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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령 Oct 16. 2024

2장 전쟁

3화  도깨비 터에 지은 집



연월리 마을 어귀로 한 남자가 들어선다. 오래 빗질을 하지 않은 더벅머리에 엉성한 바느질 자국이 고스란히 드러난 떼 묻은 솜저고리와 흙물 든 잠뱅이를  걸친 비렁뱅이다. 폐허 같은 얼굴은 억새 수염에 파묻혀 이목구비 흔적만 남았으나 우물처럼 깊이 파인 검은 눈동자에서 솟아오르는 눈빛은 맑고 스산하다.  


남루한 복장의 남자는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새암으로 달려가 물이 흘러나오는 출구에 머리를 박고 물을 마신다. 아무리 마셔도 해갈이 되지 않는지  물줄기에서 입을 떼지 못한다. 오랜만에 어미를 만난 새끼가 배를 다 채우고도 빈젖을 놓지 못하듯 남자도 새암의 젖줄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 같다. 물을 목 뒤로 넘길 때마다 목 울대가 위에서 아래로 부지런히 움직이며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뭔가를 꼭꼭 찍어 누르는 듯하다.  


양길의 밥을 챙겨주고 쑥을 뜯으러 나온 원천색이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 천천히 다가가 귀신에게 말을 거는 듯 마른 입술을 겨우 뗀다.


"누... 누구여?"


남자는 물을 마시며 고개를 살짝 돌려 눈알로만 슬쩍 흘겨본다.


"이게 누구여?"


두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받은 남자는 그제야 자신에게 한말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이 물에서 입을 떼고 원천댁을 바라본다.


"혹시 영달이 아니냐?"


그제야 원천댁을 알아본 영달은 뭔가를 들킨 듯 무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다 긴 트림을 뽑아낸다.


"보... 복순아. 끄어억. 잘 있었냐. 복순아."


"그래. 이게 얼마만이냐. 시상이나. 살아있었냐. 시상이나. 어디 있다가 왔냐. 산에 있다 왔냐? 꼴은 왜 이 모냥이냐. 시상이나. 너 해방된 것은 알지?"


"시상이든 만상이든 간에 밥 좀 주라. 복순아. 배고파 죽것다."


"잉? 그려. 밥 줄게. 우리 집으로 가자. 이야기는 나중에 허고 일단 우리 집으로 가서 밥 먹자."


"내가 너그 집을? 거길 어떻게 가냐? 밥 한 그릇 일루 갖고 오지 그려."  


"집으로 가잖게.  집에는 우리 막둥이만 있어야. 집에 가서 밥 먹자."  


집에 가자는 말에 수염에 덮인 영달의 안면이  봄바람을 맞는 보리밭처럼 일제히 일렁이다 서서히 잠잠해진다. 원천댁과 영달이 사립문에 들어서자 마루에 앉아 해를 쪼이며 손톱을 뜯던 소년이 낯선 이를 바라본다. 원천댁이  양길에게 다가가 까까머리를 쓰다듬으며 영달에게 아들을 선보인다.


"영달아. 우리 막내 처음 보지? 아가. 인사혀. 엄마 어릴 때 동무여.  영달 아재가 시장허시다고 해서 모시고 왔어. 둘이 마루에서 잠깐만 기다려. 금방 밥 갖고 올텐게."


사립문에 가만 서있던 영달이 집 안을 탐색을 하며 마당으로 걸어 들어와 토방 위에 엉덩이를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양길이 영달에게 다가가 소매를 끌며 마루에 앉으라고 말한다. 가까이서 아이를 자세히 바라보니 어쩐지 낯이 익은 얼굴이다. 원천댁의 어릴 적 모습이 그대로 서려있었던 것일까. 영달은 친근한 아들의 모습에 마음이 녹으며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남자의 웃음을 본 것인지 양길은 금세 살갑게 남자의 팔을 잡아끌어   마루에 앉게 한다. 영달은 마루에 앉자마자 마루 천장의 서까래를  유심히 살펴본다.


"아재! 아재가 저기 동네 꼭대기에 새막산에 살았던 영달 아재 맞지요?  우리 어머니 어릴 적 동무요. 어머니랑 나무하러 산에 다녀올 적마다 어머니가 아재 이야기를 했당게요. 어렸을 때 나무도 해다 주고 뽕도 비어다 주었다고요. 아재도 우리 아버지처럼 집 짓는 사람이라고요. 우리 아버지는 인자 집 짓는 거 안 허고  읍내서 목재집을 허지만요."


"조잘 조잘대는 입이 많이 닮았구먼. 누가 봐도 복순이 아들이구만."


"이힝. 그려요?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누나랑 형들은 다 아버지를 닮았는디 저만 어머니를 닮았다고."


양길이 두 손으로  손세수를 하며  쑥스러운 듯 웃는다.  영달이 따라 웃다가 암한 표정으로 변한다.


"야야. 너 손톱 뜯냐? 손톱 뜯으면 못써. 봐봐라. 문댕이 손톱이 됐잖여. 손톱이 없으면 손가락에 힘이 안들가고 나쁜 균이 입에 들어가면 병에 걸려.  손톱 뜯지 말어. 손톱이 뜯고 싶으면 부지런히 손을 놀려.  뜯을 새가 없으면 잊어버린 게. 나도 어렸을 때 손톱을 뜯었는디 목수 일을 하게 되면서 안 뜯게 됐구먼."


"어머니도 맨날 손톱 뜯지 말라고 허시지만 잘 안된당게요. 저도 그러기 싫은디요."


두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원천댁은 된장에 버무린 돌나물을 담은 접시와 식은 보리밥을 퍼담은 함지박을 개다리상에 올려 영달 앞에 내려놓는다.


"찬은 없지만 많이 먹어. 배고프쟈? 사정이 급한 것 같아서 되는대로 차렸어. 생각해 본 게 내가 어렸을 때 소꿉상은 많이 차려줬는디 진짜 밥을 차려준 거는 이번이 처음이네."


원천댁의 말에 수염 속 영달의 입이 희미하게 웃고 나서 순식간에 함지박에 든 밥을 걸귀처럼 먹어치운다.


"영달아. 어디서 뭐 하고 다녔길래 이 꼴이 됐냐? 니 팔자도 참말로 거시기허다. 너그 아버지가 한평생 부귀와 영달을 누리라고 지어준 이름이라믄서. 영달은커녕 몽달귀신 면하믄 다행이것다. 나는 여태 너처럼 손 끝 야무지고 성실한 사람 못 봤는디. 어째 평생 누더기를 못 면허고 밥 굶기를 밥 먹는 듯이 헐까. 시상에 너 같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원천댁이 대답도 없이 입속으로 밥을 밀어 넣는 영달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원천댁을 시선을 느낀 영달이 옆으로 몸을 돌리고 함지박을 다 비운 후  양길을 슬쩍 한번 바라보고 대답한다.


