 마스지로’와, '기헤이타이' 대장으로 훗날 두 차례 총리를 역임한 ‘야마가타 아리모토’ 같은 군인 출신들이 평민 군대의 우수성을 확신하였고, 조슈번 군대를 재구성하여 참전한 ‘보신전쟁’에서도 성과를 거둔 탓이다. 다만, 보신전쟁 간 일부 전투에서 보듯, 신식 총기로 무장한 평민군은 무사 집단과의 단병접전에서는 그들의 칼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칼에 대한 자신감과 더불어, 전사(戰士)로써 오랜 관행에 젖은 사무라이들은 ‘평민 나부랭이’와 함께 전우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큰 불만을 토로했다. 전국시대, 막부시대를 거쳐 유신에 이르기까지 지배계층인 사무라이들의 사회적 대우는 일반인들보다 훨씬 높았다. 예컨대, ‘요시다 쇼인 (하급 무사)’이 ‘아시가루 (농민군)’출신인 ‘가네코’와 함께 밀항을 시도하다 체포되자, 이들이 수감된 감방은 신분에 따라 달랐고, ‘사무라이’ 감방과 달리, 건장하던 ‘가네코’가 몇 달 만에 죽어 나갈 정도였던 ‘아시가루’의 감방은 처우면에서 크게 열악하였다.
그런데, 이런 사무라이들의 불만은 엉뚱한데서 불이 붙었다. 1872년, 당시 메이지 정부가 ‘천황’이라는 용어와 자체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조선과 선린외교를 한다며 이를 조선에 통보하자, 조선이 “일본 왕이 무슨 황제냐?”라며 이를 수용하기 거부하며 일본과 외교적 갈등을 빚으며 문제가 되었다. 끝까지 천왕을 무시하는 조선의 태도에 분개한 사무라이들은 ‘일본을 무시하는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라며 ‘정한론’을 외쳤다. 번 체제 폐지로 실업자 신세로 생계에 위협을 느꼈던 사무라이로서는, 전쟁이야말로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일깨워주는 일이었다.
당시, 일본의 주요 국가사는 태정대신과, 좌대신, 우대신 그리고 참의(각료) 등 '태정관 3직'에서 결정하여 천황에게 건의하는 방식이었다. 태정대신 '산조'는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한론'이 정책적인 이슈가 되자 우선, ‘명분이 약하다’라며 결정을 미루고 해외순방 중인 '이와쿠라'에게 연락하였다. 그런데, 조정의 주요 고관들이 회의론으로 일관하였지만, '참의' 중 육군대장과 근위도독(경호실장)을 겸임한 최고 실력자인 '사이고'가 '조선에 항의하는 사절을 파견하자'고 주장하자 많은 '참의'(각료)들이 동조하여 팽팽한 분위기였다.
겉으로 보면 군대 파병보다는 사절 파견이 훨씬 온건적이지만, '사이고'의 속셈은 파병이었다. 하지만, 메이지 천황은 설령 파병을 하더라도 소규모로 파병을 염두에 둔 듯하다. 우선, '초량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육해군 약간만 파병했다가, 유사시에 구슈 병사를 대규모로 파병한다는 생각이었다. 즉, 메이지 천황의 제안은, 군대를 보낸다고 해도 형식적으로 초량 왜관에 보내자는 것이고, 사절을 보낸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사절을 보내자는 것 뿐으로, 어느 쪽이든지 전쟁 발발의 가능성은 적었다. 그런 판단으로, 메이지 천황은 소규모 파병 안과 사절단 파견 안을 각료들에게 제시하고 그중에서 하나를 고르게 하였다.
사이고는 바로 그 점이 불만이었다. 그는 조선과의 전쟁, 그것도 대규모 전쟁을 원했다. 큰 전쟁을 일으키려면 그에 합당한 명분이 필요한데, 그럴려면, 소규모 파병보다 사절 파견이 유리하다는 게 사이고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천황의 칙명은 어느 쪽이 좋은지 논의하라지만 둘다 전쟁 기피에 무게를 두고 있어 보였다. 아마도, 집권한지 얼마 되지않았고 그 사이 '보신전쟁'도 치렀으니 조선과의 전쟁을 바라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칙명에 따라 개최된 회의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신을 조선에 사절로 보내면 조선은 필경 자신을 죽일 것이니, 자신을 희생물로 삼아 조선과 전쟁을 해라’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가뜩이나 불만에 찬 사무라이들의 불만 배출을 위한 ‘전쟁의 명분’으로 자신의 '목숨을 미끼로'로 내놓은 것인데, 이게 이른바,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이었다. 그러나, 1872년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는 조선을 쉽사리 굴복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일본 국내 수뇌부가 이러한 정치적 문제가 격론이 이어지자, 이 소식은 거의 2년여 동안 해외를 떠돌던 ‘이와쿠라’ 사절단에게 알려져, 우대신 '이와쿠라'는 ‘오쿠보’ 등 고위관료와 급거 귀국하여 ‘사이고’를 말리고, 천황에게 ‘사이고’의 조선 특사 파견을 취소시키고 ‘정한론’을 중지시키도록 건의하였다. 하지만, '사이고'의 주장은 완강했다.
