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 같은 '코드 블루', 그리고 기적의 주먹 한 방
병원에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전설이 하나 있다. 바로 ‘환타’. ‘환자를 타는 사람’의 줄임말이다.
의사든 간호사든, 유독 그 사람이 근무하는 시간에 조용하던 병동이 뒤집어지고, 안정적이던 환자가 갑자기 나빠지며, 응급 상황이 빗발친다. 소화기내과 암 병동 3년 차 시절, 나는 그 전설의 주인공, ‘환타의 정석’이었다.
나의 근무표에 ‘N(나이트)’가 찍히는 날이면 병동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거짓말처럼 하루 걸러 하루 꼴로 코드 블루(심정지 응급 호출)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낮에는 수많은 의료진이 있지만, 밤에는 몇몇의 당직 의사가 병동의 모든 상황을 판단하고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야간에 발생하는 응급 상황은 그만큼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내가 스테이션에 들어서면, 그날 당직인 레지던트 1년 차 선생님이 머리를 감싸 쥐며 절규하곤 했다.
“아! 선생님! 안 돼! 오지 마요! 제발 다시 집에 가요!”
농담 섞인 비명이었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운명이 ‘환타’인 것을.
그날 밤도 여지없었다. 인계를 받고 병실 라운딩 중에 코드 블루 상황이 발생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달려들었고, 한바탕 전쟁 같은 심폐소생술(CPR)이 지나갔다. 다행히 환자의 심장 리듬은 돌아왔다.
식은땀을 닦으며 한시름 놓으려던 찰나였다. 뒷정리도 채 끝나지 않은 병실, 아직 가빠진 숨도 고르지 못했는데... 또 다른 병실에서 모니터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삐-------]
달려가보니 심전도(EKG) 모니터가 야속하게도 일직선(Flat)을 그리고 있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 제발. 지금은 안 돼. 제발 오늘은 그만하자.’
의학적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내 몸을 먼저 움직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 환자, 아니 할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정석대로라면 빠르게 코드 블루 요청을 하고, 침대 위로 뛰어 올라가 흉부 압박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럴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할아버지의 흉골 중앙을 쾅! 내리쳤다.
“할아버지!!! 안 돼요!!! 안 돼!!! 돌아오세요!!! 제발!!”
그것은 ‘프리코디얼 썸프(Precordial Thump, 심장타격법)’였다. 제세동기가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 시도하는 응급 처치술. 물론 교과서적인 처치는 아니었고, 의도적인 의료 행위라기보다 그 순간의 절박함이 만들어낸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쾅, 쾅!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치며 빌었다. 지금 가시면 안 된다고. 나 너무 힘들다고.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내 절박한 주먹에 반응한 것일까. 일직선(Flat)을 그리던 심장 리듬이 꿈틀 하더니, 거짓말처럼 다시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했다.
정상 리듬(Sinus Rhythm)이었다.
달려오던 당직 의사도, 나도, 그제야 긴 숨을 토해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 후로 열흘간 평온하게 생을 이어가셨다.
그날 밤, 나는 간호사실 구석에서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할아버지를 살려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뒤로, 씁쓸한 죄책감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내가 할아버지의 가슴을 내리친 건, 정말 환자를 살리고 싶은 사명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또 CPR을 해야 한다’는 그 끔찍한 피로감과 버거움 때문이었을까.
너무 잦은 죽음과 응급 상황에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숭고하다는 말은 교과서에나 있는 말 같았고, 현실의 나는 기계적으로 가슴을 압박하고 약물을 재는 ‘단순 기술자’가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3년 차 간호사가 겪는다는 지독한 슬럼프(Slump). 나는 그날 밤, 내 주먹 끝에서 다시 뛰기 시작한 생명의 리듬을 확인하며 그 고비를 넘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환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매일 뛰어다녔고, 숨 돌릴 틈 없이 일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지독한 바쁨이 약이 되었다. 몸이 고되니 잡념이 들어올 틈이 없었고, 기계처럼 일하다 보니 3년 차 슬럼프도 어느새 흐릿해져 갔다. 치열한 현장이 나를 억지로라도 움직이게 만든 셈이다.
어느 날, 풀 죽어 있는 나에게 윗 연차 선배가 무심한 듯 뼈 있는 위로를 건넸다.
“이든아, 너무 우울해하지 마~ 네가 일을 열심히 하고 환자를 꼼꼼히 보니까, 남들 눈엔 안 보이는 게 보이는 거야. 그걸 해결하려다 보니 일이 많아지고 환타가 되는 거지. 그게 다 네 실력이야.”
그 말 한마디가 내 마음을 눈 녹듯 녹여주었다. 그래, 나는 환타다. 내가 뭘 잘못해서 나한테만 일이 몰리는 게 아니라, 환자를 조금 더 세심하게 보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고단한 별명도 제법 견딜 만해졌다.
그런데 그 '환타'라는 별명은.. 왜 21년째 계속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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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타 (Patient Rider):
‘환자를 타는 사람’의 줄임말. 간호사뿐만 아니라 의사 등 의료진 사이에서 통용되는 은어다. 유독 그 사람이 일하는 때마다 응급 상황이 터지거나 환자가 몰리는 징크스를 뜻한다. (반대말: 환자 복이 있는 사람)
- 코드 블루 (Code Blue):
병원 내에서 심정지 환자가 발생했을 때 방송되는 긴급 코드. 이 방송이 울리면 원내 심폐소생술 팀(CPR Team)과 해당 구역 의료진은 하던 일을 멈추고 즉시 달려가야 하는 가장 긴박한 신호다.
- 프리코디얼 썸프 (Precordial Thump, 심장타격법):
심정지가 발생한 직후, 주먹으로 흉골 부위를 강하게 내리쳐서 그 물리적 충격을 전기 에너지로 변환해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응급 처치법. 제세동기(전기충격기)가 당장 없을 때 시도하는 고전적인 방법이다. 그날 나의 주먹은 교과서보다 빨랐고, 기적적으로 할아버지를 살려냈다.
- D/E/N (Day, Evening, Night):
간호사의 3교대 근무 형태를 뜻하는 약어. 보통 아침 7시에 시작하는 데이(Day), 오후 3시경 시작하는 이브닝(Evening), 밤 11시부터 아침까지 이어지는 나이트(Night)로 나뉜다. 24시간 병동을 지키기 위해 간호사들은 이 불규칙한 시간표에 자신의 생체 리듬을 맞춰야 한다.
- 말기 환자의 CPR:
생명 연장 그 자체보다는 ‘이별의 준비’에 목적이 있다. 심폐소생술로 확보된 시간은 보호자가 작별 인사를 나누고 DNR(심폐소생술 금지)을 결정하여, 환자가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임종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