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쓰는 행위

잠시 Pause

by 봄날의 앤

야자 전 간단하게 저녁을 먹으러 다녀오면

언제고 불이 들어와 있는 교무실이 있다


연세가 지긋하신 선생님은 모두가 퇴근한 고요하고 어둑한 사무실에서 후후

이 여름 바람결에 그 낭만을 실어 색소폰을 분다


종종 그 음표 가득한 곳에 들러 간식을 핑계로 선생님의 조각을 훔쳤다

어느 날은 선생님의 글쓰기 습관이 궁금했다




- 선생님은 일기 어떻게 쓰세요?

-- A4용지에 10pt 연필로 써 내려가기 시작하신단다

- 그걸 다 써요?

-- 그저 매일같이 한페이지를 다 채우신단다

- 매일이 같은데 종이가 전부 차나요?

-- 그저 매일같이 한페이지를 채우는 것에 집중한다면 언제고 그것은 차오른다


참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몹시나 이해하고 싶었다

자발적인 휴식기에 돌입한 작년부터 지금까지, 매일이 같은 나날 속 이제야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저 한페이지를 내리 채워가는 일,

외부에서 내게로 그리고 다시 그곳으로 향하는 모든 에너지 흐름을 적어내는 일


당연한 게 하나 없는 삶이다

뜨거운 뙤약볕에서 버스를 기다린 일, 더위에 짜증 내기 싫어 담벼락에 핀 능소화를 찍어본 일, 어쩌면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린 게 아니라 굳이 굳이 찬란한 한낮의 능소화를 담으려고 나간 일, 한국의 여름이 그리운 이에게 이를 공유해 준 일


당신이 그곳에 있는 건 너무 복합적이어서 매일 한페이지씩만 적어도 몇십, 몇백 년은 더 걸릴 듯하다

우리의 세계는 너무나도 달라서 눈빛이 맞닿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황홀한지 모르고 산다


오늘도 한페이지를 채우며

오늘은 선생님이 되어볼까, 나를 닮고 싶어하던 친구가 되어볼까, 몇 해 전에 헤어진 연인이 되어볼까나


우주동지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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