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는 떠나도 우리는 남는다: 당직실의 '피터팬'

라면과 전우애로 버틴 그 시절의 밤

by 온 이든

대학병원 일반외과. 그곳은 병원 안에서도 가장 거칠고 바쁜 곳으로 통한다.


일반외과는 간담췌, 유방갑상선, 위, 대장항문, 혈관외과 등 5개의 분과로 나누어진다. 업무 범위는 이렇게 방대한데, 당시 이를 감당할 1년 차 전공의(레지던트)는 고작 2~3명뿐이었다.


절대적인 인력 부족. 그 공백을 메우는 사람은 바로 우리 PA 간호사들이었다. 우리는 1년 차 전공의들과 함께, 교수님의 지도 하에 한 명씩 각 분과를 로테이션하며 일을 했다. 다른 병원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내가 있던 곳의 교수님들은 PA를 단순한 보조 인력이 아니라, 제자처럼 가르치셨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고, 덕분에 우리는 의학적 지식과 술기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그 시절, 나는 집보다 병원 당직실에 더 오래 살았다. 밤 10시가 넘어서 퇴근해 봤자 다음 날 새벽같이 나와야 하니, 집에 가는 게 의미가 없었다. 당직실 구석에 있는 비좁은 샤워실에서 따뜻한 물로 하루의 피로를 풀고 주인 없는 빈 침대에서 눈을 붙였다.


그 당직실의 ‘붙박이’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매일 돌아가며 당직을 서는 1년 차 전공의들, 그리고 나처럼 업무에 치여 퇴근을 반납한 PA들이 늘 그 방에서 함께 지냈다.


우리에게는 '전우애'같은 것이 있었다. 1년 차 시절은 의사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시기다. 몰려드는 업무, 자신의 무지함에 대한 자책, 생명을 다룬다는 공포. 그래서인지 그 시기엔 유독 “도망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전공의들이 많았다. (실제로 도망가는 사람도 종종 있다.)


누군가 무너질 것 같은 조짐이 보이면, 우리 PA들과 동기 의사들은 그를 둘러싸고 앉았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기도 하고, 캔맥주를 나눠 마시며 밤새 다독였다.


“선생님,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우리 같이 힘내요. 선생님은 진짜 좋은 의사가 될 거예요.”


직종은 달랐지만, 우리는 가장 고단한 시기를 함께 견디는 동료였다.


그리고 어김없이 다음날,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한 아침 회진이 끝나면 단톡방 알림이 쉴 새 없이 울리기 시작한다.


"선생님들. 나 빠바(파리바게뜨)! 주문이요~"

"아아!"

"아라!!"

"저 뜨아. 감사해요~!!"

"나는 빵! 빵! 빵!"

...

...

서로에게 커피 한 잔 못 먹여서 안달 난 사람들처럼. 제일 먼저 회진이 끝난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카페로 달려가고, 우리의 아침 루틴은 이렇게 커피 주문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가벼운 수다만 있었던 건 아니다. “아까 그 환자, 내 판단이 늦어서 상태가 나빠진 건 아닐까?”, “내가 좀 더 공부했어야 했는데.”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밤새 괴로워하던 그 진지한 눈빛들을 나는 기억한다.


하루 종일 수술실, 병동, 응급실을 뛰어다니고 녹초가 되어 당직실에 모이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라면 포트에 물부터 올렸다. 신기하게도 매일 꼭 한 명씩 ‘라면의 달인’이 있었고, 라면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당직실 가득 맛있는 냄새가 퍼졌다. 우리는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며, 후루룩 소리와 함께 그날의 피로를 삼켰다.


가끔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우리 병원에서 의학드라마 촬영을 하고 있던 때, 당직실에서 잠깐의 촬영을 한 적이 있었다. 화려한 배우들을 보며 다들 감탄했지만, 내 눈엔 달랐다. 며칠 밤을 새워 퀭한 눈에 부스스한 머리를 한 우리 선생님들이 더 빛나 보였다.


“선생님, 저 여배우보다 선생님이 훨씬 예쁜 것 같은데요? 내 눈이 왜 이러죠?!”

"아오! 민망하게 ㅋㅋㅋ 이든쌤이야말로!!"


빈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에게 ‘고슴도치 맘’이었다. 생명을 살리는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특유의 아우라 때문이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하게도 당시 외과 전공의들 외모가 다들 평균 이상은 했던 것 같다. 외과 얼굴 보고 뽑냐는 소리도 들었으니까. ㅎㅎ)


시간이 흐르면 전공의들은 성장해서 당직실을 떠난다. 하지만 우리 PA들은 계속 그 자리에 남는다. 그리고 다음 해에 들어오는 새로운 1년 차 선생님들을 맞이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외과 당직실의 ‘늙지 않는 피터팬’ 같았다. 늘 가장 치열한 1년 차의 업무 강도 속에 머물며, 떠나가는 이들의 등을 두드려주는 사람들.


정말 몸이 부서져라 일했고, 마음 다해 환자와 동료를 사랑했던 나의 청춘. 지금도 가끔 힘들 때면 그때 당직실에 늘 배어 있던 샴푸 냄새와, 라면 포트에서 피어오르던 김, 그리고 서로를 세상에서 제일 멋지다고 추켜세워주던 그 다정한 농담들이 그립다.


의료인으로서의 내 지식과 경험의 8할은, 그때 그 당직실에서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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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든의 덧붙임

- 일반외과 (General Surgery):

위, 대장항문, 간담췌, 유방갑상선, 혈관 등의 수술을 담당하는 과. 수술 범위가 넓고 응급 상황이 많아 병원 내에서도 업무 강도가 가장 높기로 유명하다.


- PA (Physician Assistant):

의사의 지도 아래 검사, 시술 보조, 의무기록 등을 수행하는 진료지원 간호사. 국내에서는 전공의 인력이 부족한 현실 속에서, 현장의 빈자리를 메우며 진료 흐름을 안정적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맡는다.


- 당직실 (On-call room):

의료진이 밤새 병원을 지키며 쪽잠을 자거나 대기하는 공간. 집은 아니지만, 2층 침대에 몸을 누이고 따뜻한 물로 씻으며 고된 하루를 위로받았던 우리들의 아늑한 베이스캠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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