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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이 Sep 26. 2023

입주 이모님들과의 공동육아

*본문에 나오는 모든 이름은 가명이다. 



우리집 위층에 사는 은채네 할머니는 손녀를 위해 이사를 왔다. 원래 서울 사람인데 아들 내외가 걱정 없이 일에 전념했으면 해서 지방 신도시인 이곳까지 내려오셨다.

아들네와 같은 아파트에 전셋집을 구하고 당분간 손녀를 키워주기로 했단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껏 은채의 젊다는 부모는 본 적이 없지만 은채 조부모님과는 안면을 익혔다. 매일 오며가며 인사를 나누고 놀이터에서 함께 애들을 놀리는 사이가 되었다.


조부모님이 이사까지 해가며 손주를 돌봐주는 가정이 많은가 보다. 내 주변에서만 은채네까지 벌써 네 집이다.

 그집 아이들은 바쁜 부모님 대신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을 잡고 기관에 가거나 산책을 다. 가끔 놀이터나 근처 공원에서 마주치면 어르신들은 반갑게 인사해주고 우리 아이와도 친절하게 잘 놀아주신다.

그분들은 가끔 내게 일을 쉬는 중인지 아니면 전업주부인지 물어오기도 하는데, 대답을 하면 '엄마가 직접 아이를 돌보는 것은 요즘 시대에 행운같은 일'이라며, 지금은 쉬지만 돌아갈 직장이 있는 나를 두고 아주 복받았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동감하는 바였다. 




5년 전, 아직 둘째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에 살던 동네에서는 입주 도우미를 쓰는 집들이 많았다. 지역 내에서 괜찮다는 신축 아파트이긴 했지만 그래봤자 지방의 흔한 아파트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그때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나와 같은 생계형 워킹맘은 많이 없었다. 당시 첫째를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가정어린이집에 보냈는데, 반 아이들 열 명 중에서 아이를 직접 등하원하는 워킹맘은 나 혼자 뿐이었다.


그때 나는 매일 오전 8시쯤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오후 5시쯤에 데리고 나왔다. 사기업에 다니는 워킹맘들에 비해서는 퇴근이 빠른 편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말이 느려서 의사표현을 잘 못하는 아이가 등원을 할 때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나를 바라볼 때면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어린이집 행사일에 겨우 조퇴를 내고 늦게나마 참석을 했다. 처음 보는 서너 명의 엄마들이 나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행사가 끝나자 그들은 나에게 차나 한 잔 마시자며 말을 걸었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우리는 커피를 시켜놓고 마주 앉았다. 그런데 이미 서로 친하게 지내는 듯한 그들의 대화 주제라는 것이 피부과라든지 필라테스라든지 예쁜 카페들에 관한 것들이어서, 잘 모르는 나는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지으며 침묵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 여자가 말을 걸었다.


"그런데 무슨 일 하세요?"

"중학교 교사에요."

"어머, 힘들겠다. 기간제 교사에요?"

"아...지금은 정교사이긴 한데 예전에는 기간제도 했어요."

"아."


그리고는 침묵. 조금 있다가 다른 여자가 다른 걸 물어왔다.


"집은 전세에요?"


그 다음부터는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기억은 잘 안난다. 그런 질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여자들이 드라마가 아닌 실제 현실에도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그날의 만남은 한동안 내가 왜 그들에게 그런 질문을 받게 되었는지, 그리고 생계형 워킹맘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곱씹으며 사유하게 했다.




그때쯤 세 분의 이모님들을 알게 됐다. 

아파트 내 커뮤니티 시설인 키즈카페가 개장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와 함께 방문한 날이었다. 키즈카페는 아담하지만 볼풀장과 방방이, 미끄럼틀, 목말, 그리고 작은 장난감들과 책들이 제법 구색을 맞추고 있어서 어린 아이들이 놀기에 참 좋아보였다. 한쪽에는 보호자들을 위해 둥그런 테이블과 의자, 커피머신까지 놓여있었다. 근사했다. 퇴근 후 이어지는 고단한 육아의 시간도 여기에서라면 한결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곳에는 아이 세 명과 할머니 세 분이 먼저 와 있었다. 벼리, 동호, 꾸꾸네 이모님이었다.