이때 중재의 수완을 발휘한 사람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는 태정대신 '산조'를 칭병으로 잠시 물러나게 하고, 그 자리에 우대신 ‘이와쿠라’가 태정대신 직을 대행하면, '이와쿠라'의 안을 천황에게 올릴 수 있다고 건의한 것인데, 그의 안은 적중했다. 아마도, 천황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이와쿠라' 안을 내각 건의사항으로 바로 받아들였다. ‘오쿠보’는 사절단으로 함께 다니는 동안에도 영어도 잘하고 수완이 뛰어난 ‘이토’를 눈여겨보았고, ‘이토 히로부미’가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보며 그를 더욱 총애하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으로 급진개혁론자였던 ‘기도 다카요시’의 입장이었다. ‘기도’의 본심은 ‘조선을 치지 말아야 한다’가 아니라, ‘우리의 우월한 국가정책을 그 땅에 베풀기 위해’ 조선을 치긴 쳐야 하나, 아직은 때가 아니니, ‘사이고’ 주도로 하지 말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1869년에 처음으로 ‘기도’가 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의 말처럼 ‘정한론’을 주장하였을 때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반대했었다. 이를 보면, ‘정한론’은 조슈와 사쓰마 두 세력 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서로 상대 의견에 반대한 듯하다.
어쨌든, 그간의 급진 강경론자의 모습을 보였던 '기도 다카요시'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세계 각국을 다녀온 후, '정한론' 등 ‘해외 팽창주의’를 내세운 강경파 ‘사이고’와 달리, 안정된 정치체제 수립을 위한 ‘제국 의회 개설’ 등 ‘내치 안정’을 제일의 목표로 삼을 정도로 바뀌고 있었다. 역시,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 조슈 출신으로서 '기도'를 추종하던 '이토 히로부미'도 급진적 인사였지만, '정한론'에 대해서는 역시 '아직은 아니다'는 입장이었다.
‘정한론’ 논쟁에서 급진개혁파인 ‘기도’가 ‘오쿠보’에게 동조하므로서, 그들은 싸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협력할 때는 협력한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실, ‘기도’는 유연해지기는 했지만, 자신을 따르는 개혁파인 ‘이토 히로부미’ 등과 함께, ‘팽창주의’와 관련된 사안에서 개혁의 방향이 달랐던 ‘오쿠보 도시미치’ 세력과 자주 경쟁하고 충돌하였다. 특히, ‘기도 다카요시’는 1874년 ‘오쿠보 도시미치’가 ‘싸우고 싶어하는’ 사무라이들로 하여금 ‘정한론’ 대신 ‘대만을 침략하는 것’에 대해, “지금 일본에게 요구되는 것은 해외팽창이 아니라, 경제건설과 교육, 그리고 정치 안정이다”라고 반대하며 정권을 떠났다.
하지만,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메이지 정권에 반란을 일으키자, '기도'는 “수구세력이 개혁을 저지하려 하면, 언제든 신속하게 협조체제를 구축하여야 한다”며, ‘오쿠보’에게 협조하였다. ‘오쿠보’도 이를 계기로 정권을 떠났던 ‘기도’를 다시 불러 국정을 함께 하였다. 삼인 삼색의 권력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협조체제는 점차 '사이고'를 배제하게 되었고, 이 둘의 협조는 메이지 정부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오래전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쇼군으로 옹립하는데 실패하자, 막부의 수배령을 피하여 외딴섬에 숨어 살아야 했다. 몇 년 후, 새로운 사쓰마 번 주 ‘시마즈 히사미스’의 부름을 받아 다시 정계로 나왔으나, 이번에는 자신을 구해준 번 주의 정치적 질문에 너무나 직설적인 조언으로 답변하는 바람에 또 미움을 사서 재차 유배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후 ‘히사미스’가 조슈와의 대립으로 다시 인물이 필요하게 되자, 죽마고우인 ‘오쿠보 도시미치’가 외딴섬에서 유배 중이던 ‘사이고 다카모리’를 추천하여, 그는 다시 사쓰마의 군권을 쥐게 되었다. 그리고, 사쓰마 번이 개입한 각종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며 이름을 날렸고, 메이지 유신과 막부 잔재 토벌의 일등공신으로서 '육군 대장'이라는 신분과 함께, ‘유신 정권’의 핵심 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앞서의 ‘정한론’이 야기된 데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관직을 내려놓고, 사쓰마 출신 부하 사무라이들과 함께 ‘가고시마’로 철수했다.
