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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점순 Feb 04. 2024

천기누설


소낙비를 맞으며 시집을 왔다. 이듬해 임신했고 바가지를 엎어 놓은 듯 배가 불러왔다. 아파도 약을 함부로 먹을 수 없었다. 기침은 찬바람이 거세질수록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콜록거렸다. 칠 남매가 사는 집안이 기침 소리로 가득 찼다. 시어머님은 혹여 내가 나쁜 병에 걸렸나 싶어 노심초사하셨다. 어릴 적 홍역을 앓은 후 시작된 지병이었다. 고된 시집살이에 병약했던 시절로 내 몸이 되돌아간 탓일까. 그래도 명줄은 질겼다. 가을에 딸이 태어났다.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문득 어린시절이 생각났다.

친정아버님은 천수답 몇 마지기로 생계를 이어갔다. 풍년이 들어도 일곱 식구 입에 겨우 풀칠을 할 정도였다. 삼 년 가뭄 끝에 유월 장대비가 내리는 날, 나는 엄마의 자궁 밖으로 밀려 나왔다. 모내기철이었다. 마른 논에는 물이 콸콸 흘러 들어갔다. 엄마는 핏덩이를 강보에 싸서 밀쳐놓았다. 악을 쓰고 우는 동안 굶어 죽지 말라고 긴 무명 끈으로 밥물을 받아 놓은 바가지에 띄어놓았다. 어둑해서 들에서 달려오면 아기의 발뒤꿈치가 피멍이 들었다. 젖을 제때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렸다. 물동이를 인 엄마 등에 매미처럼 붙어 찬 바람을 많이 쐬고 유행하던 홍역까지 걸렸다. 나의 유년 시절은 잔병으로 골골하며 수수깡처럼 키만 컸다. 

베란다 문을 열었다. 아침 공기가 시원한 바람을 몰고 왔다. 화단에는 계절을 따라 울긋불긋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찻잔을 들고 창가에 앉아 흘러간 날들을 돌아보았다. 제2의 인생은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일까. 나는 용케도 살아남아 결혼까지 하였다. 첫아이를 낳고 대가족의 수발로 이어졌다. 둘째를 덜컥 임신하고 예정일을 한 달 앞두었다. 시어머님이 부르셨다. “새아가, 큰아이도 있고 대식구에 산후 몸조리가 걱정이다.” 넌지시 친정에 갈 것을 권하였다. 하지만 농사일로 바쁜 엄마가 내 뒷바라지를 못 할 것 같았다. 시어머님의 방으로 갔다. 여기서 아기를 낳고 싶다고 모깃소리만 하게 말했다. 긴 침묵 끝에 시어머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며칠 후 방문 앞에 인기척이 났다. 배불뚝이로 일어나 문을 여는 순간 찬바람이 밀려왔다. 시어머님이 “쉬!” 검지를 입술에 대었다. 그러고는 검정 통치마를 위로 훌렁 들치고 고쟁이 주머니를 닫은 옷핀을 풀었다. 무명천에 돌돌 말린 뭉치를 꺼냈다. “이것 받아라. 산후조리에 써라.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란다.” 가슴에 쿡 찔러 주고 누가 볼까 봐 방문을 닫았다. 얼떨결에 양손으로 덥석 받고는 돌아선 어머니 등 뒤에 대고 “어머님, 고맙습니다.” 했다. 뒤돌아보며 내일 큰동서에게 산후조리 부탁을 하라고 말한 뒤 입단속까지 시켰다. 두툼한 봉투에는 돈과 쪽지가 들어 있었다. 몇 겹을 싸서 얼마나 몸에 지니고 다녔으면 손때가 반지르르했다. 

“명심하고, 또 명심하여라. 오늘 일은 무덤까지 가져가거라.”

이튿날이었다. 큰동서에게 내일 저녁은 밖에서 먹자고 했다. 토끼 눈을 뜬 형님이 무슨 일이냐며 어리둥절했다. 사방에 눈들이 많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논둑길을 고양이처럼 걸어갔다. 먼저 금은방으로 가서 형님의 목걸이를 맞추고 양장점에서 투피스 한 벌을 해 드렸다. 갈빗집으로 형님의 팔을 잡아끌었다. 소갈비 몇 대를 앞에 놓고 소주잔을 권하며 고단한 시집살이 회포를 풀어주었다. 밀밭에만 가도 쓰러지는 내 얼굴에 술이 발그레 올랐다. 형님, 친정에 가도 조리해 줄 사람이 없어요. 소주 몇 잔에 형님은 알딸딸한 기분인지 시원하게 대답을 했다. “이 사람아, 진즉에 말할 것이지. 내가 책임지고 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게나.”