나는 푸근하게 생긴 그 할머니들께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ㅇㅇ의 엄마라고 나를 소개했다. 어린이집 키즈노트 사진에서 많이 본 아이들이라 낯이 익다고 했다. 그러자 그 분들은 인심 좋게 앉으라며 나를 끼워주셨다. 앉은 채로 엉덩이를 조금씩 이동해서 내가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주셨다.


그들이 아이의 할머니들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우리는 전부 아이들의 입주 도우미라며 본인들을 소개했다. 벼리는 공무원과 변호사, 동호는 의사와 교수, 꾸꾸는 사업을 하는 부모님을 두고 있었기에 바쁜 그들의 부모 대신에 입주 이모님들이 아이들을 키워내고 있었다. 그중 꾸꾸네 이모님은 한국말보다 중국말이 더 편한 조선족 이모님이기도 했다. 나는 촌스럽게도 '입주 도우미', 특히 '조선족 입주 이모님'과 얘기를 오래도록 나눠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한동안 꽤 신기해했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저녁 5시부터 7시까지 입주 이모님들과 어울려 공동육아를 하게 됐다.




꾸꾸네 이모님은 체격 크고 말투도 화통한 분이셨다. 가족들과 다 함께 한국에 온지 몇 년 안됐다고 했다. 다른 가족들은 주로 대림이랑 모란 시장 근처에 흩어져 산다고 했다. 처음에는 본인도 서울에서 살면서 회사원과 항공 승무원으로 일하는 부부의 아이를 키웠는데 그 부부가 인천인가 어딘가로 이사를 가자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일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에 일을 구한 것이 바로 꾸꾸네 집이었는데, 꾸꾸네가 이렇게 더 멀리 지방 신도시로 이사를 올 줄은 몰랐다고 이모님은 툴툴거렸다. 그래도 꾸꾸와 정이 듬뿍 들어서 이제는 그만두지 못한다고 말했다.

꾸꾸네 이모님은 주말에는 대림의 집에서 지내다 온다고 했다. 그때마다 중국산 과자나 사탕 같은 것들을 가지고 오셨다. 한번은 내가 취미로 초급 중국어를 배우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테스트를 해주겠다며 “베이징 사람입니까?”, “당신은 선생님입니까?”와 같은 말들을 중국어로 물어보았다. 왕초보인 나를 배려해서 그가 유난히 또박또박 크게 말해준 덕분에 어설프게라도 대답을 할 수 있었고, 이모님들은 잘한다며 다같이 손뼉을 치고 웃었다.  


동호네 이모님은 얼굴이 동그랗고 하얬다. 늘 단정하고 차분했다. 당신의 딸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 돌보는 것을 힘들어하자 안쓰러워서 손주들을 도맡아 키워주셨다고 한다. 그렇게 넷인가 다섯을 키웠다 하였나, 막내 손주까지 다 커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이제 좀 한숨 돌리고 쉬려나 했단다. 그런데 성당에서 알게 된 젊은 부부가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의 아이도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못 믿겠지만 할머니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도 간절하게 말해와서 어쩔 수 없이 돌보게 됐다고. 그러나 이모님은 어쩔 수 없이, 라고는 말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동호를 끔찍이도 예뻐하였다. 동호는 친손자도 아닌데 처진 눈매와 둥근 턱선이 이모님과 많이 닮아 있었다. “말 안하면 다들 동호를 친손주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자 이모님은 아주 좋아하며 웃었다.


