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24년 11월호) 194호
플라이두바이의 웹사이트에 있는 '이스라엘 관광 가이드'에서는 특히 이스라엘 요리로 후무스(병아리 콩 퓌레), 팔라펠(병아리 콩과 잠두로 만든 튀김), 므사바하(후무스의 변형)와 같은 "맛있고 정통적인 미식"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음식들은 팔레스타인과 레반트 지역의 전통 요리로 널리 알려져 있다. 28쪽
팔레스타인 박물관(1920-1948)은 즉시 록펠러 박물관으로 개명되었고 정부 산하 기관의 감독하에 놓였다. 추정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1967년부터 1992년까지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약 300만 개의 고고학적 유물을 압수했으며, 1995년부터 매년 약 12만 개의 유물을 추가로 압수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문화적 침해를 넘어,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정체성을 말살하고 이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고유한 권리를 주장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29쪽
문화적 탈취 전략은 의복 관습에도 영향을 미쳤 다. 팔레스타인의 전통 수제 의상, 특히 타트리즈(tatreez)라 불리는 자수예술은 수천 년 전 가나안 시대 에 레반트 지역에서 시작되었으며, 주로 농촌 가정에서 세대를 거쳐 전승되었다. 팔레스타인의 각 마을은 그 마 을 고유의 색상, 기하학적 무늬, 동식물에서 영감을 받은 다양한 디자인 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의 '약속의 땅'에 대한 '고유한 권리' 를 주장하며 이 의복 기술의 기원마저 자신 들의 것으로 돌리고 있다. 성경 시대에도 이미 이러한 자수가 사용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이스라엘 내에서 타트리즈는 점차 이스라엘 문화의 일부로 자리를 잡았다.
팔레스타인의 상징이 된 전통적인 케피예(keffieh) 스카프 역시 패션산업에서 이스라엘 것으로 변질되었다. 1936~1939년 아랍의 대규모 봉기 이후 팔레스타 인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케피예는 2016년 이스라엘 디 자이너 도리트 바로르(Dorit Baror)에 의해 여성복으로 재탄생했으며, 그녀의 부티크에서 고가로 판매되었다. 2021년에는 프랑스의 LVMH 그룹이 582유로에 이스라 엘 국기 색깔이 들어간 루이뷔통 케피예를 판매해 논란 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과 2005년부터 이스라엘 당국은 이 식물들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이유로 이들의 수확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과학적 연구들은 이러한 결정에 반대하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 자타르와 아쿠브는 이스라엘 농업 기업들에 의해 재배되고 있으며, 이들 기업의 주요 고객은 아랍 소비자들이다. 야생 자생 식물인 타임과 아쿠브를 불법으로 채집하는 사람들은 무거운 벌금에 처해질 수 있으며, 벌금을 지불하지 못할 경우 감옥에 갈 수도 있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24년 11월호) 194호
역사학자 일란 파페가 말한 바와 같이, FNJ는 진정한 "시온주의 식민화 도구"로 여겨지며, 1923년부터 1966년까지 FNJ를 이끈 요세프 바이츠는 '숲의 아버지'로 불렸지만, 동시에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추방을 주도한 '이주 위원회'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34쪽
오늘날 FNJ는 이스라엘의 주요 토지 개발 조직이며, 국가의 가장 큰 산림 관리 기관이기도 하다. FNJ의 초기 목표는 "유대인을 정착시키기 위한" 토지 확보였으며, 그 근거로 구약성경 레위기 구절(25:23)을 인용했다.
"땅은 영구히 팔리지 않는다. 땅은 내 것이다." 33쪽
시온주의는 19세기 후반 시작된 '유대민족주의 운동, 즉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국제정치운동으로 구체화되었으며, 이 운동의 결과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되었기에 시온주의자들은 현재 국제정치 영역에서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지지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시온주의자들은 '땅 없는 민족에게 민족 없는 땅을'이라는 슬로건을 광범위하게 내세웠지만, 이는 이미 수세기 동안 이 지역에서 살아온 원주민의 존재와 100만 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들의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온주의자들의 활동 결과 1948년 5월 '유대국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 건설되었고, 원주민 중 70% 이상이 고향에서 축출되면서, 현재 진행 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이 시작되었다.
1975년 11월 10일 유엔총회결의안 3379호는 1975년 7월 28일, 8월 25일에 진행된 다른 기구들의 결의 "점령지 팔레스타인의 인종차별 정권과 짐바브웨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권이 공통의 제국주의적 기원과 동일한 인종차별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존엄성과 진실성에 대한 억압을 목표로 하는 정책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시온주의자를 세계 평화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가장 엄중하게 비난하고 모든 국가들에게 이 인종차별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이념에 반대할 것을 촉구한다"를 직접 인용하면서 (중략)
29쪽 황해문화 124호
사실 프론티어의 본질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누군가를 타자화하고 폭력으로 구축하고 규율하는 것 아닌가. 08쪽
1) 공간의 공허화와 타자화
프론티어 정신은 특정 지역을 "미개척지"나 "무주지(no-man's land)"로 정의하면서,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야만적 존재"로 타자화한다.
