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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도 동백꽃, 겨우내 피고 지다  (2편)

정운(丁芸) 이영도 / <언약>

by 김인숙 Mar 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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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도 동백꽃     


흔히 동백꽃은 세 번 핀다고 한다. 가지에서 한 번, 땅에서 한 번, 그리고 마음속에서 또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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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에서 한 번(장사도 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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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한 번


마음에서 한 번(인상 깊었던 장사도 동백꽃)마음에서 한 번(인상 깊었던 장사도 동백꽃)

      

12개의 청동 두상


유치환 시비 근처에는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 빨간 우체통이 있었다.


<별에서 온 그대> 연속극 한 장면<별에서 온 그대> 연속극 한 장면


1천 석 규모의 야외공연장 위에 있는 얼굴 조형물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작품은 김정명 작가의 ‘머리 12’로 쓰레기, 만화, 별자리, 책, 손가락, 포켓, 성(性), 종교, 12지, 상(賞), 건물, 브랜드 등 모두 12개의 청동 두상이 우뚝 서 있다.


그중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조형물은 바로 책 두상이라고 한다.


브런치 글 이미지 7
책 조형물과 설명책 조형물과 설명

 

부산대 명예교수인 김정명 작가는 많은 사람들이 볼 볼거리를 만들고, 보는 사람이 다시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가령 ‘책’이라면 유명한 책으로 구성되어 있어 어떤 책이 있는지를 찾는 재미가 있다.

    

브런치 글 이미지 9
브랜드 조형물과 설명브랜드 조형물과 설명
브런치 글 이미지 11
쓰레기 조형물과 설명쓰레기 조형물과 설명
브런치 글 이미지 13
포켓 조형물과 설명포켓 조형물과 설명


각 조형물 옆에는 작품의 이름과 설명이 곁들여져 있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화살표를 따라 이번에는 부엉이 조형물을 구경했다. 조형물이 있는 곳은 대부분 전망대가 함께 있는데 장사도에 있는 멋진 전망대는 모두 10개가 넘는다.


부엉이 조형물부엉이 조형물
조형물에 새겨진 글씨조형물에 새겨진 글씨


잠시 의자에 앉아 쉬면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마냥 바다만 바라보고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에게는 남은 과제가 있었다.


부엉이 조형물은 12번, 18번인 선착장까지 가려면 아직 들러야 할 곳이 남아 있었다. 아쉽지만 일어나서 다시 화살표를 따라갔다.      


동백꽃 없는 동백터널     


13번으로 가기 전에 동백터널을 설명하지 않았다. 이곳은 ‘별에서 온 그대’에서 주인공 도민준(김수현)과 천송이(전지현)가 병원 응급실에서 증발했다가 나타난 바로 그 동백터널이다.


시간이동으로 장사도에 떨어진 두 사람시간이동으로 장사도에 떨어진 두 사람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연속극이 끝나자마자 저곳이 어디인지 열심히 검색해 보았던 기억이 있다.     


드라마 속 동백터널드라마 속 동백터널


이 장면은 ‘별에서 온 그대’ 19화에서 방영되었다. 이날 도민준은 죽을 뻔한 천송이를 병원으로 데려가 직접 치료한 뒤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한적한 섬으로 순간 이동했다. 동백꽃이 핀 아름다운 섬이었고 나무 위에도 땅에도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장사도 곳곳에서 촬영했다.장사도 곳곳에서 촬영했다.


천송이는 한 연리지 나무를 보고 나무가 특이하다며 신기해했다.     


“연리지는 나무 두 그루 뿌리가 얽혀서 한 나무처럼 자라는 거야. 이건 동백나무, 저건 생달나무야.”     


별에서 왔으나 조선을 거쳐 오랜 기간 살아왔기에 해박한 도민준이 설명했다.     


“같은 나무끼리도 아니고 종류도 다른데 그게 가능하구나, 부럽다. 어쨌든 죽을 때까지 같이 있는 거잖아.”     


곧 헤어질 운명에 놓인 천송이가 슬프게 말했다.

     

이곳도 장사도이곳도 장사도


마치 한 몸처럼 얽혀 신기한 모습으로 자라나는 ‘연리지’는 보통 깊은 사랑을 상징한다. 같은 종류가 아닌데 서로 얽혀 잘 산다는 천송이의 말은 외계인과 지구인인 두 사람의 관계가 해피엔딩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날 방송이 끝나자 시청자들은 연리지가 천송이와 도민준 커플의 해피엔딩을 암시하는 복선이라며 두 사람이 헤어지지 않는 결말에 희망 회로를 돌렸다.


