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병동은 슬픔만 있는 곳이 아니었다.

태움을 견디게 해 준 환자들의 다정함

by 온 이든

나의 신규 간호사 시절은 소화기내과 암 병동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은 병원 내에서도 회전율이 극과 극으로 나뉘는 곳이었다. 조기 암 환자들은 시술 후 금방 퇴원했지만, 한 달 이상 장기 입원해 계신 분들은 대부분 4기, 혹은 말기 암 환자들이었다.


그때의 병원은 지금보다 훨씬 더 거칠었다. 이유 있는 꾸지람, 이유 없는 태움. 신규 간호사가 버티기엔 결코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나 역시 나의 어떤 모습이 선배들을 불편하게 했는지 정확히 모른 채, 업무 적응과 태움 사이에서 매일 흔들리며 지냈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니까, 도망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그 시간을 버텼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그 차가운 병동에서 버티게 해 준 건 동료가 아니라 환자들이었다.


인계를 마치고 투약 카트를 끌고 라운딩을 돌 때였다. 내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갑자기 첩보 영화 같은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어? 우리 선생님 왔다! 야야, 문 닫아라!”


서울의 대형병원이라 전국 각지에서 모인 환자와 보호자들. 병실문 근처에 계시던 보호자 분이 밖을 살피며 ‘망’을 보기 시작했다.


“수선생님 저쪽으로 갔어요! 지금 안 와요, 얼른!” “거기 문 좀 꽉 닫아보소. 쌤요, 이리 퍼뜩 와 봐라.”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문 앞자리 분이 병실 문을 드르륵 닫았다. 완벽한 밀실(?)이 만들어지자, 환자들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반짝거렸다.


“선생님, 얼굴이 왜 이리 반쪽이여. 또 혼났가니?”


환자복을 입은 아주머니 한 분이 깎아놓은 사과와 배를 내 입에 쑥 밀어 넣으셨다.


(우물우물)... "환자분, 이러시면 안 돼요. 저 근무 중이라 걸리면 혼나요...” “아따, 괜찮다니께! 우리가 망보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여! 얼른 씹어 삼켜. 삐쩍 말라가지고 주사나 놓겄어?”


본인들은 항암제 부작용으로 입맛이 없어 식사도 못 하시면서, 밥도 못 먹고 뛰어다니는 신규 간호사의 입에는 기어이 금쪽같은 과일을 넣어주셔야 직성이 풀리는 분들. 어떤 분은 내 유니폼 주머니에 몰래 떡이나 두유를 찔러 넣어주시기도 했다.


“저 무서운 선배들, 우리가 다 막아줄 테니까 여기서 좀 쉬다 가요.”


그 좁은 병실 안에서 우리는 공범이 되었다. 밖에서는 생사를 오가는 시한부 환자와 의료인이었지만, 문을 닫은 그 안에서는 그저 ‘서로를 짠하게 여기는 사람 대 사람’이었다.


사실 그곳은 매일 밤이 전쟁터였다. 식도 정맥류가 터져 밤새 피를 토하는 환자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몇 번이나 씻어도 내 몸에서 피 비린내가 진동하던 밤들. 어젯밤이 고비였던 분과 내일이면 안 계실 분들이 공존하는 곳.


우리는 학교에서 배웠다. “의료인은 환자 앞에서 감정을 너무 드러내면 안 된다.” 사망 선고 앞에서도 울지 말아야 한다고,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그때 나는 너무 ‘날 것’의 신규였다. 피를 토하는 환자가 안쓰러워 눈물이 났고, 내 입에 과일을 넣어주던 분이 임종하셨을 때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억지로 참고 싶지 않았다.


일은 서툴렀고, 선배들 비위 하나 못 맞추던 어리바리한 신규 간호사. 하지만 환자들은 그런 내가 귀엽고, 안쓰럽고, 그래도 자기들 곁을 지켜줘서 고마웠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나는 병동의 일원이 되었고, 선임 간호사들과도 웃으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태움은 지독한 텃세였거나 신규 길들이기였을지도 모른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때가 생각난다. 내 입안 가득 퍼지던 사과의 단맛과, 망을 봐주던 보호자들의 다급한 손짓이.


암 병동은 죽음만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웃음과 정(情)이 오가는 따뜻한 일상이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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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든의 덧붙임

- 태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의 간호사 은어. 신규 간호사가 업무에 적응할 때까지 선배 간호사가 가혹하게 교육하거나 괴롭히는 문화를 말한다.


- 소화기내과:

위, 대장, 간, 췌장 등 소화기관의 질병을 다루는 진료과. 특히 암 병동은 항암제 투여와 그에 따른 부작용(구토, 통증, 감염 등)을 세심하게 관리하는 것이 핵심적인 간호 영역이다.


- 식도 정맥류 (Esophageal Varices):

간 기능 저하로 인해 식도의 정맥이 혹처럼 부풀어 오르는 증상. 이것이 터지면 대량 출혈(토혈)이 발생하며, 응급 처치가 늦어지면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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