효과는 직방이었다. 입이 간질거렸다. 양심상 괴로워서 천기누설을 하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자네가 내 팔을 잡아끌 때부터 알아챘지. 내친김에 용기를 내어 애교를 부렸다. “돈이 생기면 형님에게 목걸이를 해 드리고 싶었거든요.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고 몇 번이나 예쁘다고 했잖아요. 시집올 때 예단으로 금목걸이를 못 받았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걸렸어요.” 형님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시어머님의 속내도 나는 훤하게 꿰뚫어 보았다. 큰며느리에게 목걸이를 해주고 싶었지만 명분이 없었다. 이번에 두 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을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 주셨다. 그날부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출산을 기다렸다. 

이십 년 만의 폭설이었다. 세상의 길은 모두 막혔다. 초저녁부터 산기가 있어 혼자 강아지처럼 끙끙거렸다. 철없는 남편은 아는지 모르는지 친구들과 얼음 밑에 잠자는 물고기를 잡아 온다고 나갔다. 한밤중에 진통은 더 짧은 주기로 강하게 왔고 호흡이 멈출 지경이었다. 마당에 쌓인 눈에 무릎까지 빠졌다. 큰형님의 방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다가 눈밭에 엎드렸다. 졸음이 쏟아지고 정신은 혼미해졌다. 모두들 꿈나라에 들어갔다. 산파를 부를 수도 병원에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30분, 10분, 5분 간격으로 배를 비틀어 쥐어짜는 고통이었다. 형님, 형님, 큰 소리로 불러도 인기척이 없었다.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큰동서가 맨발로 쫓아 나왔다. “이런 미련한 사람을 보았나.” 방에 들어가서 누웠는데 천장에서 별이 몇 번이나 번쩍거렸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세상을 울렸다. 함박눈은 모든 근심을 덮었다. 장독대, 나뭇가지, 기와지붕에도 소복소복 쌓였다. 형님은 아기의 탯줄을 가위로 잘랐다. 실로 묶는 동안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손 떨림이 전해졌다. 핏덩이를 따뜻한 물로 깨끗하게 씻어 주니 강보에 싸여 눈알을 굴리다가 쿨쿨 잠이 들었다. 뜨거운 구들장 위에 드러누워 근간의 일을 돌아보았다. 바람개비처럼 허약한 며느리를 배려해 준 시어머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해 속울음이 차올랐다. 이튿날 딸이 순산했다는 전화를 받고 친정어머니가 달려왔다. 토종꿀과 미역, 북어를 가져다주었다. 뜨거운 물에 꿀을 타 마시니 온몸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껌 딱지처럼 달라붙었던 홍역 기침이 딱, 떨어졌다. 역시 명약 중의 명약은 사랑이었다. 

옷을 몇 벌씩 갈아입었다. 그 많은 빨랫감을 큰동서가 얼음 구덩이를 방망이로 깨고 빨아왔다. 집에는 보는 눈도 많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방에 누워 있으니 작은형님들의 원성이 우물가에서 시끌시끌 들려왔다. 귀가 간질거려 방문을 열었더니 큰동서가 호통을 쳤다. “산모가 하루속히 몸을 회복해야지. 자네, 아니라도 일할 사람은 많아.” 그 말 한마디로 온 집안의 잡음을 한순간에 잠재웠다. 산후조리를 한 후 개나리꽃이 만개할 때 밖으로 나왔다. 그때까지도 나는 철이 없었는지 시어머님의 뜻을 잘 몰랐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천기누설을 하지 않았다. 그런 깊은 속정을 뒤늦게 알게 되어 가슴을 울렸다. 명절 때만 찾아뵙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울로 올라왔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시어머니의 며느리에 대한 측은지심이었을까. 오랜 세월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 비밀의 문을 열어야 할 때이다. 시어머님의 제사 때 내려갔다. 형제들은 제사상에 절을 두 번씩 하고 바쁘다며 다 돌아가고 형님과 단둘이 남았다. 

춘삼월 꽃구경을 나섰다. 산수유와 매화꽃이 싱글벙글 웃었다. 그 옛날처럼 갈비가 지글지글 구워지는 동안 막걸리를 한 잔, 두 잔, 석 잔을 들이부었다. 나는 형님에게 천기누설을 하였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형님의 얼굴 사이사이로 사계절이 휙휙 지나갔다. 눈가에 이슬방울이 맺혔다가 주름진 골짜기로 흐르고 흘렀다. 한참 후 형님의 환한 얼굴에 홍매화가 활짝 피었다. 

“이 사람아, 순진하기는. 시어머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주었어. 자네가 동생 같아서 산후바라지를 해준 걸세. 사랑은 내리사랑이라잖아.” “어머,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휴.” 

골목길에서 손을 마주 잡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불렀다. 

“어머님, 어머님, 어머님, 고맙습니다.” 그 메아리는 맞은편 앞산을 휘돌아 세상을 향해 멀리멀리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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