"거참 시끄럽다. 밥 얻어먹는 처지에 헐 말은 없지만 그래도 그만 히라. 듣기 싫다."


"알것다. 어디 있다 왔어?"


"어어... 보천교 십일전에서 뜯어낸 목재를 경성으로 실어갔다길래 나도 따라갔지. 그놈들이 보천교에서  나온 목재을 절에 팔았더라.  썩을 놈들. 그래서 절을 지었다.  배운 것이 그것인 게.  그것을 짓다가  알게 된 사람 소개로 부산에 가서 또 집을 지었어. 그러다  제주도 각시를 만나서   해방되고 제주도로 따라가서  살림을 잘 살았는데.  어찌어찌 허다 본 게  혼자가  됐다. 니 말만 따라 내 팔자가 그런갑다. 부모복 없는 놈이 각시 복은 있것냐.  올 곳이 여기밖에 없드라.  남부 끄라서 안 돌아올라고 했는데 말여. 생각도 안 힜는디 한번 와야것다고 마음을 먹응게 안 오고는 못 배기겠더라."


영달이 그간의 사정을 두서없이 늘어놓자 원천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한다.


"잘 왔다잉. 잘 왔어. 어딜 가것냐? 다들 그러드라. 어딜 가도 고향만 한 곳이 없다고. 귀여운 자식들 앞세우고 이쁜 각시 옆에 끼고 금의환향했으면 더없이 좋았것지만 말여. 니 어머니도 니가 이렇게 돌아온 것을 제일 좋아하실 것이여. 우리가 어쩌겠냐. 팔자 도망은 못 헌다는디. 인자 좀 배가 찼는가 보네. 배 고프면 서러운 소리도 안 나온다고 허드만. 거기 누워서 좀 자. 해가 좋은 게. 일어나면  양길이 옷 한번 줄텐게  씻고 옷 갈아 입어. 언제 적 솜옷을 여태 입고 있냐. 그리고 시방 너그 집에는 못 가.'


"왜?"


"누가 들어와서 사는디. 하필 미친년이여."


"잉? 우리 집에 누가 산다고? 동네 사람이? 타관 사람이?"


"야야. 집 비운 지 십오 년이여. 집은 잘 있어. 원체 뼈대가 좋은 게. 그리도 그 사람이 안 살았으면 남아나도 안 했을 것이여. 집은 천천히 비워달라고 하면 되는 것이고. 일단 자고 일어나면 씻고 옷 갈아입어."


영달이 그제야 연월리를 떠나 있었던 날들을 되짚으며 오월의 해가 내리쬐는 원천댁의 집, 마루에 눕는다. 남의 집 헛간을 얻어 잘 때도 거지꼴로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할 때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느껴진다.  그러나 원천댁을 만나 밥 다운 밥을 얻어먹고 깨끗한 마루에서 지친 몸을 의탁하니  피로가 밀려온다.  그리고 깊은  꿈 속으로 빠져든다.


영달이 맨발로 제주 바닷가를 걷고 있다. 할머니 손길처럼 온화한 흰모래들이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영달의 발을 부드럽게 감싼다. 문득 모래 때문에 발바닥에 새겨진 아버지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발바닥을 뒤집어 바라본다.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흔적.  동학도들과 함께 연월리를 떠나기 전날 밤에 손수 먹물 묻은 바늘로 발바닥에  새겨주신  아버지의 이름이 사라져 버렸다.   발을 부여잡고 아버지를 부른다.  아버지. 아버지.  발가락을 감싸주었던 흰모래 사이사이로 흰 뼈가 보인다.  아직 풍화되지 못한 수 많은 뼈들이 모래사장에  묻히고 흩어져 있다.  저 멀리서  물질을 하고 나온 제주댁이 해산물이 가득한 테왁을 옆에 끼고 젖은 채로 물을 뚝뚝 흘리며 이쪽으로 걸어온다.  제주댁에게 이쪽으로 오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뛰어가다  모래 속에 발이 빠진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지 마. 오지 마.  임자. 여기 오면 안 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잠시 눈을 떴을 때,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고 볕을 품었던 반들반들한 마룻바닥은 한기를 뿜고 있다. 부르르 몸을 떨자 양길이 영달의 손을 잡고 제 방으로  데리고 가서 방바닥에 눕힌다. 눈도 뜨지 못한 영달이 쿵 소리를 내며 이불도 깔지 않은 바닥에 몸을 던진다.  다시 눈을 뜨니 창호지에  푸르스름한 여명이 서려오는  신새벽이다.  


'여기가 어디냐. 어제 어디서 잠이 들었지.'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펴본다.  


'복순이네 집 사랑방이구나.'


폭신한  이불을 덮은 채 방 하나를 혼자 차지하고 자고 있는 자신이 낯설고 부끄럽지만 몸이 새털처럼 가볍다.  이렇게 깊은 잠을 잔 것이 엄마나 오랜만인가.  가뿐해진 몸으로  원천댁의 집에서 살금살금 빠져나와 뿌연 안개에 몸을 숨겨가며 도둑걸음으로 자기 집으로 간다. 그러나 누군가 살고 있다는 말에  흔적만 남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주저하며  기웃거린다. 신돌 위엔 고무신 여러 짝이 뒤죽박죽 엉켜있고 지붕을 덮은 짚단은 거무죽죽하게 변해 있다. 그러나 어렴풋이 보이는 기둥과 대들보는  집 전체를   잘 떠받들고 있다. 나중에 기와를 얹을 것을 계산해 뼈대 있는 나무를 골라 세웠으니까.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집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바라보니 뒷간 옆에 사는 거위 한쌍이 머리로 문을 박차고 나와 달려 나와  꽉꽉 거린다. 영달이 당황하여 급하게 한걸음 뒤로 물러서자 날개를 마구 휘젓다가 저희들끼리 눈을 맞추며 끼룩거린다. 영달이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설 때마다 거위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열 발자국쯤 뒤로 물러나 안갯속에 몸을 감추자 거위들은 뒤뚱거리며 뒤로 돌아 물러난다.  잠시 뒤, 안에서 인기척이 나며 여자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천천히 걸어 나와 누군가를 부른다.


"아하함. 몽이 왔냐? 몽아!"


아무 대꾸가 없자 여자는 이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다시 방으로 들어가며 혼짓말을 한다.


"꿈자리가 좋았는디. 에헤. 이렇게 날이 좋은 게 부자가 어디서 멋들어지게 한 자락을 피고 있것지.  오다가다 잠깐이라도 왔다갈 것이지.  적적하다. 빈집 같어."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거위들이 토방으로 기어올라가 머리를 맞대고 똬리를 틀자 잠시 뒤에 천상에서 안개를 타고 강림한 듯한  현악기 소리가 주위에 퍼진다.  시끄러운 거위 소리에 얼이 빠진 영달은 환청에 사로잡힌 듯 정신이 아득해진다. 한참  음악을 듣고 서 있다가 마을에서 들려오는 첫닭 울음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린다. 도깨비불에 홀려 밤새 방장산을 정신없이 헤매었던  시절에 영달을 다시 집에 데려다주었던 것은 저  수탉의 울음 소리였다.