예: 미국의 서부 개척 시기, 원주민을 몰살하거나 강제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문명화(mission civilisatrice)"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했다.
2) 문명의 진보 담론
프론티어 정신은 종종 문명의 확장을 위한 "필연적 희생"으로 폭력과 학살을 합리화한다. - 정복 당위성 제공
제노사이드의 실행자에게 "우리는 더 큰 선(greater good)을 위해 행동한다"는 자기 정당화를 제공한다.
예: 유럽 식민지 시기,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원주민 학살
3) 국가와 개인의 역할을 통합
프론티어 정신은 단순히 국가적 이념이 아니라, 개인(개척자)과 집단이 공유하는 정체성으로 확장된다. 제노사이드의 실행자들은 자신들을 단순한 "명령 수행자"가 아니라,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들"로 인식하게 된다.
4) 문화적, 역사적 지배의 연장선
프론티어 정신은 단순히 물리적 폭력을 넘어, 제노사이드 이후에도 문화적, 역사적 지배를 정당화하고 지속시키는 도구가 된다.
예: 나치 독일의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활권) 개념은 동유럽을 독일인의 프론티어로 간주하며 대량 학살을 정당화함.
1950년 3월 14일, 이스라엘 의회는 '부재자 재산법'을 제정하여 팔레스타인 난민 재산 몰수를 제도화했다.
1950년 7월 5일, 이스라엘은 기본법으로 '귀환법'을 제정하여 유대인의 이주 및 정착을 제도화하였다.
1970년에 수정되면서 '유대인 자식들과 증손들, 유대인 자식의 배우자와 유대인 증손의 배우자에게까지 귀환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A photo taken in April, 2016 shows a partial view of the Israeli settlement of Givat Zeev near the West Bank city of Ramallah. Photo: Thomas Coex/Agence France-Presse/Getty Images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항은 이슬람은 7세기 이후에 출현하였고, 「코란」 편집 및 이슬람교 창건 과정에서 유대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역사적으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귀환법의 인종 및 종교 갈라치기 규정은 어처 구니없는 것이다. 중요한 예를 들자면, 예언자 무함마드의 증조할머니 살마는 야스립(메디나) 거주 유대인이었던 카즈라즈-낫자르 부족 출신으로 증조할아버지 하심과 결혼해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할아버지 사 이바 빈 하심(압둘 무딸립)을 낳았다.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코란」 편집 책임을 맡았던 자이드 이븐 타빗 (610~660년) 역시 610년 야스립에서 태어난 카즈라즈-낫자르 부족 유대인으로 어린 시절 유대 교육을 받았다. 그는 11세에 예언자 무함마드 의 조력자가 되면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개인 통역사이자 서기로서 탁월한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코란」에 유대교 경전의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예언자 무함마드와 동시대 여성 누사이바 빈트 카 브도, 야스립에서 카즈라즈-낫자르 부족의 유대인으로 태어나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며 예언자 무함마드와 함께 625년 3월 23일 메디나 인근에서 벌어진 우흐드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메디나 출신의 카즈라즈-낫 자르 부족 대부분은 유대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이 개종자들은 예루살렘 정복전쟁에도 참가했으며, 현재 예루살렘에서 낫자르 부족과 누 사이바 부족은 무슬림 명문 가문이다. 역사적으로 유대인의 이슬람교로의 개종은 꾸준히 발생했다.
게다가 무슬림들과 마찬가지로 현대 유대인들도 역사적으로 개종을 통해서 형성되었다는 것이 이미 역사 연구를 통해서 드러났다. 역사 연구의 성과들은 현대 유대인들이 역사적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지역 단위로 대규모 개종을 동반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형성되어왔음을 알려주 고 있다. 서기 6세기에 아라비아반도 남부 지역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힘야르 왕국, 7세기에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베르베르인, 8세기 중반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카자르왕국 등은 현대 유대인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개종을 통해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1세기에 로마로부터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귀환한다는 귀환법의 전제는 개종을 통해서 현대 유대인들이 형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현대 유대인의 혈통을 구약성서에 나오는 고대 유대인 혈통과 연결시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2018년 7월 19일 기본법으로 '유대민족국가법'을 제정하면서 유대인의 주권과 우월성을 제도화하는 다음의 원칙을 명시했다.(중략)
46쪽 황해문화 124호 홍미정 교수
Israelis in Tel Aviv gaze at a wall covered with photos of Israeli hostages held by Hamas on Nov. 3, 2023. (Gili Yaari/NurPhoto via Getty Images)
특히 하마스에 의한 인간 방패의 악의적 활용, 안전지대로의 대피 사전 고지, 불가피한 부수적 피해 등을 이유로 하는 이스라엘 정부의 주장은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향한 파괴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며 기본적인 국제인도법 원칙인 필요성 및 비례성의 원칙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 비판하였다. 보고서는 마지막으로 제노사이드협약에 따른 대세적 의무를 준수하고 동시에 피해자 구제를 위한 국가책임 및 가해자 개개인의 형사책임을 완전히 물을 것을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촉구하였다.
