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암 병원 간호사, 밤에는 암 환자 보호자
2024년 의료 공백 사태. 모든 국민이 체감했겠지만, 전공의의 빈자리는 거대한 혼란을 남겼다. 그 여파로 나는 지난 1년 반이 넘는 시간을 참 숨 가쁘게 보냈다.
나는 전공의가 없는 종합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특히 우리 병원은 유방암 환자분들을 주로 치료하는 곳이다. 암 진단을 받고도 대형 병원에서 ‘기약 없는 대기’만 하던 환자분들이 치료가 가능한 우리 병원으로 몰려왔다.
전문의와 PA(진료지원 간호사)가 한 팀이 되어 외래와 입원을 모두 막아내야 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는 한정적이었지만, 암 진단을 받고 공포에 떠는 환자를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때 우리 병원은 모두가 비상 체제로 움직이며 두 사람 몫을 뛰었다. 나 역시 그랬다.
아침 8시 30분 출근. 매일 밤 10시~11시 퇴근. 심하면 자정을 넘기기도 했다. 그렇게 꼬박 1년을 보냈고, 상황이 조금 안정된 이후에도 정상적인 패턴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무려 반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그 당시, 시어머님은 담도암 진단을 받으셨던 상태였다.
...
82세. 연세에 비해 건강하긴 하셨지만, ‘암’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는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큰 수술과 항암치료를 견디기엔 너무 고령이셨기에 덜컥 겁부터 났다.
의료진으로부터 가장 먼저 검사 결과를 전해 들은 건 나였다. 설명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며느리로서, 가족으로서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소리 없이 울었다.
하지만 나는 오래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가족들이 간호사인 나에게 많이 의지 했기에, 내가 무너진 모습을 보이면 연로하신 어머님과 온 가족이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나는 눈물을 닦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가족들 앞에서는 애써 덤덤한 표정으로, 최대한 객관적이고 침착하게 앞으로 겪게 될 치료 과정을 이야기했다. 울음을 꾹 참아내며.
CT, MRI, PET-CT 등 필요한 검사를 진행했고, 의료진으로부터 자세한 결과를 전해 들었다. 천만다행으로 기수가 많이 진행되지 않은 점, 그리고 전신 상태가 양호한 점을 확인하고, 수술을 하자고 어머님을 설득했다.
그 수술은... 외과 수술 중에서도 난이도가 매우 높다는 PPPD(유문보존 췌십이지장 절제술)였다.
사실 나는 너무나 두려웠다. 워낙 큰 수술이라 혹여나 어머님이 수술 후 깨어나지 못하실까 봐, 회복을 못 하고 더 힘들어지실까 봐, 이 선택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까 봐 속으로는 정말 많이 걱정했다.
하지만 그 불안함조차 내색할 수 없었다.
"어머님은 충분히 견디실 수 있어요. 수술만 잘 되면 다 괜찮아질 거예요."
나는 흔들리는 가족들을 지탱하기 위해,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꿋꿋하게 희망을 말했다.
어머님은 수술 후 중환자실을 거쳐 일반 병실로 오셨고, 다행히 큰 합병증 없이 퇴원하셨다. 하지만 진짜 싸움은 그다음부터였다.
기력 저하, 수술 부위 통증, 장기 재배치로 인한 위장관의 극심한 적응 과정... 어머님은 하루하루 눈에 띄게 야위어 가셨고, 나는 너무 바쁜 탓에 매일 어머님 댁을 찾아가 케어해 드리기가 어려웠다.
결국 가족과 상의 끝에 어머님을 우리 집으로 모시기로 했다. 그때부터 어머님은 약 2년 정도 우리 집에 계셨고, 나는 아침과 밤으로 어머님을 케어했다.
병원에서는 수많은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였지만, 집에서는 오직 한 사람, 어머님을 위한 며느리이자 전담 간호사가 되었다. 매일 영양 섭취를 위해 식단을 꼼꼼히 챙겼고, 시시각각 변하는 증상에 맞춰 약을 조절해 드렸다.