'뭐여. 저렇게 살벌하게 집을 지키는 거위는 처음 보네. 무슨 여편네 목소리가 저렇게 쩌렁쩌렁할까. 거기에  가야금 소리까지. 헛것이 들리는가. 꿈자리도 뒤숭숭했는디. 그나저나 내 집인데 내 맘대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것이 뭐 하는 짓이여. 이제 어디로 갈거나.  만일이네 작은 어머니께 인사드려야지."


영달은 마을 입구로 와서 새암에서 세수를 하고 바로 만일의 집으로 향한다.  때마침 만일의 모친, 독바우댁이 아침을 짓을 위해  갈쿠리 같은  손으로 짚어가며   굽은 허리를 집고 뿌우웅  똥방귀를  뀌며  방에서 기어 나오는 중이다.


"어머니. 작은 어머니."


"잉? 누구냐?"


"영달이요. 영달이가 왔어요."


"뭐 영달이? 영달아."


영달이 반쯤 열린 사립문으로 들어가  마당을 가로질러 독바우댁에게  달려간다.


"영달아. 너 정말 영달이냐? 아이고. 영달이구나. 돌아왔구나. 영달아."


독바우댁이 영달을 끌어안는다.


"영달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어쩌다가 다시 돌아온 거야. 니 행색은 왜 이러고. 가서 잘 살지. 어쩔라고 돌아왔어.  한 번도 안 오길래 아주 멀리 간 줄 알았다. 니가 여기서 무슨 좋은 꼴을 봤다고 여길 왜 와."


영달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것인지 슬퍼하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은 복잡한 심경을  눈물로 대신한  독바우댁이   영달을 데리고 방에 들어간다.  영달이  큰절을 올리자 독바우댁은 구부정하게 앉아 절을 다 받지도 않고 조급하게  묻는다.


"밥은 먹었냐. 배고프지.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앉아 있어.  밥부터 먹고 이야기 허자. 얼굴이 홀쭉허다."


 그간의 신상보다는 돌아온 이의 허기를 채우는 것이 우선이라는 듯 영달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허리를 곧게  펴며 부엌에 나가 식사를  준비한다.


다급한  마음에 치맛자락을 밟아 넘어질 뻔했으나  날쌔게 한 바퀴를 빙그르르르 돈 늙은 몸이 중심을 잡아낸다.   보리 위에 쌀을 두 움큼이나 더 얹어 밥을 안치고   큰아들 주려고 보리독에  박아두었던 굴비를 꺼내 찌고  장독대에 가서 작년 가을 된장독에 묻어두었던  무장아찌를 꺼내 맑은 물에 벅벅 씻어 주인만큼 주름지고 푹 패인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나박나박 썬다.  남은 짠물을 꼭 짜서 참기름을 넉넉하게 두르고  엄지와 검지로 통깨를 한 꼬집 쥐어 으깨듯이 뿌린다.  "아따. 국을 안 끓였네.'   이마를 한번 탁 치고 시렁에 걸어 둔 시래기를 잡아채듯 휙 뽑아 찬물에  비벼서 빨다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대로 두고 앞마당으로  튕겨나간다.   어제 보니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오이 중에 첫째 놈이 벌써  손바닥만 하게 자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독바우댁을 닮아 이리저리 구부러진  오이덩굴이  첫 열매를 내어주지 않으려고  까슬까슬한 잎사귀로 덮어가며 요리조리 숨기다가  주린 객을 대접하고자 하는  주인에게  새끼를 내어준다.  아직 자라지도 않은 작은 오이를   손에  쥐고 쏜살같이 부엌으로 달려온 독바우댁이  물로 한번 휙 씻은  오이를  어슷어슷  채친다.  나란 나란한 오이에 소금 설탕 간장 식초 마늘을 넣고 조물조물한 뒤 시원한 물 한 홉을 부으니  으음 이맛이다.  밥이  거진 되어가는 것을 보고   굴비 찌는 솥의 뚜껑을 활짝 열어  굴비 껍질을 쫄깃하게 굳힌다.  어제저녁을  먹고  벽에 걸어둔  밥상이  먼지를 탔을 리 없을 텐데  맑은 물로  빤 행주로 정성스럽게 상을 닦는다.   그리고 왜정 때도 빼앗기지 않은 집안의 유일한 쇠붙이,  남편의 수저를 꺼낸다.   "당신은 내 생각 허쇼... " 말끝을 흐리고  피식 한번 웃더니  밥상 위에  자신의 수저와  머리를  맞대게  놓는다.  


독바우댁이  차려진 밥상을  들려 하자 아까부터  지켜보고 서있던 영달이 부엌으로 나와 밥상을 번쩍 들어 방으로 들인다.  무거운  밥상을  가볍게 들었다 내려놓는 늠름한 남자를  뒷모습을  본 여자는  흐릿한 옛 기억이 떠오른다.  결혼식 때 처음 본 신랑은 그야말로 땅에 닿을 듯이 키가 작았다.  뿐만 아니라  눈은 만들다만 단추구멍처럼 작고 코도 작고  입술은 여자차럼 통통하고  입이 작았다.   빌려 입은 혼례복 단령 끝자락은 발목에 닿아있고 소매 끝을 안으로 접어 바느질을 했는데도 소매를 연신 걷어올리며  헤헤 웃고 있었다.  선례는 새신랑의 외양에  실망하여  눈물이 나는데  동수는 신부의 키가 저보다 커서  태어날 아이들 키걱정을 덜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후에야 남편의 겉모습은  볼 품이 없으나  안에 숨겨진 것들은  그 누구보다  큰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작은 어머니. 만일이 삼일이는요?  어디 갔어요?"


"삼일이는 전주서 살고 만일이는  면사무소 공무원으로 취직이 되까고   천원 관사에  살어 . 벌써 아그들이 셋이다. 아들 둘에 딸내미 하나. 여기는 학교가 먼 게. 어린애들 학교 보낸다고 천 원으로 나갔어.  해방된 해에.  그리고 면장이 죽었다. 자기 손으로 대들보에 목을 맸어."


"예, 면장이 목을 매달고 죽었다고요?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닌디 누가 죽인 거 아니고요?"


"아니여. 만일이가 증인이여. 면장을 마지막으로 본 게 만일인 게. 해방된 날 만일이가 라디오에서 일왕 발표를 듣고 밤늦게 찾아가서 소식을 전해줬는데 그  양반 얼굴이 예사롭지가 않더래.  이제 다 끝났구나 그런 표정이었다고 허던데. 저러다 뭔 일 나겠다 싶어서 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면장이 곧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다 알겠으니 그냥 가라고 했댜. 그리고 그날로 목을 매고 죽었잖여."


