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풍주의보가 내린 비바람이 치는 아침. 집에서 편도 한 시간이 넘는 거리인 매O역까지 발레수업을 예약했다. 날씨 탓인지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었다. 누룽지에 뜨신 물을 부어 호로록 삼키며 비가 추적추적 내리치는 창 밖을 보고 있으니 이 비를 뚫고 갈 긴 여정이 벌써부터 막막하다. 따뜻하고 꼬순 냄새나는 내 고양이를 껴안고 다시 이불 안 동굴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제와 취소도 안 되고 출석 안 하면 날아갈 수강료가 아까워 힘겹게 몸을 일으켜 나간다.
출근시간을 조금 넘긴 지하철 안. 오랜만에 사방으로 부대끼는 사람들 사이에서 힘겹게 중심을 잡고 한 시간여를 가고 있노라니 현타가 온다. 내가 나이 들어 발레리나 될 것도 아니고 무슨 덕을 보겠다고 고생을 사서 하고 있나. 나는 무엇에 이렇게 진심인가. 문득 이 모든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가는 길이 힘에 부치고 부질없다.
몇 개의 물웅덩이를 참방 거리며 건너고 낯선 동네의 학원에 도착했다. 젖은 우산에 물기를 털어내고 처음 뵙는 선생님과 인사를 나눈다. 낑낑거리며 좁은 탈의실에서 환복하고 눅눅한 공기의 회색 고무바닥 홀에 들어섰다. 이른 오전 수업부터 부지런히 나와 친목을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 나 혼자 이방인이다. 맨 구석자리 한 켠에 차가운 발레 바를 잡고 어색한 공기를 잠깐 견딘다. 곧 선생님이 들어와 순서를 주시고 익숙한 클래식 음악이 나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하면 차츰 몸이 데워진다.
‘아 내가 이 시간을 위해 여기까지 왔지.’
춤이란 것에는 애초에 재능이 없었다. 주일학교에서 크리스마스에 무대에 올릴 군무를 준비할 때면 오른쪽 왼쪽 천지 분간을 못해 혼자 독무를 창작하고 수녀님의 인내심을 시험에 들게 하는 어린이였다. 마침 동네에는 집에서 지척 거리에 발레학원이 있었고 성인 취미반이 개설돼있었다. 3개월을 끊으면 수강료 할인에 발레복 3종 세트를 증정한 다기에 덜컥 장기등록을 해버렸다.
나의 첫 발레수업은 자기혐오를 견디는 시간이었다. 발레복을 갖춰 입은 내 모습은 상상과는 너무 달라 충격에 패닉이 올 것만 같았다. 검정색 L사이즈 신축성 없는 면 소재 반팔 레오타드에 몸을 겨우 끼워 넣고 온 사방이 거울인 공간에 우뚝 서니 나 혼자 헐벗은 기분이다. 학원에서 받은 발레 스커트는 원래 이런 건가 싶게 내 엉덩이를 가리기에는 천이 한참 부족했고, 몸 선이 다 드러나게 딱 붙는 레오타드는 구부정한 어깨와 거북목, 솟은 승모근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이미 알고 있지만 가리고 싶은 나의 콤플렉스가 만천하에 까발려지는 것도 모자라 계속 지적받는 경험은 쥐구멍에 숨고 싶게 창피했다.
허리가 한 줌인 요정 같은 선생님이 보여주는 우아하고 가벼운 동작이 내가 흉내 내면 애처로운 몸부림이다.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60분 수업이 끝나고 ‘근육통이 있을 거예요.’ 해맑게 웃으며 건넨 선생님의 말은 예언처럼 내 몸을 덮쳐 일주일을 끙끙 앓았다. 몸이 내 맘같이 움직이지 않아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되는 데서 오는 치욕감 가운데, 스물스물 올라오는 묘한 희열과 오기가 나를 발레에 차츰 빠져들게 했던 것 같다.
발레라는 종목의 특성상 몇 년을 해도 같은 루틴을 매 수업에서 반복한다. 최대치의 인체 유연성과 늘려 쓰는 근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내 몸이 구체관절 인형이 아닌 이상 1%의 피지컬을 타고난 전문 무용수도 매일이 도전인 종목이다. 이 말인 즉 슨 재능이 없는 사람도 그냥 버티면서 반복하다 보면 하나 둘 규칙과 패턴에 익숙해지게 되고, 애초에 완벽이란 것이 불가능 한 종목이므로 프로도 아닌 내가 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자기 합리화가 가능해진다. 그렇게 뻔뻔하게 정신 승리하면서 꾸역꾸역 하다 보니 가장 오랜 시간과 자원을 투자한 취미생활이 발레가 되었다.
발레를 발레스럽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에폴망(epaulement)이다. 동작을 하면서 코끝으로 쓰는 시선과 정면, 측면, 사선 등 다양한 방향을 함께 구사하는, 배움의 단계로 보자면 초 중급 이상의 발레 스킬이다. 하늘하늘 손, 팔다리 까딱까딱 거리는 것처럼 보여도 발레는 생각보다 과격한 운동이다. 내 다리 한 짝 공중으로 들어 올리기가 세상 무겁고, 발끝으로 중심 잡는 것은 코어가 없으면 몇 초 버티기가 쉽지 않다. 뻥뻥 다리를 힘차게 들어 올려 차는 동작인 바뜨망(battement)은 에폴망이 없이 수행하면 태권도 발차기와 다를 바가 없을 테다. 발레를 다만 운동이 아니라 춤으로 완성시키는 것이 바로 에폴망이라 하겠다.
이 우아함, 소위 예쁜 척은 여유로움에서 비롯된다. 수면 아래 바쁘게 발구르고 있을지 언정 유유히 유영하는것처럼 보이는 백조처럼 여유 있게. 그렇지만 현실은 조금만 순서가 복잡하고 길어져도 힘에 부쳐 표정부터 심각해지고, 다음 동작 수행에 급급해 뚝딱거리는 목각인형이 되니 선생님의 목소리가 다급 해진다.
“여러분 표정이 너무 심각해요 숨 쉬세요. 힘들어도 웃어요! 발레는 절대 조급해 보이면 안 돼욧!!”
180도 다리 찢기나 폭발하는 것 같은 그랑 점프는 이번 생엔 완성 못 시켜도 우아하고 여유롭게 웃는 얼굴로 에폴망 하는 할매리나가 되어 오래오래 건강하게 발레 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자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