우리는 연리지 나무가 있는 곳까지 갔으나 나무를 찾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다들 고개를 저었다.


동백꽃 없는 동백터널(60m 길이)동백꽃 없는 동백터널(60m 길이)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역시나 이곳에는 동백이 없었다. 동백이 한창일 때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터널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장소였으나 지금은 깜빡이 전구가 동백꽃을 대신하고 있었다. 아쉽지만 다음 장소로 발길을 옮겼다.


옥미조 교사가 지은 교회


13번은 작은 교회다. 사람이 들어가 앉는다면 5명이나 들어갈까? 이 교회는 장사도 분교 옥미조 선생이 세웠는데 주민 80여 명 중 70명이 이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옥미조 선생이 이곳에 온 것은 1972년, 그는 주민들과 함께 척박한 황무지를 개간했다.


이 이야기는 <낙도의 메아리> 영화로 만들어졌다. 줄거리는 낙도에 부임한 부부교사의 끈질긴 노력으로 무지한 어민들이 변화하는 내용이다.


술과 도박으로 황폐한 낙도를 저축과 생산에 눈뜨게 하여 자립마을로 이끌어 올린 부부교사의 새마을운동지도 수기를 기록했다.    


그다음 그가 한 일은 바로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는 선착장에서 산꼭대기 교회터까지 1천 번 넘게 자재를 직접 운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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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교회


현재의 교회는 교회 터에 상징적으로 지어놓은 것이다. 교회는 1973년 5월에 완공되었다. 교회 옆에는 옥미조 선생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옥미조 선생 공덕비옥미조 선생 공덕비


사람들은 이 작은 교회가 신기해서 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교회 앞에 서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교회는 너무 작아 앙증맞고 귀엽다.     


남해가 배경인 카페테리아     


다음 코스는 당장 들어가 한 끼 먹고 싶은 식당, 누비 하우스다. 그러나 시간은 벌써 1시간 반이나 지났고 우리가 보지 못한 곳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입맛을 다시며 그냥 지나쳤다. 누비하우스 앞쪽에는 바다를 배경으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테리아가 있었다.      

식당 메뉴식당 메뉴


“얘, 밥은 포기해도 커피는 마시자.”     


지친 친구의 말에 뜨끔했다. 멋진 경치를 구경하는 것은 좋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우리가 먹은 거라고는 아침에 여행사에서 나누어준 시루떡 한 조각과 휴게소에서 먹은 핫도그가 다였다. 이른 아침이라 휴게소에는 그 흔한 호두과자, 떡볶이도 없었다.      


“힘든데 나머지는 가지 말까?”

“그럴 수는 없지. 정 시간 없으면 커피 테이크아웃해서 들고 가자.”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닭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닭


어느새 친구도 나에게 세뇌가 되었는지 한 군데도 놓칠 수 없다며 앞장서서 걸었다.


야외 갤러리에 가기 전 배 타러 가는 곳 이정표와 시간이 아주 크게 보였다.     


배 타는 곳 안내도배 타는 곳 안내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야외 갤러리를 휙 돌아 나와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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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전시장에 설치된 조형물
만선으로 기뻐하는 사람들만선으로 기뻐하는 사람들


남해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카페, 시간을 잊은 채 멍 때리고 싶었다.     


멋진 카페테리아멋진 카페테리아


자리에 앉은 지 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시계를 보니 15분밖에 남지 않았다.      


“내려가야겠다. 가자.”

“와, 정말 강행군이다.”     


여행을 마치며     


우리는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원래 관절이 좋지 않았던 친구는 올라가는 건 그런대로 했는데 내려가는 걸 힘들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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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이 많다.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서 내려가지 못하고 옆으로 한 걸음씩 겨우 걸어 내려갔다. 정말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매일 동네에서 만나 평지만 다녔기에 몰랐던 친구의 고충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계단은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관절이 좋지 않은 어르신은 장사도를 패스하시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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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면서 본 나무들

“좀 쉬었다 갈까?”     


친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니야, 그러다 배 떠날라.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되지.”     


