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놓치지 말아요.
지나치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보려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도착한 뒤엔 뭘 할 거야?"
"나는 다시 같은 길을 돌아서 걸어가야 해. 삼촌이 저쪽 마을에 사시거든."
"응? 다시 같은 길을 돌아서 또 걷는다고? 그냥 버스를 타는 건 어때?"
"아니. 다시 걸어보고 싶어. 같은 길이라도 또 다른 것이 보일 수 있으니까."
- Camino de santiao, Spain. 다음 묵을 숙소 주인과 전화로 통화 중이던 나를 보고 말을 걸었던 마드리드 출신의 마노 씨.
내가 인생작으로 뽑는 영화 <어바웃 타임>은 현재의 소중함에 관한 이야기다.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주인공에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마지막 조언은 평범한 하루를 보낸 뒤, 다시 그 날로 돌아가 관찰자의 입장에서 다시 그 하루를 지내보라는 것이었다. 짜증 나던 지옥철도, 끊이지 않은 일거리도, 날 괴롭히는 것만 같았던 사람들도, 한 발짝 물러서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니 따뜻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하는 사랑스러운 순간들이라는 것을 주인공은 깨달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산티아고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을 때 (자의 아닌 타의였기에) 길을 걷는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찾기가 어려웠다. 겨우 100km 남짓한 길을 걸으면서 발에 생긴 물집과 통증, 시린 무릎, 차오르는 호흡, 갑자기 시작되는 비나 우박. 내일은 또 어디까지 가야 할까, 어떤 곳에서 휴식을 취해야 할까, 식사는 뭘 해야 할까. 전신의 통증은 지속되고 비루한 몸뚱이를 챙기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반추할 시간조차 없었다. 계획 없이 시작했던 길이었던 데다, 준비도 그만큼 부족했던 탓이다. 게다가 혼자 걷는 길도 아니었고.
온갖 고민과 체력 저하, 통증 때문에 그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만이 목표처럼 생각되었고 주변을 돌아볼 시간조차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래서였는지 남은 일정을 끝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일을 시작하고도, 아주 한참이 지나서야 지난 사진들을 꺼내 볼 수가 있었다.
사진을 정리하며 놀라웠던 것은 그 정신없는 와중에 꾸준하게 사진을 찍기는 했다는 것 (물론, 성의는 없는 사진이었지만), 그리고 내 기억 속, 하루에도 몇 번씩 쏟아지는 우박과 정신없이 내리는 비는 온데간데없고 아름다운 풍경들만이 남아있더라는 것이었다.
[지금 보면 아름답지만, 그 당시에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풍경.]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들을 지나쳐왔던가. 그 당시에는 무엇이 그렇게 화가 나고 고통스럽고 바쁘고 정신없었을까. 그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한없이 아쉬웠다.
눈 앞에 뵈는 게 없던 산티아고 길. 마노 씨를 처음 만난 건 그날 묵을 호스텔과 짐 문제로 한참 길에서 통화 중일 때였다. 어설픈 나의 스페인어로 전화를 하려니 더욱더 언성만 높아지고, 과연 서로의 말을 이해했는지 의심스러운 채 통화를 끝냈을 타이밍에 "유, 스페니쉬, 굿!" 이라며 말을 걸어온 친구. 깡 마르고 큰 키에 볼록 튀어나온 눈을 가져 (갑상선 검사해보라고 말을 했어야 하는데..) 선한 느낌이 드는 청년이었다. 마침 직장을 그만두고 북부에서 시작해 3주째 길을 걷는 중인데 정해진 날짜가 없이 시작한 거라 여유롭게 걷고 있다 했다. 덕분에 걷는 속도가 비슷했는지 그 뒤로도 몇 번을 더 마주쳤고, 마침내 도착한 산티아고 디 콤포스텔라의 대성당 광장에서 소리쳐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어찌나 반가웠던지. 이제 도착을 했으니 어디로 갈 거냐는 내 질문에 그는 다시 왔던 길을 돌아 1주 정도 걸으면 삼촌댁이 있다고 했다. 한 발짝 더 걷는 것이 곤욕이었던 나에게는 상상할 수 조차 없던 대답이었다. 이미 걸어온 길인데, 돌아갈 땐 그냥 버스 타면 안 되냐는 내 질문에 너털웃음을 지으며 분명 처음과는 다른 풍경일 거라 확신하던 그.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의 눈에 비친 길과 나의 눈에 비친 길은 분명 많이 달랐을 것 같다.
몇 년 전 장기간의 여행을 마치고 스스로 다짐했던 것이 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여행이고, 이 여행을 최대한 즐기자고. 그런데도 또다시 나는 일상에 매몰되어 오히려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번 더 반성해본다. 지금 급하게 뛰어가느라, 혹은 다른 것이 힘들어서 보지 못하는 주변을 잠시만 숨을 고르고 쳐다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러우며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이 길도 언젠가는 끝나고 추억이 될 거라고, 오히려 길에서 놓쳤던 아름다운 소소한 풍경들과 사람들의 미소가 그리워질 거라고.
덧붙임.
순식간에 지나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알아채기 위해 마음가짐도 중요하겠지만 1순위로 필요한 것은 건강과 체력이다. 우선 몸이 아프면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