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몽 크노는 20세기 초반 무의식과 우연성에 기대어 언어 실험을 하는 초현실주의 문학 운동을 하다가 그만 접었다고 했다. 그 후에 사르트르가 크노를 만나서 초현실주의 활동에서 얻은 게 무어냐고 물어봤을 때 크노는 이렇게 답했다고 했다. "청춘을 가진 적 있었다는 느낌." 사르트르는 그를 부럽다고 적었다.
나는 헤몽 크노의 대표작도 모르고 실험적인 문학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니지만 저 이야기만은 기억에 남았다. 청춘을 가진 적 있었다는 느낌. 기성 문학에 대한 반운동으로 열정을 다 바친 사람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느껴졌다. 나는 이 이야기를 20대 중반에 접했는데 그때는 연속되는 삶에 대해 이른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중에 누군가가 내 20대에 대해서, 젊음에 대해 물었을 때 그때는 청춘을 가진 적 있었다는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절로 기억될 강렬한 사건을 바랐다. 베르나르 포콩이 사진을 싣고 앙토넹 포토스키가 쓴 포토에세이 『청춘, 길』 서문에서 "거리를 걸을 때면 나는 누군가가 나를 납치해주기를 꿈꾸곤 했다. 내 등뒤로 다가오는 자동차 소리를 들으면서 이번이야, 라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 라고 썼던 것처럼. 그런 걸 바랐다는 건 물론 아니야. 나는 밤길을 걷는 건 너무 무서워하니까.
20대 초반에는 스마트폰도 없었고 서울 시내버스들이 네 가지 색으로 나뉘어 개편되던 시기였고 시급이 3700원쯤 하던 때니까 꽤 옛날이지만 아직 내 젊음을 회상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다만 요즈음은 나중이 되면 많이 그리워지겠다고 생각한다. 열정의 강도가 시간을 쏟는 것에 비례한다면, 물리적인 땀과도 비례할 수 있다면 요즘처럼 해 좋은 날을 골라 달리기를 하고 초록을 찾아다니고 자주 풋살을 하고 건강하고 다정한 사람들을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날들이 먼 미래에는 청춘이라고 기억하게 되겠다는 생각.
크노는 초현실주의 운동을 접고 '잠재문학실험실(올리포 OuLiPo, Ouvroir de Littérature Potentielle)'이라는 문학실험단체를 만들었다고 했다. 잠재문학실험실에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이름을 당분간은 빌려 쓰면서 기록을 남겨보려고 한다. 일상을 비일상으로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은 글로 써두는 게 가장 효과적이리라 믿는다.
Meret Oppenheim, Object, 1936
메레 오펜하임의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 미술의 상징적인 오브제로, 출품 당시에는 앙드레 브루통이 별칭으로 붙인 <모피 속의 아침 Le Déjeuner en fourrure/Breakfast in Fur>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됐다. 기성품 찻잔세트와 스푼에 털을 붙인 단순한 작품인데 일상 소품을 이질적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부드러운 감각을 고스란히 전달할 뿐더러 털이나 머리카락을 입에 잘못 머금었을 때의 그 어색한 느낌, 결을 따라 만지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게 좋았다. 내 평범한 하루와 생각들을 남긴 글들이 언젠가 다시 읽어도 어루만지고 싶은 시절을 호출해 내는 이야기들이었으면 좋겠다. 9 3/8" (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