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로 이사 오면서 답답했던 것 중 하나는 마음에 맞는 이발소를 찾는 일이었다. 도시생활을 할 때는 단골인 전문이발소가 있어서 마음 편하게 염색이며 이발을 했지만 이곳에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사는 곳은 운악리인데 이발소는 조종면 소재지에 있어 차를 타고 10분을 나가서 주차를 하고 걸어가야 한다. 면에는 5개의 이발소가 있고 무려 25개의 미용실이 있었다. 아주 오랜 이발소와 시골에서는 남자가 문을 열기 겸연쩍은 미용실,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러다가 불현듯 오래전 추억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내가 초등학교 - 당시에는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 에 들어가기도 전의 일이니까. 아마 6살~7살 정도였을 때 여름철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동네 시장 초입에 있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잘랐다. 시장에 장을 보러 가는 엄마 손을 잡고 이발소에 들어가면 항상 긴장이 되고는 했다.
1960~80년대의 이발소. 지금도 이런 모습의 이발소가 남아있기도 하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던 이발사 아저씨는 뒤로 젖힐 수 있는 이발 의자 위에 나무 판때기를 올려 그 위에 나를 앉히고는 수건으로 숨이 막히게 목을 조이고 하얀 천을 둘러싼 다음 스프레이로 머리를 적셨다.
그다음 하얀 가운의 윗주머니에서 가위를 꺼내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하는데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고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똑바로” “똑바로”를 습관처럼 읊조리는 것이었다.
나는 긴장상태에서 부동자세로 머리를 다 자를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약간 과장해서 이발이라기보다는 약간의 가학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너무 힘들어서 “나 머리 안 깎을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이발이 시작되면 어머니는 시장을 보러 이미 이발소를 떠났고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은 이발소 안 아무도 없기에 일찌감치 포기하고 이발이 끝날 때까지 고통을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가위질이 다 끝나면 이발사 아저씨는 면도기통에 비누로 거품을 내고 그 거품을 아직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내 구레나룻과 목덜미에 쓱쓱 바르고는 면도칼을 쇠가죽에 쓱싹쓱싹 갈아 구레나룻 위치에는 정확하게 일자로 그리고 목덜미에는 돌아가며 면도를 하여 나는 그때마다 목덜미가 서늘했었다.
면도마저 마치면 아저씨는 나를 머리 감는 세면대로 데리고 가서 다시 방수천을 둘러싸고 머리를 감겨주는데 얼마나 벅벅 문지르는지 머리통이 다 아플 정도였다. 머리를 감고 나면 그때부터는 눈을 감고 숨을 참아야 했다. 아저씨가 비누로 얼굴까지 씻겨주는데 잘못하면 눈으로 비눗물이 들어와 아주 매워지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이발이 다 끝나고 만화책을 한 권 보고 나서야 장을 다 보고 돌아오셨고 어머니가 이발비를 셈하고 난 후 겨우 이발소 문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발소 문밖을 나서면 한 여름에도 바짝 이발하고 면도한 자리가 서늘하게 시려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바쁘니 혼자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고 오라는 것이었다. 군것질하지 말고 잘 깎고 오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나는 이발비를 받아 들고 호기롭게 문을 나섰다. 내 손에 쥐어준 것은 아마도 백 원짜리 지폐가 아니었을까.
당시로서는 고액권인 지폐를 들고 집을 나서는 나를 동네 형들 –그래봐야 미취학이거나 초등학교 저학년-이 그냥 둘리가 없었다.
“너 그 돈 가지고 어디 가니?”
“머리 자르러.”
“머리 자르러 어디로 가?”
“이발소”
“이발소 얼마인데?”
“50원.”
“너 30원이면 깎을 수 있는데 뭣하러 50원이나 주니?”
“정말?”
“거기 가면 머리도 편하게 깎고 '아이스께끼'도 하나씩 사 먹을 수도 있어.”
“좋아”
순진했던 나는 동네 형들 여러 명과 같이 30원이면 머리를 깎을 수 있다는 신기한 이발소로 향했다.
이발소는 멀었다. 내가 사는 동네를 떠나 공원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이발을 하러 시장이 아니라 산으로 올라가다니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발소 어디야?"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돼."
"이발소가 왜 산에 있어?"
"산동네라 그래."
"산동네 아이들 사는 동네?"
"그래. 맞아."
우리 동네에는 가끔 거친 산동네 아이들이 놀러 오기도 해서 조금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워낙 믿는(?) 동네 형들이었기에 별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숨을 헉헉거리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등산을 마치고 이발소라는 곳에 도착하니 인왕산 중턱 무허가 주택들 -거의 판잣집 수준- 사이 어느 작은 집이었다.