"에에 설마요. 면장한테 원한 품은 사람이 한둘이 간요? 젊은이들 뽑아서 징용 보내고 처녀들은... 말도 허기 싫어요. 그런 놈이 해방되었다고 자결을 허겠어요?  그놈 생각만 허면 자다가도 몸이 벌벌 떨린당게요."


"나쁜 짓 많이 혔지. 쳇. 나도 치가 떨리지만 나는 면장 욕 못 헌다. 우리 만일이를 징용에서 빼줬고 나중엔 중신도 서줬고. 그리고 면장 죽고 면장 아들 민수가 만일이를 면사무소에 넣어줬응게.  그리고 지금은 민수가 여기 군수여.  무슨 줄을 잡았는가.  우리 만일이 목심은 그 집안에 달려있고.  그 시절에 친일 안 허고 뭔 수로 그렇게 출세를 했겠냐. 양조장집 데릴사위로 들어와서 장인한테 온갖 수모를 다 당하면서  양조장 차지허고 뇌물 써서 면장 달고. 그 집안 사정 다 알지. 인물은 인물이었어.   일본 놈들 물러가면 친일 헌 놈들 다 죽을지 알았는데. 친일파들, 그 자식들은  더 출세를 허드란말여. 무슨 놈의 세상이 이런가 모르것다. 독립운동 헌다고 처자식까지 버리고 간 사람들은 여태 소식도 없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가 살았는가  아무도 모르는디."


영달이 밥 먹던 수저를 놓고 고개를 푹 숙여 아버지 이름, 이학수가  적힌 오른발을 바라본다.   


"그리고 니 집에 미친년이 하나 와서 살어. 너 나간 해에 만일이가 자전거에 싣고 온  여자여.  무슨 인연이 있어서 그런 거은 절대 아니고 그냥 불쌍히서 두고 볼 수가 없었다고 허드라. 쪼깨 살다가 갈 줄로 알았더니  우리 동네에 아주 뿌리를 박았다잉.  그것도 니 집에.  만일이가 니 집에 잠깐 데려다 놓았는데 거기 눌러앉대. 어찌나 뻔뻔스럽고 성격이 드센가 동네선 귀화 성님이랑 왕심댁 말고는 아무도 상종을 안 해.  장터에서 가야금 타서 밥 얻어먹고 사는 여자여.  그 여자 쫓아내려면 너 애 좀 먹을 것이여. 인자  마당에 추접스럽게 때까우까지 풀어 먹이고."


만일의 모친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다 갑자기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을 다듬는다.


"늙으면 말만 많아진다고 내가 말이 너무 많지야. 너 본 게 너무 좋아서 그러지. 우리 형님, 너그 어머니가 살아서  널 보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실까나. 밥 먹고 어머니 산소에 가봐. 만일이가 한식 때 벌초 싹 히 놓고 놓고 갔어.  영달이  형님네랑 우리랑 큰집 작은 집이나 마찬가진디 형님 안 계신다고 큰 어머니 산소가 풀로 덥수룩 히서 쓰겠냐면서 봄가을로 벌초를 헌다. 그놈이. 그러고 본 게 니 얼굴도 벌초 좀 히야것다.  얼굴이 그것이 뭐냐. 나는 산짐승이 내려온 줄 알았다."


"작은 어머니랑 만일이가 욕보셨구먼요.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너희 아버지랑 만일이 아버지랑 형제지간이나 다름이 없고. 니가 우리 만일이를 친형제처럼 챙겼는데  뭔 소리여.  네가 목수질히서 우리 만일이 학비를 안 댔으면 갸가 어떻게  학교를 마쳤겠냐.  겨우 여덟 살밖에 차이가 안 지는데 만일이 학비 대니라 너는 배우지도 못 하고. 성님 약값 대니라고 장가도 못 가고. 너 불쌍한 것을 어떻게 말로 다 허냐."


영달이  두 손으로 오른발을 쓰다듬으며 대답한다.


"다 아버지가 시키신 일인 게요. 떠나시기 전날에 발바닥에 먹물 묻은  실로 이름 새겨 주시면서 아버지처럼 남은 식구들 잘 돌보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어라. 열다섯 살짜리한테요.  어렸을 때는 저한테 다 맡기도 떠난 아버지가 밉기도 했는디요. 아버지 이름 석자만 생각 허면 정신이 났당게요.  이제야 허는 말이지만 십일전 축조 헐 때 목재 구하러 백두산에서 세 번 갔었잖아요.  저는 그때 작은 아버지랑 우리 아버지를 만났어요.  작은 아버지가 만일이 학비에 쓰라고 돈도 주셨고요.  저는 들고 간 목재값 중에 일부를 떼서 전해드렸어요.  두 번째는 아버지랑 작은 아버지를 만나서 잘 전해드렸는데 세 번째 갔더니 다른 사람이 왔더라고요.  그 사람이 허는 말이  두 분이  다른 일로 멀리 가셨다고  허셨어요.  그 두 분이 어디를 가셨겠어요.  그때서야  아버지가  이렇게 될  줄 알고 떠나시기 전에 내 발에 당신 산소를 미리 만들어놓고 가셨는갑다 혼자 생각했어요."



"그려이, 너는 만났었구먼. 해방된 지 오 년이나 지났는데 여태 안 돌아오시는 것이믄 어디서 돌아가신 것이겠지.  살았으면 처자식 두고 간 것을 잊어버릴 사람들은 아닌게로. 돌아가신 날이나 알았으면 좋것는디. 불쌍한 사람들. 벌씨 삼십 년이여. 인자는 만나도 못 알아볼 것이다. 얼굴도 기억이 안 난 게. 해방된 날에 내가 꿈을 꿨는데 말여. 만일이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윗목에 차려놓은 밥을 드시고 미안허다고 허시드라.  저승가시는 길에 들렀다가 가셨는가 봐. 인자는 내가  저승이나 가야 만날랑가. 흥. 만나면 모른 체할 것이여. 보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치도  없다.  열여덟에 귀밑머리 풀고 그다음 해 만일이 낳고 얼마나 좋아힜는디. 우리 삼일이 낳고 삼칠일도 안돼서 독립운동한다고 가버리면 남은 식구들은 어쩌라고. 식구들한테는 고삐 채워놓고 간 것이여. 우리 같은 상민한테 독립운동이 가당키나 허냐. 이런 말을 누구한테 할 것이냐. 니 어머니 기실적엔 둘이서라도 얘기 트고 살았는데. 형님이 안 계신 게 누구한테 이런 말을 허고 살 것이냐. 해방되고 인자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허고 살 수가 있겠구나 싶었더니 만일이가 그러지 말라고 허드라고. 윗사람들이 다 친일힜던 사람들이고  독립운동 헌것이 뭔 벼슬이냐고. 어디에 이름을 남긴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독립운동힜다고 덕보고 살 것도 아닌게로 조용히 살자고 허드라.  아버지도 그러길 바라실 거라고.   만일이 말이 맞지 뭐.  이야기를 들어 본 게 독립 운동힜던 사람들이 괄시를 당허고  김구 선생님은  총까지 맞아 죽는 세상인 것 같은데.  시상이 왜 이러냐.  못 볼 꼴 너무 많이 본다. 늙으면 죽어야지. 너무 오래 살았는갑 보다."


