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생활을 하던 내가 고라니의 실체를 접한 것은 전원생활을 막 시작한 2020년 봄철이었다. 태리에게서 젖냄새가 아직 가시기 전이었고 아장아장 나를 따라오던 시기였으니까 정확히는 5월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태리는 태어난 지 아직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운악산을 한번 다녀오고 나서는 집 뒷산으로 짧은 산보를 다닐 때였다.
태리와 조심스럽게 산길을 걷고 있는데 저 위쪽 산능선에서 커다란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웨엑” "우웨엑"
이 이른 아침에 누가 벌써 대형견과 산책을 나왔나? 아니 이 마을에 대형견이라고는 없고 진돗개만 몇 마리 있고 분명 진돗개가 짖는 소리는 아닌데? 그렇다면 들개?
내가 겁이 많은 건지 아니면 조심성이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도 잘 다니지 않고 등산로도 애매한 산속에서 혹여 봉변이라도 당할까 싶어 가던 길을 멈추고 집으로 되돌아왔다. "참 희한한 일이다."라고 생각하며.
이상한 울음소리는 그 이후로도 몇 번을 더 듣게 되었다. 일이 바빠 어두운 저녁에 태리와 산보를 나갔는데 저녁시간이라 산길을 피하고 도로로 나갔다. 시골도로는 특히 이른 아침과 해가 진 다음에는 의외로 차량통행이 많지 않아 그런대로 산보를 다닐만하다. 도로 옆길을 따라 20여분을 지나면 도로 양 옆으로 나무들이 울창한 숲길 도로가 나오는데 이번에는 그 숲에서 예의 그 큰 개 울음소리가 났다. “꾸에엑. "꾸에엑."
'이크' 또 나타났구나. 나는 "들개떼가 생각보다 많은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이번에도 가던 길을 돌아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에 주변에 마을사람이 있었다면 바로 물어보았을 터인데 살고 있던 집과 다른 주택과는 약 500미터 이상 떨어져 있어 마을사람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던 시기였다.
의심을 품고 있던 이상한 울음소리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앞산에서 아침 산책을 하다가 숲에서 예의 그 이상한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소리가 나는 곳을 관찰해 보니까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노루? 사슴?
하여간 그런 종류의 동물이 서서히 풀을 뜯어먹으며 이동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 고라니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그 시간 이후로 고라니와는 수십 차례나 만나게 된다. 집 마당 옆에까지 내려오기도 하고 앞집 마당의 텃밭 작물을 파먹기도 하고 논두렁에도 나타나고 산보길에도 나타나고 시골에서는 그야말로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정도로 흔히 만날 수 있는 야생동물이 바로 고라니다.
고라니.
고라니는 독특한 울음소리를 낸다. 예전에 한 개그맨이 ”꽤~액“하고 고라니 울음소리 흉내를 내는 것을 보았는데 실제로 그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대 수의과 신남식 교수의 표현에 의하면 "짝짓기 시기에는 수컷이 어금니를 부딪쳐 찰깍하는 소리를 내고 암컷을 쫓아다닐 때는 약한 휘파람 소리를 낸다. 어미가 새끼를 부를 때는 부드럽게 찍찍 소리를 내며 심하게 다쳤거나 고통을 받을 때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른다."
세계자연보존연맹 멸종위기생물적색목록에 나타난 고라니(water deer)
혹시 내가 처음 뒷산에서 들었던 소리를 비명에 가까운 "우웨엑" 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는 혹시 밀렵꾼이 쳐놓은 덫에 걸려 고통스럽게 울었던 소리는 아니었을까? 나는 울음소리가 나는 곳을 직접 가보지 않은 것을 새삼 후회했다.
고라니는 노루와 비슷해 혼동하기도 쉽지만 몇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노루 수컷은 뿔이 있지만 고라니 수컷은 뿔이 없다. 노루는 송곳니가 없으나 고라니 수컷의 위턱에는 5~10㎝ 정도의 긴 송곳니가 있다. 나도 가까이에서 고라니의 송곳니를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
그래서 고라니에게는 뱀파이어 사슴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특이하게도 고라니 수컷은 송곳니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짝짓기를 위해서 수컷끼리 싸우거나 서열 다툼을 할 때 실제로 사용된다고 한다.
멸종위기동물이자 유해동물의 아이러니
고라니에 대해서 검색해 보다가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라니가 전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여서 국제적인 보호종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해 동물로 지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라니는 세계적인 멸종위기동물이며 대부분 한국과 중국에 서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해조수로 등록되어 매년 십수만 마리가 포획되고 있어 안타까운 현실이다.
에 등재되어 있었다. 이 목록에서는 절멸-야생절멸-위급-위기-취약-준위협-관심대상으로 멸종위협의 등급을 나누었는데 그중에서 고라니는 취약(VU/Vulnerable) 카테고리에 속해있다. 이 등급에 속해있는 동물들은 사자, 하마, 치타, 판다 등이다.
고라니는 세계적인 희귀종 판다와 같은 등급에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캥거루는 멸종위기종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전 세계에 있는 판다는 중국의 소유이며 우리나라에 있는 세 마리의 판다는 매년 100만 달러의 임대료를 중국정부에 지불하고 그나마 임대기간이 지나면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에 비하면 유해조수로 지정되어 수렵허가까지 받을 수 있는 고라니는 얼마나 천대를 받는 것일까?
개체수가 워낙 많은 것이 문제였다. 고라니는 한국의 생태계에서 멧돼지와 함께 가장 번성하고 있는 동물이라고 한다. 그 숫자가 무려 약 70만 마리. 전 세계 개체수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호랑이, 표범, 늑대와 같은 포식동물이 사라진 것이 개체 수 증가 이유라고 하며 담비나 삵, 수리부엉이나 검독수리 등이 고라니를 사냥하지만 그 숫자가 미미하여 전체 개체수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매년 로드킬을 당하는 야생동물 중 고라니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국립생태원에 따르면 2019~2021년에 집계된 '로드킬' 야생동물은 4만 3660마리에 이른다. 종별로는 고라니가 2만 9349마리로 전체 로드킬의 67.2%를 차지했다. 고라니는 달리는 차가 실제보다 느리다고 인식해서 마음 놓고 도로를 건너다가 로드킬을 많이 당한다고도 알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고라니는 국내에서 유해조수로 분류되어 시기와 구역을 지정해 사냥을 허가한다. 2017년도에는 무려 18만 4466마리, 2018년도는 17만 4386마리나 포획되었다.
하지만 개체수가 많다고 이렇게 계속 잡아들인다면 어쩌면 우리의 먼 후손들은 고라니를 상상 속의 동물로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 태리와 산중에서 숨바꼭질까지 하던 고라니 새끼, 한 겨울 눈길을 밟으며 오붓하게 걸어가던 고라니 모녀, 산중에서 당당하게 걸어가며 자연을 만끽하던 수컷 고라니...
고라니 한쌍 씩을 전 세계 동물원과 원하는 장소에 임대해 주고 판다처럼 100만 달러는 조금 많고 10만 달러 씩만 임대료를 받으면 어떨까? 그 임대료를 모아서 고라니 자연공원이라도 만들어준다면... 시골에 살다 보니 동물학자도 환경보호론자도 아닌 내가 사람과 고라니가 함께 사는 생태계를 궁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