하마스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가 국제인도법 및 국제인권법을 위반하고 국제형사법상 중대한 전쟁범죄 및 광범위한 성폭력을 포함한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러한 사실이 가자지구 내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일방의 범죄 사실이 타국의 범죄 행위를 정당화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63쪽 황해문화 124호 백범석 교수
회의록
기안84 왕성한 활동으로 돈을 많이 벌었지만, 티를 안 내려고 하는 것 같다. 계속 옛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보여준다.
곽튜브는 학폭 피해자 서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학폭 논란이 있는 이나은을 옹호해서 위선적이라고 비난 받았다. 곽튜브 비난 '유튜브 안 찍으면 우리와 다를 게 뭐야?'
정우성도 미혼모 캠페인을 했으면서 위선적인 행동을 했다고 비난 받고 있다.
HS
90년대에는 남 비난하는 게 터부시 되었고, "너나 잘해!" 남을 험담하면 안 되는 문화가 있었다.
반면 요즘 사람들은 화가 많다. 언젠가부터 남을 욕하는 게 쉬워졌다.
모피아(Mofia)는 재무부(Ministry of Finance)와 마피아(Mafia)의 합성어.
모피아는 주로 재무부 출신 관료들의 강력한 인맥 네트워크와 경제·금융 분야에 미치는 영향력을 비판적으로 지적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였다.
노무현 정부(2003~2008) 시절, 금융개혁과 재벌개혁이 주요 화두로 떠오르면서 재무부 출신 관료들의 금융권 진출 및 그들의 영향력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재경부 관료 출신들이 금융계를 좌지우지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모피아라는 표현이 널리 알려졌다.
이 용어는 당시 경제 관료들의 권력 독점과 관료-금융권 유착 문제를 비판하기 위해 언론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피아의 뿌리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재무부 관료들이 위기 극복 과정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경제 정책을 주도했고, 이후 퇴임한 관료들이 대거 금융권으로 진출하면서 이들의 네트워크가 강화되었다.
회전문 인사는 공직자나 고위직 인사들이 퇴임 후 민간 기업이나 공공기관의 고위직에 재취업하고, 다시 공직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하는 인사 관행을 비판적으로 지칭하는 표현이다.
HS
처칠은 벵골 대기근에 대해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정당화하는 발언을 했다. 처칠은 "인도인은 토끼처럼 번식하니, 기근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벵골 주민의 고통을 무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벵골 대기근이 심각해진 이후에도 처칠은 식량 요청을 거부하거나 지연시켰다.
벵골 지역의 곡물이 영국으로 빼돌려진 이유는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전쟁 물자 확보 필요성과 일본군의 침공을 대비한 전략적 차단이 주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처칠의 무관심과 식민 통치 정책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자연재해와 함께 전쟁 논리에 따른 식민지 수탈이 벵골 대기근의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뱅골 대기근의 공식 사망자 수(300만 명)는 보수적으로 추산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 피해는 공식 기록보다 훨씬 더 클 수 있으며, 기근의 여파로 인해 벵골 지역은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붕괴를 경험했다.
YH
우리생협 : 협동조합이 아니지만 협동조합처럼 이름 지었다. = 온라인에서는 오아시스이다. 우리생협 창립자가 IT 업계에서 일했고 물류시스템 어플리케이션 특화해 이를 가지고 시장에서 살아남았다.
HS
라나 플라자 사건은 2013년 4월 24일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 외곽 사바르(Savar) 지역에서 발생한 대형 건물 붕괴 사고로, 1,134명이 사망하고 2,5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은 비극적인 산업 재해이다.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의류 산업의 노동 조건과 안전 문제를 조명하게 만든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라나 플라자 사건은 단순한 산업 재해를 넘어, 글로벌 의류 산업의 비인간적이고 착취적인 구조를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단순한 기업과 정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저렴한 제품을 소비하는 전 세계 소비자들이 이 구조에 어느 정도 공범이 될 수 있음을 일깨워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