당시에는 아이스께끼를 파는 장사는 대부분 아이들이었다 아이스께끼를 통에 담아 다니며 "아이스께끼"를 외쳐댔다.
“아저씨 우리 왔어요.”
“누구냐?”
“아랫동네에서 왔어요.”
“어서 와라. 오늘은 처음 보는 아이가 왔네?”
문을 열고 나서는 아저씨는 하얀 가운을 걸치지도 않았고 그냥 평범한 동네 아저씨처럼 보였다. 아저씨는 문간방에서 작은 학교 걸상을 하나 내와서 앉으라고 하고는 하얀 천을 두르고 뒷주머니에 꼽고 있던 빗을 꺼내 머리에 대고 바리캉으로 머리를 쓱쓱 밀기 시작했다. 앞머리만 남기고 싹둑 밀어버린 것인데 내 기억으로는 한 10분도 안 됐는데 이발이 다 끝났다고 했다.
나는 이발하는 시간이 짧아서 좋았고 머리를 감지 않아서 더 좋았다.
흔한 거울도 없는 탓에 이발한 내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좀 아쉬웠지만 동네 형들은 “머리를 아주 잘 잘라서 더 멋있다”라고 나를 추켜세우는 것이었다.
나는 의기양양 으쓱해서 호기롭게 동네형들과 아이스께끼를 사 먹었다. 당시 아이스께끼의 가격은 3원에서 5원 정도를 했는데 동네형들하고 하나씩 사 먹어도 저렴한 이발비 덕분에 값을 치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나는 동네형들과 집으로 돌아오면서 신나게 놀다가 어둑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께 나의 무용담을 자랑하고 멋진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1960~70년대 아이스께끼는 여름 군것질의 탑티어에 속하는 화려한 간식에 속했다.
어머니와 우리 가족은 나를 보고 무척 놀라면서도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여섯 살짜리 아이가 대낮에 동네 아이들과 산으로 가는 걸 봤다는데 어둑해질 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으니 유괴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게다가 머리는 쥐 파먹은 것처럼 균일하지도 않고 잘린 머리카락들은 아직도 얼굴과 어깨에 묻어 있던 것이었다.
다행히 어머니에게 크게 혼이 나지는 않았다.
다음날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다시 시장통의 이발소로 데리고 가셨다. 하얀 가운의 이발사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차며 안쓰럽게 나를 바라보시더니 가위를 들고 응급조치를 하기 시작했다.
산동네이발소를 다녀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머리가 간지러웠다. 간지러워서 긁다 보니 머리카락이 빠지고 그 부분이 휑해졌다. 나는 어머니가 알게 되면 혼이 날까 봐 감추고 있었는데 이미 머리카락이 빠질 지경이어서 더 이상은 감추기 어려워졌다.
기계충이었다. 나는 당시 기계(機械)에 벌레(蟲)가 살고 있어서 기계충인줄 알았는데 이미 초등학교에 다니던 형이 “이발기 기계에 살고 있는 벌레가 머리에 옮겨서 병이 생기기 때문에 기계충”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기계충이 아니라 기계총이라는 사실은 내가 성년이 된 후에서였다.
기계총은 과연 어디에서 옮았던 것일까? 프랑스에서 발명되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전파된 바리캉.
'기계충'은 '기계총(機械총)'의 경기도 방언이며 기계총은 일종의 피부병인 두부백선의 다른 말이었다. 두부백선에 걸리면 모발이 있는 피부에 둥그렇고 붉은 반점과 비듬이 생기고 시간이 경과하면 부분적인 탈모도 오게 된다.
나는 왜 두부백선에 걸린 것일까? 시간이 많이 흐른 후의 내 생각으로는 산동네 이발사 아저씨가 사용한 바리캉과 뒷주머니에 꼽고 있던 빗 때문이 아닌가 싶다. 두부백선의 원인은 백선균의 감염 때문인데 환자와의 직접 접촉을 통해 전염될 수도 있고, 이발 기구나 모자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염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스께끼 하나에 넘어가 머리 군데군데에 머리카락이 빠져 휑하고 그 위에 하얀 가루약을 뿌려 마치 조금 모자란듯한 영구의 모습을 하게 된 나.
그러나 나는 동네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래도 잠시나마 고통의 이발소를 벗어나 산중의 자유를 만끽하게 해 준 형들이 얼마나 고마운가. 게다가 산을 오르며 흘렸던 땀을 싹 씻어주는 황홀한 아이스께끼의 맛이라니.
다시는 그 산동네 이발소를 찾아갈 일은 없었지만 그 이발소는 나의 어린 추억에 남긴 일탈의 순간이요 자유를 만끽하게 해 준 소중하고도 신비스러운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