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같이 빛나던 사람들, 그로부터 시작되는 작은 변화

낀 세대의 품격에 대하여

by 온 이든

현재의 40대를 ‘낀 세대’, 혹은 ‘샌드위치 세대’라고 부른다.


나 역시 그 한가운데 서 있다. 퇴근하면 부모님의 건강을 걱정하고, 돌아서면 여러 가지를 챙겨야 하는 아이들이 기다린다. 양쪽으로 당겨지는 마음 사이에서, 가끔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직장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위로는 예의를 갖추며 도리를 다해야 하고, 아래로는 서툰 후배들의 마음까지 살펴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모든 것이 억울하게 느껴졌던 순간도 있었다.


일방적인 위계가 지배하던 시절

내 20대는 상명하복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고등학교 방송반에서 시작된 위계는 간호대학에 들어서며 더 단단해졌다.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1학년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시선은 바닥을 향했고, 모든 선배에게 90도로 인사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였다. 1학년 전체가 선배들에게 불려 가서, 몇 시간씩 이어지는 훈계를 묵묵히 듣는 것 또한 그 시대의 거친 통과의례였다.


졸업 후 마주한 현실은 더 냉혹했다. 의료계의 그림자라 불리는 ‘태움’. 말로는 다 못할 시간들이었지만, 나는 어떻게든 견뎌냈다. 그리고 어느덧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의 자리가 되고 보니, 선택해야 할 순간이 왔다. 내가 받은 그대로를 되물려줄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택할 것인가.


그때마다 나를 붙잡아준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가 날카로워질 때도, 조용히 따뜻한 말을 건네주던 보석같이 빛나던 사람들. 그들의 태도 하나가 한 사람의 마음을 살린다는 것을 나는 그 곁에서 배웠다. 그들을 닮고 싶어 스스로에게 되뇌곤 한다.


"나도 상처받았지만, 너에게는 꽃을 주려 애쓰고 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미련한 선배가 되기'를 선택했다.

지금 나는 6명의 PA 후배들과 함께 일한다. 나보다 5살에서 많게는 12살 어린 친구들이다. 루틴 업무만으로도 숨이 벅찬 그들에게,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기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공포가 찾아온다. 그럴 때 나는 메신저 뒤에 숨지 않는다.


직접 자리를 찾아가 후배의 얼굴빛을 본다. 업무의 과부하인지, 관계의 상처인지 살핀다. 가능하면 함께 해결하고,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저 곁에 서서 같이 버텨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수술 전 반드시 중단했어야 할 아스피린을 후배가 안내하지 못했다. 환자는 수술 전날까지 약을 복용한 채 입원했고, 결국 수술은 전격 취소되었다.


보호자는 분노했다. “사람 죽일 일 있냐”, “이게 병원이냐”, "담당자 나오라 그래!" 하는 날 선 고성이 병동을 가득 채웠다. 아수라장이 된 그곳에서 당사자인 후배는 충격으로 사색이 된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 분노 앞에 서야 했다. 나는 차마 사색이 된 후배에게 '너의 실수이니 네가 가서 욕먹고 오라'고 떠밀 수 없었다. 대신 가장 윗 연차인 내가 고개를 숙이고 보호자 앞에 섰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떤 말로도 변명이 안 됩니다"라는 사과를 반복하며 30분 넘게 쏟아지는 비난과 욕설을 받아냈다.


사실 내가 보호자라고 하더라도, 그 분노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다시 돌이켜 생각해도 그것은 너무 큰 실수였다. 30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지만, 그분의 화가 풀릴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풀어드리려 애썼다. 다행히 환자와 보호자의 마음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고 상황이 정리되었다. 환자분은 일주일 뒤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잘 회복하셨다.


나는 후배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 그 후배는 조금 더 꼼꼼히 일을 했다. 혹시 놓친 것이 있을까 봐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낀 세대, 그러나 ‘전환의 세대’

누군가 보기에 나는 조금 미련하고, 늘 바쁜 사람일지도 모른다. "왜 사서 고생이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선택한 방법이 좋다.


우리는 IMF의 위기를 목격하며 결핍을 배웠고, 반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동시에 경험한 풍요로운 세대다. 상명하복을 요구받았지만, 그 문화를 그대로 물려주지 않으려 애쓰는 전환의 세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40대가 단순히 끼어있는 세대가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거름 삼아 미래의 다리를 놓는 세대라고 믿는다.


무엇보다 내게 본을 보여주었던, 그 반짝반짝 빛나던 사람들을 만난 것에 감사한다. 그들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어떤 선배가 되어 있었을까.


반짝이는 사람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상황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마음, 내가 받은 날카로움을 무디게 다듬어 남에게 건네는 그 마음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그 사실을, 나는 내 아이들에게도 천천히 알려주고 싶다.


오늘도 제자리에서 조용히 버텨내고 있는, 보석같이 빛나는 모든 40대에게 존경과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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