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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Feb 14. 2023

'권토중래'의 꿈 - '이슬라마바드'

어느 군사 외교관 이야기 (인디아-파키스탄 유엔 평화유지군, 제13화)

'카슈미르' 실지회복에 올인하는 파키스탄

미국과 중국을 오가는 파키스탄의 '양다리 걸치기' 외교

새로운 계획도시 '이슬라마바드'

테러위협이 상존하는 '이슬람의 도시'

이슬라마바드 자매도시, 옛 수도 '라왈핀디'



'카슈미르' 실지회복에 올인하는 파키스탄

'권토중래'(捲土重來)의 뜻은 '어떤 일에 실패한 뒤 힘을 쌓아 다시 그 일에 착수한다'는 뜻으로, 군사적으로 보면, '한 번 패하였다가 세력을 회복하여 다시 쳐들어간다'는 의미다. 1948년, 1965년, 1971년 3차례의 인-파 전쟁에서 인디아는 정국을 유리하게 이끌었고, 실질적으로 '카슈미르'의 주요 지역을 확보했다. 


그렇지만, 3차례의 인-파 전쟁은 단순한 인디아와 파키스탄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미국과 소련, 그리고 중국과의 힘에 의한 국제질서 원리가 작동하였다. 예컨대, 1948년 1차 전쟁 이후, 파키스탄이 미국과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자, 인디아는 아시아-아프리카 비동맹 주의를 내걸며 미-소 간의 냉전에 중립적이었다. 하지만, 1959년 중-소관계 파탄을 계기로 소련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인디아에 접근하고, 중국의 티베트 합병이 이어지자, 가뜩이나 제3세계 국가들의 주도권을 잡으려던 인디아와 중국은 더욱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벌어진 1962년 중-인전쟁에서 인디아가 참패하자, 미국과 소련은 중국을 적극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중국은 일방적인 휴전을 선언하고 점령지를 내놓고 철군하였다. 그러나, 중국에 패한 인디아의 위상은 제3세계 맹주로서 자존심을 구겼다. 한편, 친미 중립정책으로 전쟁의 추이를 지켜보던 파키스탄은 중국과 밀월관계로 전환하였다. 이로서 인디아는 중-인 전쟁 이후, 중국-파키스탄이라는 적대국 연합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1965년, 인디아를 과소평가한 파키스탄은 중국으로부터 무기와 전술지원 등을 받으며 제2차 인-파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주요 전선에서 패퇴한 파키스탄은, 이슬람과 힌두교의 갈등으로 빚어진 '카슈미르' 분쟁에서 많은 요지를 빼앗겼다. 


영토를 빼앗긴 파키스탄은 전 세계 이슬람 국가들과 연대하여 '카슈미르' 실지를 회복한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 '이슬람'을 정치적으로 끌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의지의 대표적인 것이 '카슈미르'와 근접한 파키스탄 북동부 지역의 대도시로서 1967년까지 잠정적인 수도였던 '라왈핀디'근교에 '이슬라마바드'(이슬람의 도시)라는 새로운 계획도시를 건설계획이었다. 


한편, 파키스탄을 패배시킨 인디아는 제2차 인-파전쟁의 중재자였던 소련(구 러시아)과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1971년, 동파키스탄이었던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자, 파키스탄 군이 강경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난민이 인디아로 유입되었다. 이에, 인디아가 동파키스탄 독립을 위해 개입하자, 제3차 인-파전쟁이 벌어졌다. 인-파 전쟁은 유엔의 중재로 양국 점령지를 따라 '통제선'을 설치하고 유엔 감시하의 정전체제로 전환하였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카슈미르'에서는 분쟁이 빈발하였는데, 이는 파키스탄의 충동이나 지원 때문이 아니라, 인디아의 원주민 포용정책 실패에 따른 무슬림의 반발이 주원인이었다. 


미국과 중국을 오가는 파키스탄의 '양다리 걸치기' 외교

그런데, 이들 반인디아 테러 단체들은 파키스탄 내 일부 군부는 물론, 미국이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외치며 뒤쫓던 '오사마 빈 라덴'과도 연계되게 된다. 2011년, 미군은 이슬라마바드 북동쪽 56Km 지점엔 '아보타바드'에서 '빈 라덴'을 사살하였다. 이곳은 파키스탄 군의 주요 시설과 육군 사관학교가 있어 많은 군 간부가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그가 은거할 수 있었을까? 파키스탄 군 간부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한 대가로 파키스탄에 대한 핵 개발 제재를 풀어 주었지만, 파키스탄이 말로만 미국의 동맹으로서 '테러와의 전쟁'에 나서고 있었음이 입증된 사례로 보인다.


