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많아질수록, 나는 더 천천히 읽게 되었다
서점의 한 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책은 충분히 많았고, 고르라는 말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 책도 쉽게 집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스트셀러 코너를 지나며
지금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을 집어 들었고,
읽어야 할 책과 읽고 싶은 책을
굳이 구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책 앞에서 멈추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책을 고르는 일이
읽는 일보다 더 오래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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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책을 고를 때
내용보다 먼저 묻게 됩니다.
지금의 나에게 이 책은 필요한가.
이 문장을 오늘의 마음이 견딜 수 있을까.
이 책은 나를 몰아붙일까, 아니면 잠시 앉혀줄까.
책이 많아질수록
나는 더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아무 문장이나 마음 안으로
들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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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의 이 진열장은
누군가에게는 선택의 자유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금의 삶이 얼마나 복잡해졌는지를
보여주는 풍경이었습니다.
너무 많은 정보,
너무 빠른 판단,
너무 쉽게 요구되는 이해와 결론.
그 속에서
책마저 ‘잘 읽어야 하는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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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즘 나는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을 찾습니다.
모두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문장을 찾습니다.
밑줄을 긋지 않아도
그저 옆에 두어도 괜찮은 책을 고릅니다.
읽는다는 행위가
성취가 아니라
머무름이 되었으면 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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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삶을 바꾸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줍니다.
어떤 문장은
지금 이 상태로도 충분하다고 속삭입니다.
그런 책 앞에서는
굳이 다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완독 하지 않아도 괜찮고,
다시 덮어도 죄책감이 없습니다.
그저 그 곁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조금 느슨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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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결국 책 한 권을 내려놓고 나왔습니다.
아무것도 사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가벼웠습니다.
오늘의 나는
읽을 준비보다
쉬어갈 준비가 더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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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마음은
지금밖에 지나가지 않으니까요.
오늘도 나는
나를 소모하지 않는 방식으로
읽지 않는 선택을 합니다.
그 선택 역시
하나의 독서라고 믿으면서요.
-여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