기력이 뚝 떨어져 물 한 모금 삼키기 힘겨워하시는 날이면, 늦은 밤 퇴근해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밤새 어머님 곁을 지키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쏟아부었다. 앙상하게 마른 어머님의 팔을 주무를 때면, 마음 한구석이 속수무책으로 아려오곤 했다.
수술 후유증이 어느 정도 회복된 뒤에는 약 8개월간의 항암치료가 이어졌다.
사실, 어떤 치료보다 가장 힘든 것이 항암치료다. 수술 후 회복기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어머님은 "이렇게 힘드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라고 하실 정도로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셨고, "나는 이제 더 희망이 없다"라며 깊은 우울감에 빠지기도 하셨다.
나는 매일 우리 병원 소화기 내과 선생님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어떻게 하면 어머님을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해 드릴 수 있을지, 약은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매달렸다. 그리고 무너지는 어머님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까지도 오롯이 내 몫이었다.
그 8개월은 말로 다 표현 못 할 만큼, 어머님도 나도 처절하게 버텨낸 시간이었다.
그런 간절함이 닿았던 걸까. 기적처럼 어머님은 체력의 80% 이상을 회복하셨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의 그늘도 걷어내고 예전의 밝은 모습을 되찾으셨다. 지금은 정기 추적검진에서도 재발 소견 없이 하루하루를 건강하게 보내고 계신다.
어머님이 웃으며 식사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진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다. 그런 나의 마음과 정성을 알아주시는 건지, 어머님도 나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자주 해주신다.
그 와중에 내게는 또 하나의 큰 과업이 주어졌다. 유방암 국제학술대회 간호세션 발표.
제안이 들어왔을 때 정말 수없이 고민했다. 이미 나는 현실의 무게 때문에 숨쉬기조차 버거운 상태였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나를 믿어준 분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고, 무엇보다 이 성장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힘든 건 힘든 거고, 내가 해야 할 일은 해야지."
없는 시간을 쥐어짜고 잠을 줄여가며 공부했다. 수많은 논문과 근거 자료를 찾아보고, 힘들게 힘들게 발표 자료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자료가 좋아도 발표자가 버벅대면 의미가 없기에, 마지막 시뮬레이션까지 온 힘을 쏟았다.
발표는 20분, 질의응답은 5분. 많은 발표자가 시간을 초과하곤 하지만, 나의 T 성향은 정해진 시간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수도 없이 스톱워치를 켜고 연습하며 딱 20분에 끝나도록 시나리오를 다듬고 또 다듬었다.
그리고 학회 당일, 준비한 그대로 오차 없이 발표를 마쳤다.
발표 후 여러 분들이 찾아와 인사를 건네주었다.
"내용이 너무 유익했어요."
"편안하고 안정되게 발표해 주셔서 듣기 편했습니다."
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간호사이고 엄청난 실력자도 아니지만,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얻은 것 같아 안도감과 함께 깊은 감사가 밀려왔다. 그리고 학회에서의 첫 발표를 성공적으로 마친 덕분에, 이후 들어오는 제안들은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 역시 나에게는 큰 성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2년 동안 나는 여러 번 한계를 느꼈고, 여러 번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선택한 건 ‘잘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40대의 한가운데에서, 오늘도 나는 눈에 띄게 잘하지는 못해도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버티고 있다.
========================
- 의료 공백 사태 (2024):
전공의 사직으로 인해 발생한 의료 공백 사태. 대학병원의 진료가 축소되면서, 그 여파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2차 종합병원 의료진들의 업무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 PPPD (Pylorus-preserving pancreaticoduodenectomy):
유문보존 췌십이지장 절제술'. 췌장, 십이지장, 담도 등을 절제하고 남은 장기들을 다시 연결하는 외과 영역의 최고난도 수술이다. 젊은 사람도 견디기 힘든 이 과정을 82세의 고령에 결심하고, 주변의 우려를 딛고 오롯이 버텨내신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