이 같은, 파키스탄의 외교적 '양다리 걸치기'는 핵과 미사일 개발 사례에도 등장한다. 1974년 핵폭탄을 실험한 인디아와 경쟁하던 파키스탄은 1998년 5월 핵폭탄 실험에 성공하였다. 농축우라늄을 사용한 방식이었다. 당시, 북한 핵은 영변 발전소에서 재처리된 플로토늄을 이용한 핵폭탄 방식이었는데... 미국의 의혹 속에 핵 개발자 칸 박사는 2004년 2월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북한과 리비아, 이란에 핵 기술을 판매하였다고 시인하였다. 2012년 인디아는 '아그니' 탄도미사일 발사에 성공했다. 파키스탄도 이에 질세라 2015년 지대지탄도미사일 '샤힌-3' 시험 발사 성공을 공표했다. 국제사회는 파키스탄과 북한과의 기술 교환에 의혹을 가졌다.


한편, 미국의 태평양 정책은 '인도-태평양' 정책으로 인디아를 중국 포위의 전면에 내세우려 하였다. 인디아가 외교면에서는 독자노선을 천명하긴 했지만, 미국과 동조로 얻는 이익은 외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 '퀴드'인데... 이에,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파키스탄은, 오히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을 적극 수용하여 중국으로부터 인도양 항구도시 '카라아치'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등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이를 보면, 미국과 파키스탄의 관계는 서로의 모순을 인정하며 공생하는 묘한 모습이다.  


새로운 계획도시 '이슬라마바드'

이슬라마바드의 '파이잘' 모스크

1971년 제3차 인디아-파키스탄 전쟁에서 패전으로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여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겪었지만, 파키스탄은 내륙지역 개발과 인디아가 점유하고 있는 '카슈미르'지역을 되찾겠다는 꿈을 안고 인구 100만여 명 규모로 건설한 신도시로 1974년 행정수도를 이전하였다. 


1969년 9월, 이슬람 국가를 결속시키는 큰 사건이 된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의 성지인 '알 아크사' 사원의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이 모스크 방화에 격분한 전 세계에서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57개국은 '이슬람 협력기구'(OIC)를 창설하고 회원 간의 결속을 다짐하였다. '이슬람의 도시'라는 신도시 '이슬라마바드'의 핵심적인 상징물은 4개의 첨탑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파이잘' 모스크이다. 이 '파이잘' 모스크는 '이슬람의 도시'라는 이름과 더불어, 창설된 OIC 회원국들과 '이슬람 연대'를 바라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이슬라마바드 '쇼핑 몰'과 도심. 큰 도로는 '진나' 에비뉴. 저 멀리 산아래 '파이잘' 모스크가 보인다. 

'이슬라마바드'는 녹지가 많다. 그리고, 여느 서남아 도시와 달리 계획도시답게 큰 도로들을 좌우로 가로로 1~10의 10개 구역, 세로로 A~J의 10개 구역 등 100여 개 섹터에 인구 100만여 명이 거주한다는 목표로 설계되어, 각 섹터별로 각종 주거지가 있고, 섹터 중앙에 상업지구가 형성되어 있다. 


예컨대, '진나'(초대 수상 이름) 거리를 중심으로 좌, 우측에 F-6, F-7로 갈리는데, F-6 섹터의 주요 상가는 '슈퍼마켓'(우리나라의 개별 상점과는 의미가 다르다)이라는 상가에 잡화류 등 온갖 가게가 입점하여 영업한다. 길 건너 F-7 섹터도 같은 식이다. 다만, 같은 고급 빌라라도 F-6, 7, 8 등 섹터별로 집세가 비싸거나 주거 여건은 조금씩 다르긴 하다. 


유엔평화유지군 인디아-파키스탄 정전감시단은 1971년 전쟁 이후 설립되어, 본부는 당시까지 임시 수도이던 '라왈핀디'에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유엔은 '라왈핀디'지역이 테러위협이 농후하다며 전 직원에게 교통편의를 제공하며 '이슬라마바드' 거주를 강력히 권고하였다. '라왈핀디'에서 이슬라마바드까지는 차량으로 20~30분 거리이다. 필자도, 이슬라마바드에서 F-8 섹터 내 가정집 빌라의 2층을 월세로 빌려서 생활하였다. 집들이 굉장히 크고 가구도 잘 구비되어 있지만 상대적으로 매우 저렴한 편이다. 월세 집은 부동산을 통하여 거래하는데, 복비는 1개월분 치 월세로 전액 임대인이 부담한다.  


참고로, (주)파키스탄 한국대사관의 건물은 넓고, 크고 으리으리하다. 대사관저도 함께 딸려 있는데, 매우 잘 지었다. 필자가 근무하였던 이집트의 대사관저는 전 세계 대사 관저 중에서 가장 크다는 평을 받았다. 이런 걸 보며 가끔씩, '아니 외교관에게 왜, 이런 대우를...?'이라고 의문을 표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사 개인의 집이 아니다.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일수록 고위층 부자들은 훨씬 더 으리으리하다. 대통령 특명전권 대사로서 이들을 관저 만찬이나, '한국의 날 행사' 등에 초청하는 등 여러 모습으로 상대해야 하기에 요구되는 수준이다.     