늙은 여자는 넋두리는 젊고 생생하다. 죽어도 괜찮을 만큼 노화한 후에야 드디어 하고픈을 말을 다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듯이 거침없이 팔팔하여 그칠 줄을 모른다.  아침을 먹은 뒤 영달은 면도를 하고 머리를 묶은 후에 산으로 간다.  거위 한쌍을 파수꾼으로 둔 제 집을 슬며시 지나쳐 산길을 오른다. 여전히 마을과 가까운 산은 거의 개간하여 먹을 수 있는 콩, 감자, 깨, 고추 등을 키우고 있고 조금 더 올라가니 뽕 밭이 층층이 이어진다. 뽕나무 밭이 끝나는 곳에서 계곡이 시작되고 계곡의 초입에  옻나무가  군락지가 품은 자그마한 폭포가 있다.  어머니  산소에 가기 전 영달이 목욕을 하려고 솜저고리를 벗는다. 비탈길을 오르느라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렀지만 산 중의 폭포 물은  차갑다.  양손을 모아 오므려 물을 담아 상체에  살살 끼얹는데 어디선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난다. 영달이 놀라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한 여자가 바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허리를 꺾어가며 웃고 있다.


"히이이이 이  사내가 목욕을 헐라면 물에 첨벙 들어갈 것이지 까마구 목욕하듯이 깔짝깔짝 퍼득퍼득하는 꼴이 하도 우사스러워서. 이힛 까마구가 와서 아이고 형님 허겠소. 이 힛잇.  못 본 걸로 할 테니 허던 거 계속하시오."


"아이고. 아짐씨. 바위 위에서 남 목간 허는 것을 훔쳐봤소."


"훔쳐보기는 뭘 훔쳐봤다고 그러쇼. 내가 나무꾼도 아니고 댁이 선녀는 더더욱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보여서 본 거고 웃겨서 웃은 거지."


"아짐씨는 무섭지도 않소. 내가 누군 줄 알고."


"누구긴. 사람이것지. 털 많다고 다 짐승은 아닌게로. 이히히잇."


"제정신이 아닌갑소."


영달은 옷 벗은 남자를  겁내지 않는 여자가 두려워져  젖은 몸에 솜옷을 꾸역꾸역 꿰어 입고 다시 산을 오른다. 산을 오르는데 자꾸만 뒤에서 환청처럼  새벽에 들었던 음악 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아 오싹해진다.


'생긴 걸로 보아하니 여시가 둔갑한 것 같지는 않은데 어찌 이렇게 겁이 날까. 저 소리는 뭔 소리길래 왜 이렇게 자꾸 들리는 것이여.  미치겠다. 미치것어.'


영달은 산소를 들렀다가 내려오는 길엔 폭포길로 가지 않고 먼 길을 돈다.  산에서 내려와 영달은 자신이 지은 집을 바라보고 서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신돌 위엔 고무신 여러 개가 여전히 엉켜있었고 거위들이 마당을 돌아다니며 보초를 서다가 영달을 보고 득달같이 달려와 두 날개를 퍼덕거리며 꽥꽥 거렸다. 영달이 집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부르니 거위 둘이 죽일 듯이 달려든다.   그러나 이번엔 영달도 지지 않고 거위에게 발길질을 하며 토방에 올라가 서서 집 전체를 조망한다. 마당엔 거위 똥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마루는  오래된  먼지가 찌들어 뿌옇고 얼룩얼룩하다.  지붕에 얹은 짚단은 썩을 대로 썩어서 천장이  뚫어질 지경이다. 크게 한숨을 쉬며 마루에 올라가 큰 방문을 열어보니 아랫 목에 펼쳐진 누런 이불은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가  그대로 파여 있고 변변한 가구 하나도 없이  벽에 걸린 너저분한 옷가지가 전부다.  작은 방문을 열어보니 거긴엔 그야말로 아무것이 없이 휑하다.  


'여자가 산다고 했는데  어찌 여자 손길은 하나도 없네.  진짜 미친 여잔가? 도대체 누가 사는 것이여."


영달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마루에서 내려오니 마당에 아까 산에서 본 여자가  등에 무엇인가를 짊어지고 서서 광기가 가득한 눈으로  영달을 노려보며 소리를 지른다.


"넘의 집에 왜 왔소잉?  산에서부터 날 따라왔는가 보네?"


"넘의 집이라니. 여긴 내 집이요. 이 집을 내가 지었고. 그리고 누가 누굴 따라왔다고 그러시는가. 누가 봐도 아짐씨가 내 뒤에 있는디."


"허. 그건 그렇고. 이 집을 아저씨가 직접 지었다고?"


"아하. 아짐씨가 만일가 데려다 놨다는 사람인 갑네? 진즉에 이야기는 들었지만도."


"그리서? 뭣이 어쩠다고? 내가 아주 옛날부터  오래전부터  계속 살았는디."  


"아. 그러니까 그 옛날 오래전  그 이전에 내가 이 집을 짓고 살다가 사정이 생겨서 떠나 있었다고.  내가 떠나서 이 집이 비니까 만일이가 아짐씨한테 이 집을 빌려준 것이고."


"그래서 뭘 어쩌라는 것이요? 그러면 만일한테 가서 다른 집을 주라고 허든가 말든가. 내가 시방 이 집에 살고 있으니까."


"뭔 소리 허쇼? 만일이가 집 만드는 도깨빈가? 집  나와라 뚝딱 하면 집이 나왔다 들어갔다 허는 것인가.  그리고 내 집을 두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것인디?"  


"그것은... 그런 말 못 들어봤소? 계집과 제집은 한번 내주면 끝이라는 말. 시끄럽게 하지 말고 당장 나가쇼."


두 사람의 입씨름에 흥분한 거위 두 마리가 퍼덕퍼덕 흙먼지를 일으키며 단곡댁 옆에 선다. 영달은 여자의 궤변이 당황스웠지만 무엇보다 '계집과 제 집은 한번 내주면 끝'이라는 말이 현기증을 일으킨다.  산으로 도망가 살자고 울던 복순이의 뺨까지 때리며 떼어냈지만  남의 색시가 된 복순이 주위를 빙빙 돌며 떠나지도 다가가지도 못했던 옛일,  자기 눈에만 보이는 도깨비불을 따라온 온 산을 헤집고 다니다가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된 복순이를 산까지  끌고 갔다 놓아준 과거,   여자들을 집에  남겨 두고 남자들만 한라산으로 도망친 과오,  잃은  아내를 위한 복수를 포기하고 섬을 떠난 비겁함. 그것들을 모두 꿰뚫어보는 보는 듯한 말에 맥이 탁 풀린다.  영달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뒷걸음쳐 또 다시 후퇴해  뒤돌아서자 단곡댁이 뒤통수에 대고 쉴 새 없이 총알 같은 말들을 쏘아댄다.


