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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점순 Feb 04. 2024

아버지의 탈출기

아이들 여름방학이다. 친정아버지가 지병으로 고생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가는 길이다. 아버지는 서른 살에 일본의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후 원인을 모르는 병을 앓았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에게 물귀신이 들었다고 성화를 했다. 그러나 어릴 적 자식들에게는 늘 자상한 아버지였다. 겨울밤에 화롯불을 피워 놓고 전쟁 이야기를 해 주셨다. 고사리 같은 손에 땀이 축축하게 고이도록 긴장감이 온몸에 감돌고 이야기 뒤로 다정한 미소가 짙어졌다.

청량리역에서 아이들과 무궁화호를 타고 친정으로 향했다. 기차가 철거덕거리는 소리는 엄마가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북소리처럼 들렸다. 비가 내리면 아버지는 낚싯대를 메고 저수지로 달려갔다. 논밭이 묵어 빠져도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물속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런 아버지를 엄마는 못마땅하게 여겼다.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전쟁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어릴적 각인되었던 시간들이 철로를 따라 달려왔다. 


우르르. 바닷물이 솟구쳐 올랐다. 캄캄한 검은 바닷속에서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갱 속으로 바닷물이 차서 굴이 무너져 내렸다. 하시마 탄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버지와 중국인 몇 명뿐이었다. 사람들이 죽어 나와도 그들은 채찍질을 해대며 나무동발을 세우라며 계속 작업을 시켰다. 그렇게 캐낸 석탄으로 일본은 식민지를 개척했고,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진출했다. 아버지는 천하장사였지만 전쟁터로 끌려갔다. 세상 밖으로 살아서 나올 수 없었기에 탈출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일본은 내부에 고발자를 심어 두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도망치다 붙잡혀 죽도록 매를 맞기를 반복했다. 이튿날 밤 화장터에서 목탁소리가 똑똑 들릴 때마다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하늘로 흩어졌다. 아버지는 탈출하다가 붙잡혀 죽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꾸었다. 징용으로 끌려온 동료들과 모의를 하였다.

그날이 왔다. 탈출을 해야만 했다.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도망치다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였다. 조선인들을 강제로 모집할 때 천황에게 충성하면 돈도 많이 주고 대우도 좋다고 설득해 모집해갔다. 스미스 회사와 임금을 체결할 때 돈은 예금해 두었다가 고향으로 부쳐주기로 했지만, 한 푼도 부쳐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보통 사람 세 몫을 해냈다. 아시아 몇 개국을 끌려다니며 굴을 파거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활주로를 닦았다. 밤마다 꿈속에서 수백 번 고향으로 달리고 달렸다. 하지만 한번 족쇄에 묶인 발목은 발버둥 칠수록 옥죄여졌다. 온갖 폭행과 굶주림으로 시달려 더는 참을 수가 없었기에 뗏목을 타고 탈출을 하였다. 

‘왱 왱.’

한밤중이었다. 대낮같이 밝았다. 탈출 신호를 받아 조선인들은 바다로 풍덩풍덩 뛰어내렸다. 정적을 깨는 총소리가 콩을 볶듯 탕, 탕, 탕. 총알이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몇 명만 도망가고 모두 붙잡혔다. 죄목이 덧씌워졌다.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돌아가며 몽둥이질을 했다. 사람들은 입에 허연 거품을 물고 죽어갔다. 아버지는 주동자로 몰려 멀고도 먼 베트남 정글로 끌려갔다. 그곳에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말해 준 사람은 없었다. 조선인들은 어디를 가도 기다리는 것은 학대와 노동력 착취뿐이었다. 연합군들이 포위망을 점점 좁혀왔다. 보급로가 차단되어 며칠씩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파충류를 잡아먹고 푸성귀를 삼키며 목숨을 연명했다. 먼저 끌려온 다국적군 전쟁 포로들이 넘쳐났다. 젖먹이를 안고 있는 아낙네, 솜털이 뽀송뽀송한 소녀들과 머리에 쇠똥도 벗겨지지 않은 소년들이었다. 하늘과 땅과 숲속의 뭇 짐승들이 지켜보는 거짓말 같은 악행으로 치닫고 있었다. 1945년 8월이었다.

‘원폭 투하.’

일본은 패망했다. 천황이 항복하고 조선은 해방이 되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아버지는 전쟁터를 전전하며 5개국 언어를 구사했다. 베트남, 대만, 인도, 월남, 만주의 현지인들과 소통을 할 수 있었다. 한밤중 군인들이 숙덕거렸다. “흔적을 남기지 말고 저것들을 모두 쓸어버려.” 그 비밀 작전회의를 아버지가 몰래 엿들었다. 혼자 탈출할 용기가 없어 몇 사람을 깨웠다. 아, 드디어 탈출이 시작되었다.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다. 입은 채로 간단한 소지품만 챙겼다. 여명이 희뿌옇게 밝아 오는 틈을 이용해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새벽녘 사람들의 비명이 골짜기를 굽이굽이 메아리치며 산꼭대기로 올라왔다.

‘탕탕. 드르륵. 드르륵.’ 

따발총 소리였다. 새벽을 흔들어 깨웠다. 뭇 새들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산 전체가 요동을 쳤다. 높은 산에서 보지 말아야 할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포로들과 부녀자들 할 것 없이 산 사람들을 구덩이로 몰아넣었다. 차마 그 참상을 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을 생생하게 전해주셨다. 어릴 적 손에 땀을 쥐게 하였고 스릴이 넘치는 이야기를 고장 난 라디오처럼 수백 번 반복해서 들려줬다. 아버지의 허리춤에는 목숨보다 귀한 전대를 간직했지만, 패망한 나라의 지폐는 낙엽처럼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정글 속에서 해방을 맞이한 조선인들은 국제 미아가 되었다가 사탕수수 농장을 전전하며 뱃삯을 마련하여 겨우 돌아왔다. 가족들과 뜨거운 해후도 잠시, 3년 후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깊은 산골에 숨겨두었던 큰오빠가 인민군에게 잡혀갔다. 온 집안을 끝없는 전쟁의 공포로 다시 몰아넣었다. 아버지가 일본의 징용으로 5개국을 끌려다녔던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철없이 재미있다고 깔깔거렸는데 오늘은 심장을 꿰뚫듯 아려왔다.

요즘도 물고기만 보면 손끝이 아려온다. 얼마 전 남편이 친구들과 냇가에서 붕어를 잡아왔다. 얼큰하게 찌개를 맛있게 끓이다가 울컥거렸다. 아버지의 낚시는 단순한 취미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들 보기에는 물고기를 낚는 것처럼 보였으나 잡은 물고기는 주문을 외운 후 도로 강에 던졌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 하시마섬으로 보내졌던 징용 노동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이제 아버지는 그 옛날에 생사를 넘나들던 친구들에게로 돌아가려는 시간이 왔다. 그 한을 풀어주어야 했건만, 우리 후손들은 기억해 주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사랑방에 들어갔다. 마당에는 동네 사람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 아버지 앞에 주저앉았다.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사람의 귀가 제일 마지막까지 들린다고 했는데 울음소리를 신호로 잿불처럼 사그라졌다. 내 삶을 지탱해 주었던 아버지의 탈출 이야기가 해방 71년 만에 끊어졌다. 징용 노동자들처럼 한 줌의 흙으로 부슬부슬 흘러내린다. 

‘아버지, 평안하소서.’ 

이제 내가 전해야 할 때가 왔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다시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아버지의 탈출 이야기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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