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2] 경계선 성격 성향의 교사
새 학기, 3월의 교무실은 아난야에게 거대한 무대와 같았다. 아난야는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새 학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난야는 마치 온 세상을 다 품은 듯한 미소로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3월에 새로운 학교로 발령받은 아난야는 교무실의 다른 교사들에게 매우 깍뜻하게 대했다. 또한 다른 선생님에 대해 세심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타인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녀는 특히 학년부장인 아샤 부장에게 지극정성이었다.
‘부장님, 오늘 퇴근하고 뭐 하세요? 제가 정말 핫한 카페를 찾았어요. 같이 가요. “
아난야는 퇴근시간이 지나도 퇴근을 하지 않았다. 아샤 부장이 서류 정리를 마칠 때까지 할 일이 있는 것처럼 자리를 지키다가, 그녀가 가방을 챙기면 마치 우연인 듯 나타나 곁을 지켰다. 아난야에 아샤 부장은 이 낯설고 험난한 학교라는 정글에서 자신을 지켜줄 유일한 '구원자'이자 '완벽한 스승'이었다. 아난야는 아샤 부장이 좋아하는 커피는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다가 아침마다 커피를 한잔을 책상 위에 슬쩍 올려두는 것처럼 아샤 부장을 보필하고 싶어 했다. 뿐만 아니라 아샤 부장의 모든 것을 궁금해하게 생각하였고,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늘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찬란한 이상화의 유효기간은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아난야 샘, 이 공문 말이에요. 여기 날짜가 틀렸네요. 다음부턴 요건 부분도 한번 더 체크해서 떠 꼼꼼히 봐줘."
아샤 부장의 피드백은 일상적이었다. 사실 아샤 부장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난야의 귀에는 그것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꽂혔다. 그 순간 아샤 부장은 '완벽한 스승'에서 '자신을 무시하며, 핏박하는 악마'로 돌변했다. 다음 날부터 아난야는 아샤 부장의 인사를 대놓고 무시했다. 뿐만 아니라 아샤 부장님 지나가기만 해도 그녀를 노려 보았다. 급식실에서는 동료교사를 붙잡고 눈물을 쏟으며, 아샤 부장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부장님이 어떻게 저한테 그러실 수 있죠? 그동안 제가 어떻게 해드렸는데... 이건 명백한 갑질이에요. 저를 파렴치한 인간으로 몰아세우셨다고요. "
아난야의 급작스러운 태세전환은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학기 초, 그녀는 학생들에게 한없이 상냥하고 착한 '천사 선생님'이었다. 다른 교사들이 엄격하게 지도할 때, 그녀는 아이들 편에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다른 선생님이 오늘 많이 바쁘셨나 보다.", "선생님이 도와줄게."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담임으로 해야 할 일이나 책임져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녀는 교묘하게 몸을 사렸다. 학생들에게 가정통신문이나 학부모 동의서 등을 수거하여 담당자에게 전달하는 일처럼 단순한 책임조차 피하려고 했다.
"반장, 이 동의서 내일까지 수거해서 행정실에 제출하도록 해."
"네? 제가요? 다른 반은 담임선생님께 드리면 된다고 하던데요."
"이건 원래 반장이 책임져야 하는 거야. 이런 것도 못하면서 왜 반장은 한다고 했어? 아무튼 이거 제출하는 거에 문제가 생기면 반장인 너의 책임인 거야!"
아난야의 눈빛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아난야가 귀찮거나 하기 싫어서 이런 일을 피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아난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일에 과도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돕지 않는 아이들은 이제 그녀에게 배신자였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학생들과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담임선생님이 해야 할 일이나 책임까지 떠맡기는 아난야를 다른 선생님들에게 가서 비난했다. 그렇게 다른 선생님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아난야는 학생들에게 모욕감과 치욕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더 이상 소통하지 않으려고 했다. 담임교사와 함께 해야 하는 체육대회 날조차 운동장에 한 번도 내려가지 않았다. 체육대회날 아난야 반의 반장은 담임선생님인 아난야에게 화가 났다. 다른 반 선생님들은 반 학생들을 응원도 해주고 더운 날 땀 흘리면 운동하는 아이들을 위해 아이스크림과 물을 사주기도 했다. 다른 반 선생님과 학생들이 똘똘 뭉쳐 체육대회를 하는 동안 아난야 반의 학생들은 학생들끼리 서로 응원하며 허전한 마음으로 체육대회를 해야 했다.