친구의 힘든 걸음걸이를 지켜보며 겨우 배가 보이는 곳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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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와서 뒤돌아 본 장사도, 우리가 타고나갈 배


이미 사람들이 배를 타기 시작했다. 숨 돌릴 틈도 없었다.


우리도 얼른 배에 올랐다. 나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돌아오는 배에서는 갑판에 나가지도 못했다. 배에서 내리자 기사가 우리를 반겼다.

     

아까 섬에 있을 때 기사 전화가 왔었다.     


“아무래도 6시간 차를 타고 돌아가려면 밥을 드시는 게 좋겠지요? 고객님은 어떻게 하실래요? 다른 분들과 함께 드셔도 괜찮습니까? 원하시는 분들 인원을 체크해서 예약하려고 합니다.”     


“네. 저희는 좋습니다.”


기사가 안내해 준 식당은 1층이 건어물 상회였고, 2층이 식당이었다.


2층 식당으로 올라가자 테이블마다 된장을 풀은 해물탕이 끓고 있었다. 반찬은 몇 개 없었지만 오늘 처음 먹는 끼니라 밥맛이 꿀맛이었다. 여기저기 떠드는 소리 없이 밥 먹는 소리만 들렸다. 역시 시장이 반찬, 모든 음식이 다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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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 해물탕과 반찬


밥을 먹은 후 아래층에 커피가 있다고 해서 내려가니 싱싱한 현지 건어물들이 우리를 데려가주세요, 하고 유혹했다. 김, 멸치, 미역 등 물건이 좋아 보였다.     


한 바퀴 구경하고 곱창김 두 묶음을 샀다. 한 묶음은 슬쩍 친구에게 내밀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우리는 곯아떨어졌다. 자다 깨다 하다 보니 어느새 죽전 휴게소였다.     


“자, 여기서 마지막으로 쉬었다 가겠습니다.”     


죽전 휴게소죽전 휴게소


휴게소에서 커피를 두 잔 샀다. 그리고 정신이 말똥 해져 차가 서울역에 도착할 때까지 수다를 떨며 즐겁게 돌아왔다. 서울역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생각보다는 덜 걸은 것 같다.생각보다는 덜 걸은 것 같다.

.     



오누이 시조 시인 이호우, 이영도


이영도(李永道, 1916년~1976년) 시조 시인은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내호동 259번지에서 태어났다. 호는 정운(丁芸)이다.     


본관은 경주, 선산 군수였던 아버지 이종수와 어머니 구봉래 사이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7년 박기주와 혼인하였으나 곧 남편과 사별하고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다.     


그녀의 오빠는 이호우(李鎬雨, 1912~1970) 시조 시인으로 남매는 민족시의 현대화에 크게 공헌한 문학인으로 손꼽힌다.

    

이영도 시인의 시비이영도 시인의 시비


장사도 해상공원 꼭대기 청마 유치환 시비 뒤에는 이영도 시인의 ‘황혼에 서서’가 새겨져 있다.     


황혼에 서서 / 이영도     


()이여, 목메인 듯

지긋이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沈默)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너는 가고

애모(愛慕)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 입 같은

물결 같은 내 소리     

세월(歲月)은 덧이 없어도

한결같은 나의 정()     


아래 시를 읽어보면 아, 이 시인, 하고 무릎을 치는 작가가 바로 그녀의 오빠 이호우다.     


살구꽃 핀 마을 / 이호우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살구꽃 핀 마을'을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난다.     


이영도는 밀양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여자 고등 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      


1945년 첫 시조 ‘제야’를 써서 1946년 5월 <죽순> 창간호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발을 디뎠다.


첫 시조집은 1954년에 발표한 <청저집>이다.      


이영도가 통영여자중학교에서 청마 유치환을 만나 사랑을 노래했던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1편에서 밝힌 바 있다.      


뛰어난 시조 시인 이영도


오늘은 이영도 시인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사실 청마가 아니었다면 이영도는 알맞은 상대를 만나 재혼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늘 한복을 입고 단아한 여인이 수준 높은 시까지 지었던 지적인 여성이라면, 청마뿐 아니라 뭇 남성들의 애간장을 녹였을 테고 그중에서 결혼 상대자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이영도 주변에는 내로라하는 남성들이 기웃거리고 있었고 심지어 미모에 반해 상사병에 월담을 감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오히려 청마와의 염분설로 이영도의 문학성은 훼손되고 가려졌다. 그러나 그녀는 황진이 이후 뛰어난 여류 시인이었다.