"얼씨구. 나가라고 허니까 순순히 나가는 걸 본 게 진짜 임자가 아니구먼. 그거 아쇼. 뺏긴 것은 도로 뺏어도 지 풀에 포기헌 것은 아주 넘의 것 되는 것이여. 뺏긴 나라니까  도로 찾아왔지 보따리 싸서 줬으면 뭔 수로 도로 찾아왔것소. 어디서 굴러먹다가 뭔 소리를 듣고 여길 왔는지 모르것지만 이 집주인은 나여. 우리 몽이가  이 집으로 돌아올 것인디. 나는 절대 아무데도 못 가. 아니 안 가. 허우대 멀쩡해서  힘 좀 쓰게 생겼구만  어디 헐 짓이 없어서 넘이 잘 사는 집을 뺐을라고 허는 것이여.  나이도 잡술 만큼 잡순 것 같구먼.  해볼 테면 해볼랑께. 내 꺼 못 하면 남은 못줘. 확 불을 싸질러버리고 같이 죽지 뭐. 아이고. 잘 타것다."




영달이 자기 집에서 쫓겨나 독바우댁 집에 돌아오니 만일이  마당을  서성이고 있다.  영달이 산소에 간 뒤에   독바우댁이  면사무소에  가서 아들을 데려온 것이다.  십오 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엊그제 헤어졌다 만난 것처럼 담담하고 차분하다.    


"형님. 산소 갔다 오셨소?"


"응, 그동안 우리 어머니 산소를 잘 돌봐줘서 고마워."


"참나. 별말씀을. 방에 들어가시게요."


두 남자가 방에 들어가자 독바우댁이 기다렸다는 듯  찢은 마른 북어를  고추장에 버무려 올린  술상을 들고 방에 따라 들어간다.  만일은  그 자리에 앉아있는데 영달이  자리에서 일어나 독바우댁이 들고 들어오는  상을 받아 든다.  독바우댁이 영달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너는 니 아버지랑 똑같어.   그 자리에 앉아 그냥 상을 받는 법이 없는 것이."


"그렇겠지요. 아버지 보고 배운 것인 게."


"무섭다.  보고 배운 게.  만일이, 삼일이는  아버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고 허는데."


"... ..."


만일이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영달을 도우려는 듯  묻는다.


"형님, 백두산에서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다면서요?"


"응.  뵙고 왔지. 두 번이나.  말 못 해서 미안허다.  워낙 비밀리에 했던 일이라  말을 못 했어.   교조님께서  죽을 때까지 비밀로 허라고 하셨지.   아버지 떠나시고  오 년인가  지나   복순이 아버지 따라  대흥리  십일전 축조 준비를 허는데  어느 날에   차경석  교조님이  나를 은밀하게  부르시드라.  교조님 아버지도 동학도였다고 하시면서  아버지가 간도에서 뭘 하시는지 안다고 허셨어.  그리고 이 일은 내가 아니믄 할 수 없다고 허시면서  큰돈을 주셨당게.  그 돈을 가지고  백두산에 가서   십일전 올릴 목재값을  치르고  절반은  아버지한테 전해주라고 허시드라.  꼭 비밀로 해야한다고. 죽을 때까지  절대 아무한테도 말해선 안 된다고 허셨어.  그렇게 되면  관련된 사람들이  위태로워진다고.   시키는 대로 돈을 들고 가서  반은 목재값을 치르고  반은 아버지한테 전해드렸지.  긴 이야기는  못했다.  그냥  여기 식구들 잘 있다는 이야기만 전해드렸어.  두 번째도 똑같어.  여곽에 있으니까 우리 아버지랑 작은 아버지가 오셔서 돈을 받아가셨지.  그때 작은 아버지가 나한테 돈을 주시면서 니 학비에 보태라고 하시드라.  자기가 줬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고 여러 번 당부 허셨어.   근디 세 번째 갔을 땐 다른 사람이 나왔드라고.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랑 너희 아버지는  다른 데로 가셨다고 허는 것이여.  그래서  그 사람한테 돈을 주고 고향에 돌아와서 차경석 교조님께  그대로 말씀을 드렸더니  그럴 리가 없다고 하시면서  세 번째로 돈을 받아간  사람은 우리 쪽 사람이 아니고  비밀이 새나갔다고 말씀하시면서 낯빛이 변하시더라.  그리고 날더러 몸을 피하라고 하셔서 경상도 방주에서 숨어 있었어. 어느 날  대목장님한테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대흥리서  대목장님  뵙고  나오는 길이  일본 경찰한테 잡혀갔어.   갇혀 있으면소   얼마나 맞았는가 몰라.  맨날 불러서 물어보는 것이 백두산에 왜 갔느냐, 누구를 만났느냐. 두들고 패고.  끝까지 경상도 방주에 심부름을 갔었다고 버텼지.  그동안 거기 사람들이랑 입을 맞춰 놨거든.  흐흐. 내가  까딱 잘못하면  나, 우리 아버지, 너희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보천교까지 다 죽는 것 아니것냐.   그렇게 시달리고 있는디 사람이 와서 교조님이 높으신 분들이랑  잘 협의를 하고 있응게 곧 풀려날 거라고 허드라. 그러고 나서 좀 있다가   풀려났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독바우댁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작은 어머니. 왜 그러셔라?'


"니가 십일전 지을 때 백두산에 갔었던 것은 나는 이번에 처음 알았는디 말여. 너 혼자 간 거여?"


"예, 혼자 갔지요. 비밀리에 허는 일인디 누구랑 같이 가것어요? 우리 어머니도 모르게 헌 일인게."


"복순이 아버지한테는 이야기하고 간거여."


"아니요. 대목장님께는 교조님 신부름으로 경상도 방주에 간다고 하고 다녀왔는디요."


"영달아. 잘 들어봐.  내가 알기로는  보천교 건물 올릴때  너 까막소 갈 무렵이여.  복순이 아버지가  지금 복순이 남편이 된 한대수를 데리고 백두산에  갔었어.  그거 알고 있었냐?"


