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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플혜영 Oct 17. 2021

좋겠다. 엄마가 엄마라서

엄마한테 상처 준 엄마가 하는 고백

 엄마는 꾸밀 줄 아는 여자


어릴 적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흙 묻은 일복 바지에 헐렁한 티셔츠, 검게 그을린 얼굴에 뽀글한 파마머리를 하고 표정 없는 얼굴이다.

엄마는 항상 엄마를 가꾸기보다는 아빠의 말끔한 차림새를 위해 가끔이지만 옷을 사고 다림질을 하고, 그렇게 외출하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엔 운동회 때 딱 한번 엄마가 학교에 오는 날이었다. 점심 도시락을 싸들고 돗자리를 깔고 둘러앉아 밥을 먹는데, 혹시나 일복 차림에 화장끼 없는 얼굴로 엄마가 오면 어쩌나 내심 걱정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어린 마음에 화려하지 않은 엄마의 모습을 부끄러워했던 것 같다. 아마 엄마의 마음에도 상처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중2였나 보다. 학생회비를 아빠가 잊은 적이 있었다. 오늘까지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행정실 직원의 엄포도 부끄럽고 화가 나는데, 가지고 온다던 엄마가 점심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아 창밖만 보며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있었다.

운동장 저 끝에서 뛰다시피 오고 있는 한 사람. 화가 폭발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모습 그대로 학교로 들어서는 엄마였다. 복도에서  " 혜영아 너네 엄마가?" 하는 친구들한테 나는 많이 부끄럽고 많이 화가 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후회되지만.. 그땐 있는 대로 엄마한테 화를 내고 말았다. 손에 쥐고 있던 봉투만 낚아채고 휑하니 돌아서 버리 나. 엄마가 잘 갔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미움밖엔.

나중에 커서 알게 된 거지만 엄마도 그때 마음이 많이 아팠단다. 그랬겠지..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보니 정말 철없었단 후회를 했으니... 많이 울었을 것 같다 우리 엄마...

그땐 미처 몰랐다. 나도 엄마가 될 거란 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나의 30대.

신혼도 없이 투잡 쓰리잡으로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큰애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하느라 바쁠 때였다.

어느 날, 아이를 데리러 간 어린이집 문 앞에서 마주한 공주가 말한다

엄마, 오늘도 그 원피스 입었어?

고작 네 살 꼬맹이가 벌써... 번뜩 정신이 들면서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절대로 엄마 같은 엄마는 되지 말아야지...

예쁜 엄마가 돼야지.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예쁘고 화려한 엄마가 돼야지 했던... 그때가...

날 닮았다.

어쩌다 한번 같은 옷이었을 것인데 네 살 아이 눈에 엄마가 별로 예뻐 보이지 않았나 보다. "어제는 다른 옷 입었는데 몰랐어?" 급하게 변명을 하고 손을 잡고 나오는데,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 내 엄마도 살다 보니 바빠서, 정신없어서 그랬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싶었겠지.

딸 셋 중에 유독 옷 욕심이 많고 치장을 좋아했던 나였다. 지금도 나는 아이들에게 비싸고 좋은 옷은 아니지만 예쁘고 깔끔하게 입히고 나름의 액세서리를 해주는 게 엄마가 된 지금의 나의 몫이고, 외출을 할 때는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한다. 덩달아 아이들의 눈에 관리하는 엄마로 보여주고 싶어 신경 써서 옷도 입고 화장도 하고, 집에서도 늘어진 티셔츠는 입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이 결국 아이들의 기를 세워주는 것 마냥.

언젠가 초등학교 4학년인 큰애가 친구 집에 갔다 오더니

 엄마, 엄마는 스타일이 별로 나쁘진 않은 거 같아.

무뚝뚝하게 내뱉는 그 한마디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엄마의 겉모습이 친구들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정도인가 보다. 어느새 엄마의 외모, 행동, 말투 모든 것을 살피고 기억하고 있었구나 싶다. 내가 그랬던 그때처럼....

딸아 엄마는 너에게 바라는 게 있단다.

우리 딸은 기억이 남아있는 그때부터는 엄마랑 같이 걸을 때 눈꼬리가 올라가는 대신 어깨뽕이 올라갔으면 좋겠다. 학교에 엄마가 왔을 때 손을 뿌리치는 대신 "엄마~"하며 달려와 안아주면 좋겠다.

친구가 너네 엄마냐고 묻기 전에 우리 엄마라고 큰소리로 말해주면 좋겠다.


공주야, 너는 참 좋겠다.
좀 꾸밀 줄 아는 엄마가 엄마라서






엄마는 평화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어.


6살쯤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둑어둑한 저녁시간, 저녁밥을 먹고 나서 언니랑 놀다 보니 어느 순간 엄마 아빠가 보이지 않는다. 무서운 마음에 엄마를 찾아 언니와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매일 다니는 시장 쪽으로 얼마나 걸어갔을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집 근처 남의 집 대문 앞에서 싸우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남자가 여자를 마구 때리고 머리를 짓밟고 있다.


저기 봐봐. 누가 싸운다. 근데  엄마 아니가?


그때 그 모습은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잊히지가 않는다.

우리 엄마가 아빠한테 잔혹하게 짓밟히고 있던 그 모습.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가 싸우는 모습을 자주 봤다. 물건을 집어던지고 도자기가 깨지고 분재가 잔디밭으로 날아가고 동네 사람들 다 들으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내가 정말 미워하는 아빠. 단 한마디 비명도 변명도 반박도 못하고 당하기만 하던 내가 사랑하지만 티 내지 않은 엄마. 그럴 때마다 엄마를 위해 아빠를 말리던 언니와는 달리 나는 방에 들어가서 애써 태연한 척했다.