맥령(麥嶺) / 이영도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누름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모래 솥을 열어보네.

한 끼 건너기가 강물보다 어렵던가.

고국을 찾아온 겨레 몸 둘 곳이 없다 말이

오늘도 밥 얻는 무리 속에서 새 얼굴이 보인다.     


보릿고개의 어려움을 적은 이 시는 배고픔의 고통을 한 끼 건너기가 강물보다 어렵다고 표현했다. 가슴이 찌릿한 구절이다. 그렇다고 이영도 시인이 연약한 시만 쓴 것은 아니다. 아래 피아골 시를 보면 비장함도 느껴진다.     


피아골 / 이영도     


한 장 치욕 속에 역사도 피에 젖고

너희 젊은 목숨 낙화로 지던 그날

천년의 우람한 침묵, 짐승같이 울던 곳.     

지친 능선 위에 하늘은 푸르른데

깊은 골 칠칠한 숲은 아무런 말이 없고

뻐꾸기 너만 우느냐, 혼자 애를 타느냐.


이영도는 한때 폐침윤(폐질환의 일종)에 걸려 마산결핵요양원에서 휴양했고, 이 무렵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영도 시집 <외따로 열고>이영도 시집 <외따로 열고>


그녀는 청마가 죽은 뒤 1960년대 후반에는 서울로 거처를 옮겨 글을 쓰고 중앙 대학교에 출강했다. 또 한국 여류 문학인회 부회장, 한국 시조 시인 협회 부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1968년 오빠 이호우와 두 권으로 된 오누이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를 발간하였는데, 이영도 시집 편은 <석류>다.      


1969년 청마 서간집의 저작권료를 바탕으로 정운문학상(丁芸文學賞)을 제정했다.     

    

1976년 3월 5일, 이영도는 그동안 쓴 원고 뭉치를 들고 당대 최고의 시조 시인 이은상 선생을 찾아갔다. 책의 서문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점심까지 함께 나누고 돌아갔는데 바로 그날 밤 그녀는 갑작스러운 뇌일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허망하게 세상을 등진 이영도의 장례식은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장례위원장은 이은상 시인이 맡았다.     


결국 그녀가 내려고 했던 시조집 <언약>은 유고 시집이 되었다. 이은상은 안타까움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서문을 썼다.

    

유고집 <언약>유고집 <언약>


이영도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다정다감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밝고, 고요하고, 격조 높은 시를 쓰고, 시를 이야기하고, 또한 시를 생활하고 간 여인이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그의 참모습을 전해 주는 가장 적절한 말인지도 모른다.     


중략     


그리고 우리 시대에 와서도 일찍부터 여류시조 작가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여름밤 구름을 뚫고 나타나는 달처럼 모두들 쳐다보도록 맑고 환한 모습을 드러내 보인 두드러진 여류 시조 작가가 누구였더냐 물으면 아마 누구도 이영도를 지적할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확실히 시인이 도달해야 할 어떤 경지에 이르렀던 여인이기 때문이리라.     


살아생전 그녀는 문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인정받았고 노산 이은상을 비롯한 주요 문인들과도 깊은 교유를 나누었다.      


작가 박완서는 이영도 시인에게 선물 받은 만년필을 깊이 간직하며 70년대 말과 80년대 그 만년필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수많은 육필 원고를 썼다고 한다.      


특히 이영도는 많은 문학 제자들을 지도했는데 젊은 시조 시인들은 그녀를 엄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녀의 품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시인은 흙으로 돌아갔으나 이영도, 이호우 남매가 태어난 고향 경북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에는 그들의 생가가 남아 있다. 시인 남매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자 지난 2006년 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되어 청도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2005년 1월에는 오누이 시조 시인의 생가 인근에 그들을 기리기 위한 ‘오누이 시비(詩碑) 공원’이 들어섰다.   


이호우와 이영도 생가는 1910년경에 건축된 단층 한옥 기와집으로 남매가 태어나고 성장한 주택이다.


이영도, 이호우 남매 생가이영도, 이호우 남매 생가
살아생전 생가 앞에서의 이영도살아생전 생가 앞에서의 이영도


오빠 이호우는 1940년 문예지 문장에 ‘달밤’이 추천되면서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했으며, 대표작으로 개화, 살구꽃 피는 마을, 휴화산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고전적 시조를 현대의 감각과 정서로 전환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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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우 시인의 책


이영도에 대한 평은 다음과 같다.     