이슬라마바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마갈라 힐스'로 올라가는 구불구불한 도로

'이슬라마바드'의 주거여건은 좋으나(?) 기후는 매우 덥다. 하지만, 아무리 더운 곳에 살더라도 찾아갈만한 지역이 있으면 좋을 텐데... 다행히, 이슬라마바드 근교에는 국립공원이 있다. 도심에서 산을 오르는 구부구불한 산길을 자동차로 30분 정도 올라가면 '마갈라 힐스'라는 국립공원에 도달한다. 여기에서는 이슬라마바드 전체가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볼 수 있다. 산 아래에는 '파이잘' 모스크가 있고... 그리고, 유명한 맛집도 있다. 산 아래에 펼쳐진 도심 야경을 바라보면서 즐기는 식사는 아주 일품이다.  


테러위협이 상존하는 '이슬람의 도시'

이슬라마바드 '메리오트' 호텔

이슬라마바드는, 대통령과 정부 관료, 그리고 각국 외교사절이 몰려사는 수도로서 도심에 대한 경비는 당연히 삼엄하다. 하지만 이슬라마바드라 해서 테러로부터 완전히 안전한 지대는 아니다. 2008년 9월에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이슬라마바드의 특급호텔 '메리오트'에서 자살차량 폭탄테러가 발생하여 40여 명 이상이 죽고 수 백 명이 부상당하였다. 그 소식을 보고서 필자도, 가끔 애용하던 곳이라 가슴을 쓸어내렸다. 뿐만 아니라, 교회 건축이 불허되는 곳이라 한인 기독교인들은 미국인 구역 내의 교회를 빌려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도 미국인들이 예배 보는 도중 수류탄 투척 테러가 발생하여 수 명이 사상하였다. 파키스탄의 치안은 안정적으로 보이나 테러위협은 일상이다. 


당시, 유엔임무단 안전관은 캐나다공군 소령 출신 여성 직원이었는데, 안전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철두철미하여, 유엔군 본부 인근 '라왈핀디'지역에서 조금이라도 군중 데모나 테러위협 정보가 있으면, 출근은 커녕 아예 집밖으로 못 나오게 하여 수시로 유급 결근을 하였다. 덕분에, 필자가 있는 동안 한 건의 안전사고도 없었다.  


이슬라마바드 자매도시, 옛 수도 '라왈핀디'

차와 사람이 넘치는 복잡한 '라왈핀디' 도심 전경 

이슬라마바드에서 약 20Km 떨어진 수도권 도시로, 인구 약 200여만 명의 '라왈핀디'는 1959년 이후 약 10여 년간 파키스탄의 수도로서 역사가 오랜 대도시라 각종 역사적 유물이나 군사기지도 많다. 비록, 오래된 도시이지만 일국의 수도였을 정도로 많은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인구가 밀집하여 넘치는 지역이라 인프라가 인구수를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도심의 오래된 건물들은 불교양식과 이슬람 양식 그리고 영국 식 등이 혼재하여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지만 도시 전체는 슬럼화된 편이다. 그럼에도, '이슬라마바드'에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사는 베드타운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서 테러위협은 더욱 심각하다. 한때, '라왈핀디'는 우리 외교부의 여행 경보 3단계 적색경보 지역으로 '철수권고' 지역이었다. 하지만, 2018년 7월 파키스탄의 총선 이후 전 지역의 치안상황이 전반적으로 호전되고, 특히, '라왈핀디'가 있는 펀잡주에서 군경 대테러 작전을 지속적으로, 대대적으로 진행한 결과, 2018년 11월부로 이 지역에 대한 여행경보단계는 2단계 황색경보(여행자제)로 하향 조정되었다. 


구도시 '라왈핀디' 이면 도로 풍경. 경찰관의 모습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소득 수준이 낮은 서민들이 몰려 사는 곳은 비록, 주거여건은 열악하지만, 물가는 매우 저렴한 곳이 많다. 그러다 보니, 가끔 유엔군 장교들도 은행, 환전상은 물론, 생필품 구입을 위해 이면도로에 있는 상점 등을 방문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하지만, 유엔군 안전관은 '가게 앞에 총을 든 사설 청원경찰이 지키고 있더라도, 이들을 믿고 그런 지역에 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라고 매일같이 반복해서 강조하였다. 누구 하나 납치라도 되거나 폭탄테러에 희생되면 국제적인 문제가 되니까.. 실제로, 얼마 전 '라왈핀디' 인근 '페샤와' 지역 모스크에서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하는 등 테러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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