아마도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했는지 모른다. 사춘기 시절 친구들과 결혼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 내가 항상 했던 말이 있다.

나는 결혼해도 절대 애들 앞에서 안 싸울 거야."


내입으로 뱉은 말은 지키려고 애쓰는 허술하지만 완벽주의 성격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결혼 11년 차지만 단 한 번도 남편과 싸우지 않았다. 이혼의 위기가 있었지만 싸우지는 않았다. 얼마만큼 내가 참아왔는지 이 앞 문장을 보면 대충 감이 잡힐 것이다.

내 속이 문드러지더라도 지금까지 내가 지켜온 나와의 약속은 정말 잘한 일인 것 같다.

지금 우리 딸들은 드라마에서나 이모가 부부싸움을 했다고 하면

왜 다들 저렇게 싸우지? 우리 엄마 아빠처럼 사이좋게 지내야지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가 이렇게 말한다.

어떤 게 정답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엄마가 좀 더 노력하지. 왜 그렇게 싸웠냐고 속으로 많이 원망했다. 얻어맞아 멍든 엄마 얼굴을 보면서 불쌍했지만 한 번도 안아주거나 위로해주지 못했다. 그저 원망이 더 쌓였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 살아보니 엄마도 우리를 위해 많이 참고 억누르고 살았구나 싶다.  우리가 아니었다면 엄마도 엄마 인생을 살라가지 않았을까. 그땐 왜 그렇게 냉정한 아이였나 몰라.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고 보니 알겠다. 아직도 단 한번 엄마한테 고운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나쁜 딸이라 늘 미안하다. 그렇기에 내 아이들에게 부모의 다정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내 다짐과 결심을 꼭 지켜 나갈 것이다.


공주야, 너는 참 좋겠다.
엄마가 평화주의자여서.




네 꿈을 마음껏 펼쳐봐.



나는 학원을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다닐  6학년 담임선생님이 내가 미술을 잘한다고 나중에 커서 디자이너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다. 미술대회란 대회에서는 다 상을 받았다. 그래서 내가 미술을 잘하는 구나를 알게 되었다. 학원을 다니지 않았던 나는 선생님이 매일 학교에 남겨서 과제를 주시며 미술 수업을 해주셨다.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농사일시키는 것 말고는 딸들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아빠한테 미술학원에 가고 싶다는 말은 사치였다. 내 꿈은 늘 디자이너라고 선생님이 정해줬는데 정작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대학은 미술과 전혀 상관없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다. 가슴 한편에는 항상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때 미술을 제대로 배울 수 있게 해 줬더라면 내가 멋진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으로 말이다.

나는 부모가 되면 아이의 꿈을 찾아주는 부모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아이를 낳으면 여러 가지 경험하게 하고 재능을 찾아주는 것도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재능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꿈을 꿀 수 있으니 말이다. 다행히 우리 공주는 나의 소질을 닮았나 보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하고 잘했다. 지금 초등학교 4학년, 미술 입시 전문학원에 다니고 있다.


엄마, 나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어.


공주가 한날 내게 물었다. 엄마는 미술을 잘했다면서 왜 디자이너가 안됐냐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농사일만 시켰지 학원을 안보내줘서 그래."라고 대답하고 나니, 가슴속 오랫동안 묻어뒀던 원망이 끌어 올라왔다. 지금은 내 일에도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땐 그저 나를 지지해주지 않는 부모가 미웠다. 내가 어릴 땐 꿈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고, 배움의 기회가 적었다. 그랬었기에 우리 아이들은 나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 부모를 원망하는 아이들로 키우지 않아야지, 하고 싶은 건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부모가 되어야지. 이런 다짐들을 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아이들의 미래를 한껏 응원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 참 다행이다.


공주야, 너는 참 좋겠다. 하고 싶은 건 다 해줄 수 있는 엄마가 있어서.
엄마가 있으니 마음껏 너의 능력을 펼쳐봐.





 원망밖에 못한 엄마한테 보내는 편지


엄마.

지금도 까칠한 말투로 싫은 소리밖에 안 하는 둘째 딸입니다.

어느덧 엄마도 70을 눈앞에 둔 할머니가 되었네요.

엄마가 얼마만큼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 눈으로 보고 자랐지만 단 한 번도 엄마 손 잡고 위로해 주지 못했어요.

얼마나 힘드냐고, 불쌍하다고, 엄마 울지 말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럴 때마다 왜 그렇게 밖에 못 사냐고, 나는 엄마처럼 절대로 안 살 거라고, 외면했고 원망했고 미워했어요.

내가 많이 나빴어요. 미안해요 엄마.

엄마 얼굴 마주 보고 말할 자신이 없어 이렇게 글로 전합니다.

엄마가 이 글을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 십수 년 만에 엄마 손잡고 사진 찍을 때 마음이 많이 슬펐어요.

거칠고 두꺼워진 손으로 딸 일하고 오면 힘들까 봐 형편이 넉넉지 않아도 반찬 만들어 가져다주시는 그 엄마손을 만져보니 더 미안해집니다.

엄마 많이 미워하고 원망한 못된 딸,

엄마 억울하지 않게 잘 살아갈 테니까 건강하게 오래 함께해 주세요 제발.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맙고,

사실은 엄마 많이 사랑합니다.


2021년 10월 어느 날

둘째 딸 혜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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