"예?  대목장님이 백두산에 갔었다고요?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옛날에 복순이 어머니한테  들은 기억이 나.  무슨 대목장이 목재를 사러  백두산까지 직접 가냐고 불퉁불퉁 했거든.  나랑 니 어머니 앞에서 말여. 나는  남편 없이 어린 자식들 키우는 생과부고 니 어머니도 나랑 마찬가진디 여편네. 근데 그런 사람들 앞에서 지  서방이 잠깐 출타했다고 불평을 허드라고.  그 창시 없는 여편네가.  영달아.  혹시 비밀이 새나간 곳이 복순이 아버지였는가 생각히봐.   복순이 아버지가 너를 사위로 점찍어 둔 것은  이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여.  근디  왜 갑자기 근본도 모르고  대목장 깜도 안 되는 머스마를  복순이랑  여웠겠냐 ? 복순이도 그렇지.  칫. 너를 두고 시집을  가드만. 참내."


"그거야 제가 까막소를 다녀와서 빨간 줄이 갔응게  싫었것지요. 게다가 우리 아버지가 왜 여길 떴는지 알만한 사람은 안게로  걱정이 되었것고."


"영달아. 몸 써서 솜씨로 일하는 목수가  관에서 빨간줄 그었다고  대패질을  못 허냐, 망치질을 못허냐?   그리고 경찰이 어떻게  너 있는 것를 알고  잡아갔것어?   복순이 아버지를 만나고 나오다가 잡혔다매?   그리고 니가 백두산에 갔다는 이유로  잡혀갔다면 복순이 아버지도 잡혀갔었어야지.  그놈들이 왜 너만 잡어갔것어?"


영달의 표정이 굳어지면 입을  다문다.


'아. 내가 왜 이 일을 입 밖에 내었을까?  교조님께서  내게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라고 그렇게  당부를 하셨는데.'  


비밀은 영원히 비밀로 묻어두어야 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영달이 후회하며  입을 닫자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 듯 독바우댁이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러자 만일이 영달의 표정다가 어머니를 막는다.


"어머니. 그만하셔라. 어머니가  이런다고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것도 아닌데 이러다 애먼 사람 잡것 어라.  그 집 식구들이 이 동네에서 버젓이 살고 있는데 괜한 소리 했다가 분란만 일어날 것을.  대목장  어른도 진작에 돌아가셨고요.


아. 형님. 집에 가보셨는가요?  그 단곡댁이라고 거문고 허는 여자가 혼자 살고 있는디.  빈집으로 내동 둘 수도 없고  갈 데없는 불쌍한 사람이라  형님 허락도 없이 집을 내줬구만요."


"어어. 그려. 잘 힜어. 사람이 살아야 집이지. 집에 사람이  안 살면  흉가지.  근디  그 여자  좀 이상허드라. 어디 좀 모지란 사람인가?'


'하하하. 모지란 사람 맞습니다.  거문고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아무것도 없응게요.  허지만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그런 소리 못 허실 것입니다.  그냥 그거 하나면 넘치고 남는 사람인게요."


"아.  그러고 본 게 그 소리 들어본 것 같다.  가야금 소리에 광기가 실려있는 것 같은디.  사람 미치게 만드는 소리여."


"형님, 가야금이 아니고 거문고여라. 허허."


단곡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독바우댁이 아들에게 눈을 흘긴다.   


"뭐 헐라고 그런 근본 없는  여자를 동네에 들여가꼬. 너도 아버지 닮아서 오만 간데 오지랖이여.  그냥 길에서 죽든가 말든가 내버려둘 것이지 왜 데리고 와서. 속상해서."


"알겠어라.'


"알긴 뭘 알어? 대답은 잘 허지. 너는 이 일에서 빠져. 내가  귀화 성님한테  이야기해서  내보내든가 할텐게."


아들이 단곡댁과  관련되는  것을  꺼려하는 독바우댁이  단호한 태도를 취하자 만일 또한 고분고분한 태도로 어머니를 안심시키려는 듯 한 발자국 물러선다.  


"예, 그럼 어머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셔요.  형님은 저랑 같이 가시게요.  형님이 마침 일허실 수 있는 곳이 있응게요. 천원서  양조장을  헐고 벽돌로 신식 교회를  짓는데가 있어요.  딱 거기서 일을 허시면 될 것 같은데."


일자리가 있다는 말에 영달의 얼굴에 밝아지며 눈이 반짝인다.  물그릇을  단숨에 들이킨 만일이  당장 가보자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영달을 일으켜 세운다.  독바우댁의 집에서 나온 두 남자는 산 아래 새막산에  있는 영달의 집으로 걷는다.


"어디 가냐?"


"일단 형님 집에 가서 단곡댁을 만나봐야지요. 헐매 친 사람이 푸는 것은 당연허죠."


"그 여자는 누구여?"


"땅 밟고 사는 사람들 허고는 섞일래야 섞일 수가 없는  선녀라고나 헐까?  교회식으로는 천사라고 허든가?"  


"너 미쳤냐?  미칠라믄 곱게 미쳐. 내 눈엔 그냥 미친 여자 드만."


두 남자가 집에 도착하니  단곡댁은  불안한 듯이  마루에 나와  양다리를  달달 털면서 앉아있고   거위들은  마당을  순찰하며  철통 같은 방어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기세에 눌린 영달은 집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찌감치 서서  지켜본다.  만일이 집에 들어가니  거위들이  날개를 휘젓기는 하나 경계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만일이 마당을 가로질러 토방 위에 올라서자 단곡댁은 앉은 채로  올게 왔구나 싶은 얼굴로  만일을 빤히 올려다본다.   만일이 단곡댁에게 몇 마디를  하자 단곡댁이  별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고선  만일은 달려드는 거위들을  양팔로 훠이훠이 쫓으며 영달에게 걸어온다.


"형님,  저 사람이 아들이 하나  있는데요.   아들을 기다리느라  지금은  딴 데로 갈 수가 없단 게요. 아들 오면 같이 간다고 헌게  그때까지만 같이 지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형님이 안방을 쓰시고 단곡댁은  작은방을 쓰시면 될 것 같은디."


"저 여자랑 한 집에서 살라고?"


"그건 좀 그른가요?"


 "그르거나 말거나 저 여자가 그래도 된다고 혀?"


"예. 당연하지요. 형님 집인디요."


영달은 그제야  비로소   집 안으로   편안하게 들어간다.   주인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는 것을 알기나 한 듯이 거위들도 더 이상 영달에게 덤벼들지 않고   한풀 꺾인  소리로  웩웩댄다.    단곡댁이 안방에서  자기 이부자리와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서 작은 방으로 옮기는 사이  영달이 서까래와 대들보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한숨을 쉰다.  그대로인 줄 알았으나 가까이 보니  좀 먹은 자리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언제가는 기와를 얹을 생각으로 튼튼한 목재를 골라지었건만.  


"형님. 교회 짓는 디 가봅시다."


