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은 수술실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새벽, 우리가 120도로 인사하는 이유

by 온 이든

수술은 수술실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외래 진료실에서 "수술합시다"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다.


그리고 수술실 문이 닫히기 전까지, 환자보다 더 긴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소한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


수술 날짜가 결정되면, 그 디데이(D-day)를 기준으로 보통 한 달 이내에 필요한 검사들이 진행된다. 혈액검사, 소변검사, 폐기능 검사, 심전도 검사. 65세 이상이거나 심장 관련 과거력이 있는 환자분들은 심장초음파까지 추가된다.


환자가 입원하기 전, 해당 파트 전공의나 나 같은 PA (진료지원 간호사)가 이 결과들을 미리 확인한다. 수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이상 소견은 없는지, 만약 있다면 수술 위험도 (OP risk)를 점검하기 위해 관련 진료과에 협진을 의뢰한다.


이렇게 모든 준비가 깔끔하게 끝난 상태로 환자가 입원한다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병원이라는 현장은 늘 교과서 같지 않다.


외래 진료 후 수술 일정이 너무 촉박하게 잡히는 경우, 혹은 응급실을 통해 입원했지만 당장 수술실로 들어가는 초응급은 아니어서 하루 이틀의 여유만 있는 경우.


이럴 때는 OP risk를 '급하게' 챙겨야 하는 상황이 꼭 생긴다.


하루 이틀 안에 심장, 폐, 간, 신장, 내분비 등 서너 개 과의 판단을 동시에 받아내야 할 때도 있다. 한 명의 환자를 수술실로 들여보내기 위해, 여러 명의 교수님 일정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협진을 봐주셔야 할 교수님들 역시 외래, 검사, 회의로 하루 일정이 이미 꽉 차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우리가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답변을 받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응급' 협진 의뢰를 하고 기다린다. 문자를 보낸다. 전화를 건다. "확인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하루에 몇 번이나 쓰는지 모른다. 회신이 오면 살 것 같고, 안 오면 마음이 타들어 간다.


수술 전날 밤까지도 차트는 닫히지 않고, 머릿속에선 환자 이름이 계속 맴돈다.


‘내일 수술 못 들어가면 어떡하지.’

'첫 수술 안되면 다 밀리는데…’


그렇게 밤이 지나고 수술 당일 아침이 된다.


아직 해가 채 뜨지 않은 이른 시간, 나는 교수님 연구실 앞이나 외래 복도에서 교수님이 나타나시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린다. 저 멀리 교수님이 보이면, 내 몸은 이성보다 빠르게 반응한다.


척추가 자동으로 접힌다. 정중한 90도를 넘어, 생존 본능이 만들어낸 비굴과 예의 그 사이, 120도 폴더 인사.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평소엔 잘 나오지도 않는 맑고 고운 하이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OP risk 협진드린 ○○○ 환자분, 오늘 수술이셔서... 회신 부탁드립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눈은 마주치지 못한다. 내 정수리가 교수님의 무릎을 향할 기세다. 이 순간 나는 간호사라기보다, 결재를 기다리는 간절한 '을(乙)'... 아니, '정(丁)' 쯤에 더 가깝다.


"아, 그분 차트 봤어요. 수술해도 됩니다. 회신 넣을게요."


그 무심한 한 문장. 그 한마디에, 그동안 참고 있던 숨이 한꺼번에 빠져나온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뒷모습에 대고 또 한 번 폴더 인사를 날린다. 그리고 그제야 마취과의 최종 확인을 받고, 환자는 무사히 수술실로 입실한다.


드라마 같은 극적인 장면은 없다. 오가는 고성도, 감동적인 눈물도 없다. 그저 복도 한구석에서 허리를 굽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조금은 웃기고 조금은 짠한 매일의 루틴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수술 준비로 뛰어다니는 우리만 알 뿐이다.


하지만 이 루틴이 무너지면, 수술은 시작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수술 전날까지, 그리고 수술 당일 아침까지 조용히, 묵묵히, 뛰고 있다.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하루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 오늘도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는 사람들. 나는 그중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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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든의 덧붙임

수술 전에 추가되는 검사들 때문에, 때론 예상치 못하게 다른 과 진료를 보고 수술 날짜가 미뤄지는 환자분들의 애타는 마음, 너무나 잘 압니다.


하지만 병원이 환자분을 기다리게 하는 시간은, 방치하는 시간이 아니라 가장 안전한 길을 찾고 있는 시간입니다.


제가 복도에서 허리를 굽히며 뛰어다니는 그 순간이, 환자분께는 '보이지 않는 안전벨트'를 매는 시간이라는 점을 조금만 헤아려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환자분들의 쾌유를 진심으로, 간절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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