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에 자신만만했던 40대 간호사의 굴욕
나는 나름 자신 있었다. 마흔 중반의 나이지만, 마음만은 청춘이고 트렌드에도 뒤처지지 않는 ‘센스 있는 직장인’이라고.
매일 파릇파릇한 후배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문화를 귀동냥하고, 자기 관리도 철저히(했다고 믿으며)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그 견고한 믿음이 와장창 깨지는 데는, 커피 한 잔이면 충분했다.
얼마 전, 업무가 폭풍처럼 몰아치던 날이었다.
나보다 다섯 살 어린 동료가 다크서클을 턱 밑까지 달고 내게 말했다.
“선생님, 저 정말 카페인이 필요한데.. 카페 갈 시간도 없어서... ‘아샷추’ 한 잔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오호, 아샷추. 들어봤다. 나는 흔쾌히 “오케이!”를 외치며 원내 카페로 향했다.
그리고 키오스크 앞에서 아주 당당하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주문 버튼을 눌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 샷 추가]
그리고 아주 진한 커피를 받아 들고 위풍당당하게 복귀했다.
“자, 여기 아샷추 배달이요!”
동료는 감격하며 빨대를 꽂고 한 모금 쭈욱 들이켰다.
그런데 표정이 묘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선생님, 이거 그냥 아아 아니에요?”
“응..? 네. 아아에 샷 추가했는데......? 아닌가요??????”
순간, 동료의 동공이 지진 난 듯 흔들렸다. 그리고 이어진 충격적인 진실.
“선생님... 아샷추는 ‘아이스티’에 샷 추가예요...”
순간 뇌 회로가 정지했다. 달달한 아이스티에 쓴 에스프레소를 넣는다고?
그런데... 생각해 보니 달콤 쌉싸름한 것이 맛있을 것 같긴 했다.
더 충격적인 건, 그 ‘아샷추’가 유행한 지 이미 5년이 넘었고, 이제는 유행이 지는 추세라는 사실이었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트렌드를 안다고 착각했던 나는, 그저 단어의 앞글자만 따서 내 맘대로 해석한 40대 탑골 간호사였던 것이다.
사실 징조는 몸에서 먼저 나타나고 있었다.
그동안 애써 부정하고 있었지만, 40대 중반의 아줌마라는 ‘현타’는 이미 와 있었다.
작년 의료 공백 사태 때, 우리 병원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나는 매일 밤 10시, 11시, 심할 땐 자정을 넘겨 퇴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밥 먹을 시간도 없어 닥치는 대로 초콜릿과 과자를 털어 넣으며 ‘당 충전’으로 버텼다.
나는 힘들면 살이 빠지는 가련한 여주인공 체질이 아니라,
힘들면 몸이 붓고 살이 찌는 정직한 생활형 체질이다.
그 몇 달간의 사투 끝에 내 몸에는 10kg이라는 지방 갑옷이 덧입혀졌다.
불어난 몸무게를 외면하며 ‘난 아직 청춘이야’라고 최면을 걸고 있었는데, 거기에 ‘아샷추 사건’까지 터지니 비로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 나는 이제 청춘이 아니구나.’
‘나는 그냥 일과 살림에 치여 트렌드 따윈 놓치고 사는, 평범한 40대 아줌마구나.’
거울 속에는 10kg 불어난 몸집에, 철 지난 유행어조차 헷갈려하는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젊은 날의 나’와 작별하는 기분이 들어 조금은 서글프고 씁쓸했다.
하지만 퇴근길, 병원 문을 나서며 생각했다.
병원 밖에서 나는 그저 유행에 뒤처진 흔한 동네 아줌마지만,
병원 안에서는 20년 경력으로 환자를 지키는 베테랑 간호사이다.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고, 나를 ‘선생님’이라 불러주고, 땀 흘려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을 또 열심히 살아가자고~!
“그래, 트렌드는 좀 몰라도 괜찮아. 나는 내 자리에서 묵묵히 제 몫을 해내고 있으니까.”
다만, 앞으로는 잘 모르겠는 건 조용히 Gemini에게 물어봐야겠다.
“얼박사는 뜻이 뭐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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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샷추 (Iced Tea with Espresso Shot):
아이스티에 에스프레소 샷을 추가한 음료. 달콤함과 쌉싸름함이 묘하게 어우러져 마니아층이 있다.
(주의: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가 아님)
현타 (Reality Hit):
‘현실 자각 타임’의 줄임말. 헛된 꿈이나 망상에 빠져 있다가, 자기가 처한 실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시간을 뜻한다.
얼박사 (Ice + Bacchus + Cider):
‘얼음 + 박카스 + 사이다’를 섞어 만든 음료. 찜질방과 PC방에서 시작된 전설의 'K-에너지 드링크'. 한 모금이면 머리끝까지 찌릿하게 깨우는 당분과 카페인의 조합으로 유명하다.
Gemini (제미나이):
구글에서 만든 인공지능(AI). 업무적인 것 또는 내가 모르는 요즘 트렌드를 물어보면 친절하게 알려주는 똑똑한 비서다. (가끔은 나보다 더 내 마음을 잘 아는 것 같아 흠칫 놀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