벼리네 이모님은 다정했다. 그는 마르고 수수한 인상의 중년 여성으로 늘 염색을 하지 않은 잿빛의 커트머리에 말수가 적었다. 꾸꾸네와 동호네 이모님이 신나게 말을 주고 받으며 오래도록 대화를 해도 벼리네 이모님은 좀처럼 끼어들거나 입을 여는 법 없이 항상 옆에서 잔잔하게 웃고만 있었다. 그 이모님은 앞니 하나가 빠져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웃을 때에도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혹시 말수가 없는 것도 앞니 때문이었을까. 그래도 보다보면 벼리와 벼리의 동생에게는 곧잘 말을 거는 걸 알 수 있었다. 간식 줄까? 물 줄까? 기저귀 갈까? 라든가 이제 집에 가자, 라고 말했다. 때로는 아이들이 저지레를 하면 그러면 안되지, 라고도 말했지만 그 말을 할 때조차 말투는 다정했다.


이모님들은 육아가 서툴렀던 나에게 수시로 육아에 관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오지랖 넓은 말들이 감사했다. 말을 잘 못하던 나의 아이도 이곳에서는 엄마가 웃으며 앉아있어서 그런지 꺄꺄- 돌고래 소리를 지르며 친구들과 볼풀 공을 던지고 신나게 미끄럼을 탔다. 아이도 나도 오후의 키즈카페에서는 항상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이모님들은 때로는 굴곡진 당신네 인생 이야기도 들려주고 간식을 싸와서 그 자리에서 나눠 먹기도 했다. 언젠가는 추석이 끝나고 다같이 모여 각자의 집에서 싸온 명절 음식들을 푸짐하게 내놓았다. 우리만의 잔치를 열었다. 꾸꾸네 이모님은 중국도 이때가 명절기간이라며 월병이라는 과자를 들고 오셨다. 갈색의 둥근 밀가루 과자 속에 견과류와 열대과일 같은 것들이 들어 있어서 씹을수록 오묘한 단맛이 났다. 동호네 이모님이 가져오신 색색의 전들도 조금 식긴 했어도 어떤 건 짭짤하고 어떤 건 고소해서 하나같이 맛이 있었다.

그때는 배만 고팠던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얼마간 허기진 상태였던 것 같다. 아무런 접점도 공감대도 없을 것 같은 내가 매일 그들을 찾아온다는 이유만으로 이모님들은 나의 외롭고 공허한 마음을 아주 따땃하고 풍족하게 채워주었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던 우리의 공동육아는 그러나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우리 집이 이사를 가게 되면서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벽시계가 7시를 가리키면 내일 또 보자며 훌훌 털고 일어나 땀에 젖은 아이들에게 빠빠이를 시키고 각자의 동으로 사라졌던 그 전날들처럼. 연락처도 하나 없던 터라 인사도 잘 못 나누고 보잘 것 없게 헤어졌다. 그분들의 소식은 더 이상 알 길이 없게 되었다. 항상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이모님들의 모습은 어느새 오래된 꿈처럼 희미해졌다.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휴직을 하고 둘째의 등하원을 시킨다. 오늘처럼 하원길에 다른 아이의 조부모님들과 어울려 아이들을 놀리기도 한다.

지금 둘째의 어린이집 열두 명의 친구들 중에서는 일을 쉬고 있는 엄마가 나를 포함하여 단 두 명밖에 없다고 한다. 가끔 아이를 하원시키는 정장 차림의 엄마들을 만나는데 그들은 때로는 활력이 넘쳐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지쳐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내가 마음 속으로 조용히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모를 것이다. 전업맘이든 워킹맘이든 조부모님이든 입주 도우미든 다 각자의 위치에서 아이들을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 그 마음의 결만큼은 다 같지 않을까. 같은 양육자의 입장에서 나는 내 주변의 모든 양육인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동호와 꾸꾸와 벼리는 현재 어떤 아홉 살로 살아가고 있을까. 세 분의 이모님들은 지금도 또 다른 누군가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을까. 바쁜 부모 대신 매일 어린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재우면서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고 있을까. 오후에는 또 다른 육아 동지들을 만나 외로운 사람들끼리 음식을 나누고 있을까...

낯선 젊은 여자에게 흔쾌히 옆자리를 내어주었던 그때 그 푸근한 모습 그대로 부디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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