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소 Dec 02. 2024

아름다운 슬로 시티(slow city), 티미쇼아라

루마니아, 티미쇼아라를 방문하다.

오라데아(Oradea)에서 34일의 멋진 시간을  보낸  우리는  오라데아에서  시간  떨어져  있는 도시, 티미쇼아라(Timisoara)로 향했다.          

신석기시대와 로마 시대에 사람이 거주했던 이곳은 로마인들을  시작으로  헝가리인, 투르크인의 지배를 거쳐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다가  1920 루마니아로  합병된 도시이다.

1차 세계대전 이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땅이었던 이곳은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집권을 했던 동안 감시를 심하게 받은 곳이기도 했는데 아마도 헝가리 인들이 대다수 거주하고 있던 도시였던 만큼 헝가리 인들에 대한 감시와 억압이 심했다고 한다.


도시 이름은 '테메시 강변의 성'이라는 헝가리어에서 유래했고 이  도시의 별칭은 '작은 비엔나 (Mica Vienă)'와 '장미의 도시(Orașul florilor)'로 알려져 있다.

특히 베가 강(Vega river)이 도시의 중심부를 관통하며 흐르고 운하를 따라 나무 우거진 공원들이  조성되어 있어 아름다운 도시로 떠오르고 있다.      



체크인 시간 4시간 전인데도  호스트가 친절하게 우릴 맞아주고 6층의 밝고 전망 좋은 집이 우리를 반긴다.

숙소는 vega 강 근처 공원 바로 옆, 공원까지는 걸어서 50m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고 올드타운까지도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라 이동이 편한 곳이다.     

숙소에 들어가 곧장 발코니로 나가니 바로 숲 우거진 공원이  보이고 근처 올드타운에 있는 유대교 대성당의 독특하고 멋진 지붕도 보인다.

공원 나무들 사이로  잔잔히 흐르는 베가강도 보인다.  


운전을 하느라 피곤했지만 숙소에 머물기 아쉬워 결국 우리는 짐을 풀지도 않은 채 올드타운으로 향했다.

오래된 나무들과 푸른 잔디가 잘 조성된 공원을 가로질러 걷는데 공원에 강이 흐르니 마치 숲 속에 있는 느낌이 들어 편안한 마음이 든다.

푸릇한 잔디에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고 아이들과 함께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가족을 보니 도시 분위기가 여유롭고 무척 편한 느낌이다.

베가 강의 폭이 넓지 않은데도 유람선이 다녀 우리도 도시 산책 후 이 유람선을 타보기로 했다.

유람선을 타고 베가 강을 따라 유람하면 티미쇼아라의 이곳저곳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리의 왕관모양 장식 위에 자물쇠들이 걸려있는 걸 보니 미소가 지어진다. 세계 어느 곳을 방문해도 다리 위 자물쇠 풍경은 반드시 있다.     

도시를 걷는 내내 녹지와 공원이 많고 거리마다 벤치도 많아 여기저기 쉴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도시의 벤치가 눈에 자주 들어오는 걸 보니 내 다리가 점점 의자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아 조금은 속상한 마음도 든다.

세월에는 장사 없다.’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 시간에 대한 미련도 생긴다.


도시 여기저기를 둘러보는데 작년에 머물렀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와 분위기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내게 있어 부다페스트는 아름다움과 고풍스러움이 어우러진 멋진 도시로 기억되는데 티미쇼아라 또한 잔잔한 옛 풍취 속에서 편안함과 여유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처음 마주하는 도시인데도 왠지 편안하다.          

티미쇼아라 거리 풍경


티미쇼아라가 '장미도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듯 거리에는 장미로 장식한 조형물이  여기저기  보인다.

장미공원으로 향하는데 근처에 들어서자마자 장미향이 코를 찌른다.

베가 강 옆에 자리한 장미공원은 영국식 정원과 프랑스식 정원으로 깨끗하고 말끔하게 정돈되어 장미향과 함께 아름다운 정원을 걷는 시간 내내 여행을 하며 지쳤던 나의 마음을 충전할 수 있게 했다.

넓은 정원에는 여러 색상의 장미들과 다양한 장미의 종(種)들이 산발적으로 피어있는데 이렇게나 다양한 장미 종들이 있는지 놀랍기도 하다.

장미들이 빼곡하게 피어있는 건 아니지만 크기도, 색상도  모양도 각기 다른 다양한 장미들이 정원 전체에 넝쿨져 있었다.

공주가 된 듯한 기분까지는 아니었어도 나름 우아하고 고상한 마음으로 매혹적인 장미향을 누리며 힐링하기엔 부족함이 없는 장소였다.