만일을 따라간 곳은 면사무소 앞,  예전  면장 부인의  소유였던  양조장을 헐어내고  벽돌로 3층 교회를 짓는  공사  현장이다.  주문한 벽돌이 미리 와버린 것인지  기와를 늦게 걷어낸 것인지  마당엔 교회를 지을 벽돌과  옛집 지붕에서 걷어낸 기와가 한자리를  차지한 채  답답하게  쌓여있고  한 옆에는  몇몇의 처녀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있으며  그 옆엔  양장을 잘 차려입은  부인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흩날리는  먼지들이   땀이 흐른  얼굴에 달라붙어  한결같이 얼굴을 찌푸린  깡마른 인부들이  그 사이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일꾼 둘이 긴 목재를 옮기는 와중에 높이 쌓인  기왓장을 건드려  와장창창창  소리를 내며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넘어지자   정신 못 차리게 시끄러웠던 공사 현장이  일순식간에  조용해진다.


"이런 시벌놈의... 일에  순서가 있어야지 아직 기왓장을 내가도 안 했는데  벽돌이 들어와서 마당을  다 막아버리면 일허는 사람은 어떻게 허라는 것이여.  글고  여기서 찬송가는 왜 부르고  기도는 왜 허는 것인지 참말로 모르겠네.   이러다  큰 사고 터지것어. 어쩔라고 이러는가 모르것네.  어허."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순간 멈추었던 시간이 똑딱똑딱  소음을 내며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다. 영달이 그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가  무너진 기왓장들을 옆으로 밀어내며  기왓장을 건드려 넘어뜨린  일꾼에게 말을 건넨다.


"괜찮소? 몸은 안 다쳤소?   내가 기와를 다 가져가고 싶은데 누구한테 말을 허면 되는 것이요?"


그러자 일꾼이  현장 소장인듯한  사람을  턱으로  가리킨다.  영달이 소장에게 가서  내일 아침까지  마당에 쌓인 기와를 다 치우겠다고 하자  소장 또한  가지러 오기로 한 사람이 며칠째 소식이 없어 답답해 죽을 지경이라 대답하며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영달은  바로 공사장에서 수레를 빌려 기왓장을 자기 집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한다.   그날 밤이 새도록  기왓장을  다 옮긴 영달이  해가 뜨기 전  자기 집 처마 밑에 앉아  공사장 인부에게 얻는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연기를 들이켰다가 내뿜으며  누가 옆에 앉아있는 듯  말을 한다.


 "처마 인심이 그 집 인심이라고 하셨지라.  처마가 높고  똥방한 집은 그 댁 마음씀이 딱 그렇고  낮고 넉넉한 집은 사람한테는 물론 거니와  지비까지  해마다  찾아와 집을 짓고 새끼를 치게 헌다고요.  그 말 때문이었는가 몰라도 타관살이 허면서 처마 깊은 집은 맘이 편했어라.   어르신은 늘 옳은 말씀만 하셨은 게로.   무슨 사정이 있었지라.   산 사람은   알 수 없는 깊은 속사정이 있었지라?    비밀로 할 것이구만요.  죽을 때까지 입을 꽉 다물고 살 것인 게 걱정허지 마셔라."


하늘을 바라보니   집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집터를 찾고 있는 제비가 찾고 있다.


"지비야. 우리 집으로 오그라이.  제주도 거쳐서 먼 길 오느라 욕봤구먼.  그냥 일루 와.   이 집 저 집 재지 말고 그냥 여그 눌러앉어. 가을까지 여기서 살어.  이엉 걷어내면  굼벵이도 많을 것이여.   한 데서 안자보고 비렁길 설움 안 받아 본 집주인이 니 마음을 알 것냐. 일루 와.  천하 봉황이라도 새끼치고 키울 때는 둥우리를 틀고 살어야지.  적적한 집에 니가 객이 되고  집 없는 너한테는 이 집 처마가 니 집이 되어 줄 것인 게.  갈 때 박 씨 내놓고 가라는 말은 안 헐라니까 일루 와."


다음날부터 영달은 교회 건축 현장에 나가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옻나무 군락지에 가서 옻 수액을 채취한다.  기와를 올리기 전에 좀 먹은  기둥과 서까래, 대들보에  옻칠을 한 후에 기와를 올릴 작정이다.  부지런히 집안 구석구석의 묵은 때를 벗기고 갈라진 곳을 메꾸고 무너진  세우고 울타리를  짓는다.   집을 비웠던 시간에 못해준 것들을 한꺼번에 다 해주고 싶은 듯 끊임없이 어루만지고 쓰다듬는다.   제비 부부도  집주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 집을 짓는데 여념이 없다. 제비는 둥지를  짓자마자 알을 낳더니 금세  품어  제비새끼를  네 마리나  깐다.  영달이 썩은 초가를 벗겨낸 날엔  이 근방의 새들이  모여서  굼벵이 잔치를 벌인다.   거위들은 영달이 건축 현장에서 매일 가져오는 짬밥을 먹고 살을 오르더니  울타리 안에서 유순하게 변하여   알을 낳고 품어  새끼를 친다.   이젠 영달이 집에 돌아오면 떼로  달려가  손을 콕콕 쪼으며 먹을 것을 달라고 애교를 부린다.  


그 집에서 고통스러운 이는 단곡댁뿐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는  집주인과  제비 가족 그리고 거위 식구들이  내는 소리는 참을 만했지만  옻독은 견딜 수가 없었다.   영달이 지븅에 기와를 올리기 전, 기둥에 바른 옻이 단곡댁에게 올라 붙은 후부터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온몸이 부어올랐다.  영달이 약을 구해 먹인 후에  부기는 조금  빠졌으나  전신에 수포가 생겼고 수포가  터진 자리에서  진물이 흐르며  전신에 열이 났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단곡댁을 괴롭히는 것은 가려움증이었다.  어떤 약도, 처방도  듣지 않았다.  피딱지가 앉은 몸을 긁다가 겨우 방에서 잠이 든  단곡댁은  마당 흙바닥에 얼굴을 비비며 눈을 떴다.  거문고를  타러 장터에도 가지 못하고 영달이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연명하며   두문불출하다가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홀연히  사라졌다.  며칠마다 한 번씩 만일이 방문해  변해가는  집을 구경하고 기와 올리는 것을 도우며 단곡댁의 소식을 물었지만  영달도 아는 바가 없었다.   만일은 거문고가 같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옻을 피해  다른 곳으로 잠시 요양을 갔을 것이라고 말하며 장마 구름이 밀려오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코를 훌쩍거렸다.  몽이가 돌아오면 단곡댁도 돌아올 것이라며  산을 향해  "몽아. 몽아. 어디에 있냐"라고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다.   단곡댁이 사라진 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도깨비터에 지은 집엔 사람이 오래 붙어살 수 없기에 때가 되어  떠난 것이라고 덤덤하게 말했지만   시원섭섭한 기색을 감추진 못했다.   변비에 시달려  얼굴이 노래진  독바우댁은 단곡댁의 소식을 듣자마자 오랜만에 강한 변의를 느끼고 뒷간에  달려가  까만 똥을 시원하게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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