"선생님,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희가 잘 못한 부분도 있지만 체육대회날 한 번도 우리 반이 있는 곳으로 안 와보시는 것은 아니죠. 담임선생님이시잖아요!"
"너네는 나를 담임선생님으로 생각하니?"
아샤 부장은 교무실로 들어오고 있는 아난야를 불러 세웠다.
"아난야 선생님, 저랑 이야기 좀 하시지요."
"무슨 일이신데요?"
아난야는 아샤 부장을 노려보았다.
"요즘 아난야 선생님 업무가 전혀 안되고 있는 거 알아요? 자기 업무를 못하면 부장인 나와 상의를 해야 하잖아요? 내가 아냔야 선생님 업무를 하나하나 다 챙길 수도 없고요."
"지금 저한테 공격하시는 거죠. 이제 더 이상 참지 않겠습니다."
아난야는 몸을 떨며 반박했다.
그날 저녁 아난야는 극단적인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한밤중, 교감선생님의 핸드폰에는 장문의 문자가 도착했다.
[교감선생님, 학교생활이 너무 괴롭습니다. 저희 부장님도 저를 무시하고, 인간이하의 취급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도 담임인 저를 무시하고 대들기도 하고, 저를 교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를 욕하고 다닙니다. 제가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도와주고 같이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매일매일 공격받고 힘듭니다. 이대로는 더 이상 견딜 힘이 없습니다.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학교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동료교사들은 이제 아난야에게 누구 하나 말을 붙이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동료교사들끼리 교무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티타임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난야는 자신을 그 티타임에 초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교사 휴게실 문을 잠그고 한 시간 동안 통곡하며 자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적당한 관계라는 것은 없었다. 관계는 언제나 극도의 환희이거나, 참혹한 파멸 중 하나였다.
학교 안에서 유독 감정의 기복이 극심하고, 타인을 천사와 악마로 극단적으로 나누어 평가하는 이들을 마주 할 때가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경계선 성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BPD) 성향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진단을 내리지는 못하지만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성향이 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한테도 약간의 이런 기복은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기도 하고 사람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증상이 심해 자신의 사회생활에 영향을 미치게 된고, 이런 일들이 반복된다면 자신에게 이러한 성향이 강하지 않을까라고 의심해봐야 합니다.
BPD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이야기 속 아난야가 아샤 부장을 관계 초기에 완벽한 존재로 추앙하다가 사소한 지적 한 번에 '갑질 상관'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전형적인 예입니다. 이들은 상대가 자신의 기대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그간의 신뢰를 모두 지워버리고 상대를 완전히 악한 존재로 규정합니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어제의 그와 오늘의 그는 완전 다른 사람이니까요.
또한, 이들은 타인에게 버림받는 것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느낍니다. 동료들이 자신을 빼고 티타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에 무너지는 듯한 고통을 겪습니다. 이러한 '유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관리자에게 죽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는 등 극단적인 감정 표현을 통해 타인의 관심과 확인을 받고자 합니다.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이들은 종종 상황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담임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학생에게 전가하면서도 자신이 힘든 상황에 처한 피해자임을 강조함으로써 비난의 화살을 피하려고 합니다. "내가 힘든 것은 저 사람의 괴롭힘 때문이야."라는 서사를 만들어냄으로써 내면의 혼란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이런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 까요? 첫 번째는 지나친 밀착을 경계해야 합니다. 상대가 초기에 과도한 호감을 보일 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초반에 과도하게 호감을 보이며,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요구하거나, 과도한 선물을 줄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이 어려워 일정한 선을 긋지 않고 밀착되어 버리면 그는 조만간에 필연적으로 올 '평가절하'의 순간에 더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업무 범위와 책임소재를 공적으로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합니다. 셋째는 상대의 비난이나 극단적인 행동에 똑같이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차분하고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조직의 파편화를 막는 방법입니다.
경계선 성향은 보인에게도 지옥 같은 순간들일 것입니다. 또한 함께하는 주변인에게도 깊은 외상을 입힙니다. 그들의 부안 뒤에 숨겨진 공허함을 이해는 해줄 수 있지만 자신의 심리적 안전거리를 확보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