장미공원

 


장미공원에서 나온 우리는 성 삼위일체 정교회 대성당(Catedrala Mitropolitană din Timișoara )에 도착했다.

이 성당은 20세기초 몰도바 양식으로 지어진 정교회로 티미쇼아라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깎아지른 듯한 높이와 크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우리 숙소에서도 이 성당은 볼 수 있었다.

도시 중심부 한가운데 우뚝 선 모습이 가히 압도적이다.

 

정교회 대성당 외부

마치 고깔모자를 쓴 것 같은 앙증맞은 지붕모양의 정교회지만 내부에 들어가는 순간 분위기에 압도를 당한다.

많은 프레스코화와 섬세한 부조들이 어우러져 무척 웅장하고 성스러운 분위기가 내부 전체를 뒤덮고 있다.

교회 내부 벽 한 면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어 호화롭기 그지없는데 제단과 천장에 그려진 그림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교회 내부 한쪽에는 초를 꽂아 봉헌을 하는 곳이 있어 우리도 봉헌을 했다.

산자(Vii)와 죽은 자(morti)를 위해...     

정교회 내부 모습


티미쇼아라는 도시 중심에 공원이 많아 공원을 가로질러 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번화가를 걷는 대신 공원을 통해 산책하듯 다닐 수 있는 공원이 많은 도시이다.

우리도 Anton von  scudier park공원을 가로질러 지나가는데 오래된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분수도 힘차게 뿜어대니 기분이 편안해지고 피로감도 덜 느껴지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 공원도 며칠 전 부쿠레슈티 공원에서 본 것처럼 유명 인사들의 흉상들이 줄지어 서있다.

루마니아 공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공원 양쪽에는 벤치가 일렬로 있고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으니 그 가운데를 걸어가려면 마치 런웨이를 하듯 쑥스러운데 동양인이 우리뿐이라 더욱 눈길을 받는다.

이젠 익숙할 때도 된 듯싶은데 여전히 낯 뜨겁다.          

Anton von  scudier park



공원을 지나 빅토리  광장(VICTORY SQUARE)에 도착했다.

광장 주변에는 멋진 교회와 박물관 등을 비롯해 근대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눈요기도 된다.

광장의 양쪽에는 페르디난드 1세 부부의 흉상이 있고 좀 더 지나자 늑대 동상이 눈에 띄는데 암컷 늑대의 젖을 물고 있는 모습이다.

'루파 카피톨리나( Lupa Capitolina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조각상으로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Romulus)와 그의 쌍둥이 동생 레무스(Remus)가 암늑대의 젖을 물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탈리아가 루마니아와 라틴 정신의 뿌리가 같음을 확인하는 의미로 로마가 1926년에 기증했다고 한다.

루파 카피톨리나 조각


멀리 중앙에 흰색 대리석으로 깔끔하게 지어진 'The National Theater of Timisoara'가 정면에 있다.

'문화 궁전'이라고도 불리는 이 건물에서는 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이 이루어지는 곳인데 파란 하늘에 깨끗한 건물이 잘 어울려 한없이 평화롭게만 보인다.

하지만 1989년, 바로 이 광장에서는 루마니아 혁명의 발단이 되는 민중의 봉기가 일어났고 자유를 외치는 혁명의 시작이 이루어졌다.

승리 광장에 있는 티미쇼아라 국립극장


혁명의 발단은 반정부 발언을 한 헝가리 목사인 퇴케시 라슬로 (Tőkés  László) 목사가 체포되는 사건을 계기로 헝가리계 주민들의 불만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러한 항의는 점점 차우셰스쿠 정권에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와 이에 대한 정부군의 유혈 진압까지로 확산되게 되었다.

1989년 부쿠레슈티 광장에서의 시위(출처 : 나무위키)

사건을 시작으로 부쿠레슈티에서도 차우셰스쿠를 반대하는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고 결국 루마니아 전역으로 번지게 되었다.

즉, 차우셰스쿠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시위의 시발점이 바로 이곳, 티미쇼아라였던 것이다.

티미쇼아라는 단순히 아름답고 고풍스러움만을 지닌 도시가 아니라 시민을 위한 민주화 시위가 시작된 민주화의 큰 발걸음을 내딛게 한 루마니아의 혁명 도시였던 것이다.

마치 대한민국의 '광주'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 루마니아의 티미쇼아라라는 생각도 해본다.

티미쇼아라는 단순히 평화로운 아름다움으로만 채워진 도시가 아니었다.

혁명의 도시답게 광장 이름도 승리광장, 자유광장, 통일광장 등 무게와 의미가 강하게 느껴지는 이름들이다.


알바율리아거리의 아름다운 건물들 사이를 지나면 자유광장(liberty square)이 나온다.