비록, 실패하였지만, ‘사이고’는 ‘정한론’으로 오히려 수많은 사무라이의 존경과 우상의 대상이 되었고, 그가 돌아온 사쓰마 번은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을 정도로, 거의 반독립국가가 되었다. 뿐만아니라, 중앙에서 파견한 현령이나 그 하부 관리들도 모두 ‘사이고’의 수하여서 실질적인 모든 행정과 군사력은 ‘사이고’의 손에 있었다. 그는 현청의 예산으로 독자적인 군대를 만들고, 조직을 정비하여 ‘사이고’ 왕국을 만든 셈이다.
당시, 전국의 사무라이들은 ‘사이고’가 봉기하면 그를 따라 사무라이 정권을 만들어 서양세력의 축출은 물론, 서구화의 개혁마저 ‘모조리 뒤집어 버리자’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오쿠보’와 의견 차이로 ‘가고시마’로 낙향한 ‘사이고’는, 사립학교를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며 소일하다가 “메이지 정부의 방향이 맞는데도, 따르는 사무라이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들을 설득해 나가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사무라이들의 거병 요구가 점차 거세어지자, 거병을 고민하였지만, ‘사이고’의 고민은 거병의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1877년 초, 정부의 밀정이 ‘사이고’의 동향을 염탐하는데 격분한 일련의 사쓰마 사무라이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가고시마’ 탄약고를 탈취했다. 탄약 탈취가 의도적인지 모르겠으나, ‘사이고’로서는 이제 정부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사이고를 따르는 사쓰마 사무라이들은 ‘사이고가 일어나면, 전국의 사무라이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리라’라고 확신했지만, 더 이상의 추종자 봉기는 없었다.
거병 이후, ‘사이고’가 2만여 명의 병력으로 전략적 요충지인 ‘구마모토’ 성으로 진군하자, 메이지 정권의 핵심인물로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죽마고우였던 ‘오쿠보 도시미치’는 즉각 정부군을 파견하여 일대 접전을 벌였다. 당시, ‘사이고’의 군대는 전쟁에 특화된 사무라이들이었고, 정부군 군대는 농민 등 평민 출신으로 3년 정도 근무하는 징병제 군대였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이미 전투의 양상이 바뀌었다. 사무라이들은 평민을 얕보았지만, 전쟁의 낌새를 눈치챈 정부군은 미리 대량의 무기를 빼돌렸다.
결국, 얼마 안 되는 한물 간 '미니에' 전장식 소총과 ‘사무라이’라며 허세를 부리는 칼로는, 정부군의 신식 '스나이더' 후장식 소총을 당할 수 없었다. 결국, ‘사이고’ 군대는 ‘구마모토’ 성 공략에 실패하며 퇴각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불과 반년 후, ‘사이고’는 남은 병력 약 400여 명으로 동굴에 은둔하며 끝까지 저항하다,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자 사무라이다운 할복 자살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른바, ‘라스트 사무라이’의 최후였다. 이후, 일본에서는 더 이상의 내전은 없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메이지 정부의 ‘반 사무라이 정책’ (개명정책)에 반대하는 사무라이들을 위해 함께 명백하게 천황을 옹위하는 메이지 정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가, 동네 죽마고우였던 ‘오쿠보 도시미치’의 관군에게 진압당하며 자결한 반란군 수괴임이 분명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메이지 천황은 그의 충성심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천황뿐만 아니라, 많은 일본인은 사후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는 등 매우 관용적이었을뿐 아니라 오히려, 메이지는 1889년, 일본제국 헌법이 발효될 때, 그를 사면하고 작위도 내렸다.
이는 아마도, ‘사이고’가 서양과 서구화를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사무라이들과 함께 일본의 전통을 지키려 하였다는데 대한 공감대 때문일 것이다. 사실, 많은 일본인은 메이지 유신이 '서구화'로 향하는 것이 국가의 생존전략이었음을 잘 알면서도, '서구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느꼈던 일본의 정체성과 민족적 상실감을 ‘사이고’를 통하여 조금이라도 상쇄해 보려고 한 마음이 있어서 '사이고'를 더욱 추모하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적인 공감대 때문인지, ‘사이고’ 의 정한론은 비록 저지되었다 하더라도, 그의 행위는 더욱 미화되어 후대에 계승되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의 완성'을 추구하던 일본이 끊임없이 시도하였던 ‘조선 병합’도 ‘사이고 다카모리’에 의한 ‘정한론’이 큰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