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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Oct 01. 2023

제사

[정갈한 앞치마를 두르고, 재료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손질하고, 전 부치고, 나물 무치고, 생선 굽고, 국물 진한 탕국을 끓여내고...... 그리하여 내 남편은 잘 닦아 놓은 제기 위에 준비한 제수 음식을 올려내고,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낸다.]


남편을 만나기 전, 20대의 나는 현실적 고충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사 의식에 대하여 철없는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40년 지기 내 친구 y는 어느 날 나와 만나서 고민을 이야기했는데 어머니께서 y와 몇 년째 교제를 이어오던 남자친구를 만나 보았고, 그 남자친구가 집안의 종손이라는 것을, 또 제사가 일 년에 n번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결사반대를 하신다는 것이었다. 이제 스물다섯을 넘긴 나와 y는 어머니의 '결사반대'를 당최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일 년에 제사 몇 번 지내는 게 뭐 어때서?" 하면서 치기 어린 논리를 펼치기도 했다.(어머니 그때 죄송했습니다.) 그러면서 커리어 우먼과 현모양처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자는 이상한 결론을 내리고는 술잔을 부딪치면서 응원하고 위로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던 우리의 모습에 웃음만 난다.


20년이 넘는 결혼생활 동안 딱히 제사에 대한 스트레스나 증후군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결혼하고 내가 참석한 제사는 10번도 채 안되기 때문이다. 나의 시댁이 작은집이라는 이유도 있으나 더 큰 이유는 명절 기간 대부분 남편의 근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큰집 아주버님, 형님께서 준비하시는 조부모님의 기제사는 남편이 항상 참석했고, 나는 주말이나 공휴일에 겹칠 때만 참석해서 제수음식을 준비하시는 형님을 짤막하게 도와드린 게 전부였다. 명절에 남편의 근무가 겹쳐지면 시부모님께서 아예 우리 집으로 오셔서 이틀, 사흘 정도를 머무르셨다가 가셨기 때문에 우리 식구들이 먹을 나물 서너 가지와 남편과 내가 좋아하는 꼬치전과 새우튀김 정도 준비하는 것이 전부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조부모님 기제사 때나 시부모님께서 우리 집으로 오지 못하는 명절에는 어머니께서 조카며느리인 형님과 함께 큰집에서 제수음식을 준비하셨다는 것이다. 어른에 대하여, 제사에 대하여 언행이 늘 일치하는 아주버님도 당신은 지키시지만 다른 가족들에게는 제사에 대하여 그 어떤 강요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고 보면 나의 현모양처 욕구가 작동해서 20여 년 동안 제사 증후군이 없었던 게 아니라 주변의 환경과 너그러운 배려가 나로 하여금 제사를 무던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지난달 중순, 돌아가신 시아버님의 첫 기제사가 있었다. 제사를 모시지 말고, 각자의 방식으로 알아서 추모하자는 시누이의 의견에 어머니와 남편은 동의했지만 막상 때가 되자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지나가기엔 많이 섭섭하셨을까, 7월 즈음 나에게 제기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에 대해 의견을 물으시면서 제사에 대한 의지를 내비치셨다. 나와 남편은 제사 당일 휴가를 내고 아침 일찍 시댁 남해로 향했다.


첫 기제사여서인지 어머니는 정말 많은 준비를 하셨다. 나는 [정갈한 앞치마를 두르고, 재료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손질하고, 전 부치고, 나물 무치고, 생선 굽고, 국물 진한 탕국을 끓여내고......]할 정신이 없었다. 소주 회사에서 나온 '**소주'가 크게 프린트된 앞치마를 두르고 어머니의 지시에 이것저것 하긴 하는데 굼뜨기 짝이 없고, 얼굴에 부침가루가 묻은 지도 모른 채 그렇게 이어가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큰집 형님께서 오후 반휴를 내고 오셔서 도와주셨다. 구원투수 형님이 오시자 비로소 속도가 붙었고 완성된 음식의 성과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고 제사상을 차리자고 다시 분주히 움직이자 남편은 작년 12월 큰 아버님 제사 때 찍어 둔 제사상 사진을 보면서 제기에 올려진 음식 하나하나를 상위에 올렸다. 그리고 꼭 한 가지 올리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서 아버님께서 생전에 즐겨드시던 믹스 커피를 타서 제사상에 올렸다. 그걸 본 아주버님은 "너무 잘했다." 하시면서 남편에게 칭찬을 하셨다.


제사를 마치고 모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맛있게 식사도 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아버님 덕분에 이런 뜻깊은 시간을 가지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

또 반면에 '제사, 쉬운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20년 전 나와 y는 진짜 철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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