크지 않은 아담한 광장인데 독특한 붉은색 바닥의 타일이 인상적이다.

광장 한쪽에 성모상이 보여 가보니 17세기에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후 전염병이 사라진 것에 대한 감사와 죽은 이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이라고 한다.

한가하고 조용한 광장 주변에는 멋진 건물로 지어진 갤러리와 카페와 그리고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어 한적한 광장 주변을 훨씬 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자유광장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에 거리에 세워진 가로등 모양의 기념물이 눈에 띄어 읽어보니  유럽최초로 전기 가로등 (electric street lighting)이 설치된 곳이 바로 티미쇼아라 라고 한다.

고풍스럽고 운치 있게만 보이던 이 도시가 현대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여 생활에 적용했다니 반전이다.    

좀 더 걸으니 오래된 시나고그(synagogues)를 만나게 되고 허물어져가는 오래된 성벽도 만나게 된다.

역사가 깊고 유적이 있는 길들을 걸으니 한층 더 고풍스러운 느낌이 든다.


남편이 찾아둔 레스토랑  'verarea700'이라는 곳에 방문했는데 이곳 역시 오래된 성터에 자리 잡은 식당이라 전통과 역사가 있어 보인다.

슈니첼과 생선튀김을 주문했는데 점심 식사로는 양이 많아 부담스럽다.     

여행을 하면서 겪는 불편함 중 하나가 외식을 할 때 나오는 식사의 양이 많아 우리 부부가 다 먹을 수 없어 남길 때가 많다는 것이다. 간혹 남은 음식을 싸가지고 오기도 하는데 한 사람 식사만 주문하는 게 불편해 두 사람 음식을 주문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식사 후 다시 도시를 걸어보는데 조금만 걸어도 공원이 자꾸 나타난다.

이번에는 보태니컬 가든 공원에 들렀다.

이 공원은 다른 공원과 달리 땅의 구조가 평평하지 않고 구릉들이 많아 산책하는데 지루하지 않다.

널따란 호수나 물을 뿜는 멋들어진 분수는 없지만 다채로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공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공원이 많고 벤치가 많아 쉬엄쉬엄 걷는다 해도 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보태니컬 공원 입구와 내부

 

마지막까지 힘을 내 유니언 스퀘어(Union Square)에 도착했다.

티미쇼아라에 있는 광장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마 가톨릭 성당과 루마니아 정교회 건물이 마주 보고 서있는데 이 광장에서 군사행렬과 종교의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광장을 에워싼 건물들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리 높지 않은 아담한 건물들의 디자인과 색상들이 광장과 꽤 잘 어울린다.


우리는 지친 몸에 당분을 넣기 위해 광장 카페에 들어갔다.

유니크한 건축양식으로 알려진 bruck house에 딸린 카페이다.

서로 다른 색상으로 칠해진 세 건물이 나란히 있는데 브룩하우스의 건물의 디자인과 색상이 유독 두드러져 보인다.

그 이유는 1898년 헝가리 건축가가 네오 바르크  양식으로 지은 건축물을 1910년에 브룩이란 사람이 이  건물을 사들여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으로 아름답게 리모델링했기 때문이다.

이곳엔 그 당시 약국이 있었는데 옛 흔적은 사라지고 지금의 일반적인 평범한 약국으로 변해있었다.

약국 가까이 가 창 문을 들여다보니  오래전 약국에서 쓰던 저울과 장롱들이 보인다.

유니온 광장(통일 광장)


브룩하우스 앞 카페에서 커피

티미쇼아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오후 5시가 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의 오래된 요새를 잠시 들러보았는데 성벽의 잔재는 찾아볼 수 없고 지금은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듯 보여 옛 것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도 생긴다.


숙소로 들어오는 길에 베가강을 다니는 유람선을 타보기로 했다.

2 Lei를 내고 왕복 1시간 정도 탔는데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베가강 주변으로 보이는 티미쇼아라의 풍경을 감상하다 보니 피로가 저절로 풀린다.


오늘 내가 경험한 티미쇼아라는 옛 것의 편안함과 고풍스러움이 도시 전체에 배여 현대의 세련(洗練)을 제어하고 있는 도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내가 타고 있는 유람선도 느리고 여유 있게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나가면서 티미쇼아라는 '슬로 시티(slow city)'라는 걸 확인시켜 주는 것 만 같다.

그리고 우리에게 느리게 사는 삶이 이런 것이다라고 알려주는 듯도 하다.


티미쇼아라에서 보내는 우리의 날들도 천천히 흘러갔으면 좋겠다.    

베가강을 운행하는 유람선


 ***위 글은 2024년 5월 여행 중 쓴 글 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