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남편과 이유도 기억나지 않는 주제로 다투었다. 동갑인 우리는 정말 지긋지긋하게 싸우고 풀고를 반복했다. 이번에는 앙금이 다 풀리지도 않았는데 집에 먹을거리가 떨어져서 그 상태로 장을 보러 가야 했다. 서로 말 한 마디 없이 어쨌든 어색하나마 마트 안을 둘러보는데 정육 코너의 직원이 돼지 고기를 특별 세일한다며 호객 행위를 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고기를 집어들었다. 나도 좀 살펴보다가 앞다리살 한 팩을 골랐다. 무뚝뚝하게 "수육해줄게." 하고 말하니 그의 눈이 좀 커진다. "그러면맥주도 산다?" 맥주 6캔 들이를 장바구니에 담으면서 그는 헤벌쭉 웃었다. 이런 단순한 사람 같으니.
수육은 순전히 남편을 위한 것이었다. 결혼하고 이번에 처음 해보았다. 요리에 손톱만큼의 재능이나 관심도 없을 뿐더러 고기, 특히 삶은 고기는 싫어하는 터라 그동안 어쩌다 돼지를 사도 주로 목살이나 삼겹살을 사서 구워먹기만 했다. 그래서 이날 처음으로 수육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시어머니가 요리하던 장면을 떠올려 어설프게나마 시도를 해본 것이다.
막상 직접 고기를 삶아보니 요리라고 할 것도 없을만큼 아주 간단했다. 냄비에 돼지고기, 배즙, 된장, 양파, 월계수 잎, 커피 알갱이를 약간 넣고 오래 삶으면 끝. 뚜껑을 열어보니 제법 잘 삶아졌다. 얇게 썰어서 큰 접시에 담고 작은 그릇에는 새우젓과 쌈장, 생양파, 청양고추, 마늘을 썰어 놓았더니 꽤 그럴 듯하다. 고기를 한 점 집어 알배기 배추에 싸고 새우젓과 마늘, 고추를 얹어서 그의 입에 넣어줬다. 고기를 씹으며 그가 음~하고 감탄사를 날렸다. 미안해졌다. 살림의 고수인 시모에게서 매일 7첩, 9첩 반상만 받고 살다가 하필 만나도 이렇게 요리 실력이 꽝인 여자를 만나 결혼하다니. 참 맛있게도 먹어주는 그를 보니 흐뭇하다. 문득, 휴직중인 내가 그의 아내로서 보일 수 있는 성의 표시 중에선 그나마 음식 대접이 제일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내가 아는 사람 중 제일가는 식도락가이다. 그의 사주에도 그가 음식에 진심인 것이 나와 있다나. 맛있는 음식을 위해서라면 땅끝까지도 갈 사람이란, 정말 처음 듣는 사주였지만 참 신통하게도 그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는 음식 얘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렸고 여행을 가면 맛집에 가기 위해 한 시간씩 줄을 서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건 일종의 시댁 문화이기도 했다. 시어머니는 하루 세 번 성실하게 남편과 자식들을 먹일 요리를 정성껏 만들었고, 시아버님과 남편은 늘 감탄하며 맛있게 먹는 일에 열중했으므로.
한동안 그런 시댁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나는 음식 맛이라는 걸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겐 아주 맛있는 음식도, 맛없는 음식도 없었다. 맛집에 줄을 서기보다는 그 옆 한산한 식당에 들어가서 아무거나 바로 먹고 나오는 게 우리 친정집 스타일이었다. 머릿속에 먹고 싶은 음식 생각이 나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거나 먹방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거나 한 적은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고 집에 먹을 것이 없더라도 고구마나 사과 같은 걸로 대충 끼니를 때우면 괜찮았다.
그래서 남편이 나를 위해 사온 간식들의 의미를 더욱 가볍게 치부했던 것 같다. 그가 내게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한참을 생각하다 겨우 떠올린 것들은 옥수수, 붕어빵, 대충 그런 것들이었는데 그 이후 남편은 그것들을 기억해두었다가 생각날 때마다 사오곤 했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그가 내게 봉투를 내밀 때마다 나는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떨떠름하게 고맙다고 대답은 했지만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때의 그처럼 아주 감격해하거나 연신 감탄사를 내뱉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내쪽에서 먼저 그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요리하거나 사오는 일들도 당연히 드물었다. 그가 알아서 잘 사왔으니까. 그런 것들이 이제 와서 새삼스레, 수육을 맛있게 먹는 그를 보며 미안한 감정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나이를 먹으면 자꾸 감성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일까.
당신도 알다시피 나도 한 때는 앞치마까지 꼬박꼬박 차려 입고 요리에 정 붙이려 노력했잖아. 그러나 들이는 시간과 품에 비해 결과물은 늘 기대 이하였지. 둘이서 처치 곤란인 맛없는 음식들을 꾸역꾸역 먹다가 다 못먹고 버리는 일이 많았어. 싱크대에 수북하게 쌓인 그릇들을 마주하는 것도 그렇고, 점점 귀찮더라. 흥미를 잃었지. 그래서 예의상 맛있다고 한 음식을 두고 어머니가 자꾸 요리비법을 가르쳐준다고 하실 때엔 거부감부터 들더라. 어느 새 맞벌이를 핑계삼아 반찬가게에서 사온 걸로 끼니를 때우곤 했어. 당신이 가끔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면 뚱한 표정으로 요리를 했지만, 네가 직접 해먹으라며 짜증낸 적도 많았잖아. 지금 생각하니 참 너무했다. 그렇지? 미안해. 요리를 통해 애정을 확인하고픈 그 응석을, 그동안 알면서도 모른 체했네.
얼마 전에 당신이 내게 서운한 티를 냈을 때에도 참 미안하고 부끄럽더라. 냉장고에는 죄다 아이들 좋아하는음식들로만 가득하다고. 가끔 좋아하는 간식을 찾으면아이들이 다 먹어버렸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곤끝이었다고. 때로 아이들에게 이건 아빠꺼야, 먹지마 라고 단호하게 말했던 것들은 모두 아주 맵거나 유통기한이 살짝 지난 음식뿐이었음을 말해왔을 때는 아차, 싶었어.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싶었지.
생각해보니 당신이 밤에 출출하다며 한참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다 결국 마지못해 집어드는 것들은 늘 당신이 좋아하지도 않고 건강에도 안 좋은 것들 뿐이었지. 오예스, 냉동 만두, 피자, 감자칩, 오래된 마른 오징어, 멸치... 그동안은 왜 그냥 넘겼던 걸까...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들에 하나씩 도전장을 내려 해. (곧 시들해질수도 있겠지만) 일단 오늘부터 장을 봐왔어. 첫 요리로 해물 파전 어때? 바삭하게 구운 파전을 매콤한 청양 고추 썰어넣은 간장에 찍어먹으면 맛있겠지 않아? 아, 당연히 막걸리도 샀지. 벌써부터 당신이 좋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먹고 싶었던 건데 오랜만에 먹겠네, 하면서 좋아하겠지.
있잖아, 서투른 말 대신에 이번에는 당신의 어머니처럼 음식으로 내 마음을 전해볼까 해. 그러니까 당신은 맛없어도 맛있게 먹어줘야 해. 내 마음 생각하며 꼭꼭 씹어줘. 천천히 음미하며 아주 맛있게, 그렇게 먹어야 한다.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