“현대적 감각으로 초, 중, 종장으로 나눠지는 시맥의 연결법, 시의 전개법을 새롭게 하였고, 여성으로서의 섬세와 면밀을 현대시조의 형식에 알맞게 조형했다.”(이근배 시인)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하여 시조 시단에 이채를 띄우는 여류시조시인”(가람 이병기)     


“꽃이라면 매화요, 새라면 두견새 같아서 그의 시와 글은 언제나 맑은 향기와 무궁한 하소연을 담고 있다.”(박화성 작가)


“이 땅에 현대시조를 심기 위해 나신 분으로 황진이 이래 여류로서 산맥을 일으킨 분이다”(박옥금 시인)     


이영도 시인은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잊혀가는 고유의 가락을 시조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녀는 간결한 표현으로 자신의 정감을 다스리며 인생을 관조하는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유치환 시인과의 연애사건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아 오히려 시인의 작품성이 가려지고 대중의 호기심의 대상이 된 것이 아쉽다.


진달래-다시 보는 4·19에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날 쓰러져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련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이 시는 4월 혁명에서 희생된 꽃다운 젊음을 진달래의 꽃 사태로 비유했다. 그들은 언제나 피어나는 아름다움으로 가슴에 자리하고 있으며 살아있는 자신은 차라리 욕된 것이라 부끄러워했다. 이 시는 노래로 작곡되어 운동권 학생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수필집으로 <춘근집(春芹集)>(1958), <비둘기 내리는 뜨락>(1966), <머나먼 사념(思念)의 길목>(1971)이 있으며 제8회 눌원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사후 유고작으로 <나의 그리움은 오직 푸르고 깊은 것>과 <언약>이 간행되었다.     


이영도 시조집이영도 시조집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 이영도의 문학적 역량을 재평가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94년, 부산 금정 공원에 시비가 세워졌으며 고향 청도에서는 ‘이영도 시조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2003년에는 고향 마을 앞에 시비(달무리)가 세워졌고 2006년에는 이영도 시인 사후 30주년을 기념하는 시조 전집 <보리고개>가 발간되었다. 이영도의 시조와 수필은 섬세하고 단아한 언어 조합으로 한국인의 전통 서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래의 글은 이영도가 쓴 <춘근집>에서 발췌한 글이다. 여기서 M은 청마 유치환을 말한다. 청마의 절절함도 애절하지만, 이영도의 마음은 애절하다 못해 슬프다.**     


<춘근집> 책<춘근집> 책

     

코스모스와 더부러


코스모스 빛갈이 더욱 가냘프게도 고와 옵니다.

우리는 파인(巴人)의 해당화가 아니라 가을이면 온 앞뒤 뜰에다 코스모스를 심거 피우다 삽시다. 이것이 끝내 나의 꿈으로만 그치는 것이겠읍니까?     


이것은 내가 코스모스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M에게서 온 요지음 편지의 한 구절이다.

어느 잡지에선가 C여사가 쓴 글 중에서 그의 남편 파인(巴人)의 해당화 예찬의 편지를 읽고 M은 엉뚱스리 내게다 이런 시적(詩的)인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과연 나는 코스모스가 무척 좋다. 그렇기에 한때는 동무들이 내 목이 코스모스처럼 길다고 하여 별명을 코스모스라고 붙여 준 시절도 있었다.

봄이면 목련! 가을엔 코스모스! 이 두 개의 청초하고 애절한 품격이 내게 있어 옛 시인 묵객들의 애완을 독점한 난국(蘭菊)의 운치에 못지않는 마음 끌는 꽃들이다.

끝없이 트인 가을 하늘 아래 뜰앞에 울타리 옆에, 언덕 밑 밭두던에, 소학교 화단에, 어디라 할 것 없이 희고 붉게 엉클어져 화안히 눈앞을 장식하는 그 난만한 것들을 대하면 무엔가 그립던 인정을 만난 듯 내가 무슨 이것들이 피기를 오래오래 기다리고 있었기나 한 듯 마음은 감개에 젖어지는 것이다.

내 목숨도 이제 코스모스처럼 화안히 피어나 난만히 자랑을 퍼뜨릴 수 있는 계절이 닿아 올 것만 같은 공연히 마음 뻐근함을 느껴 보다가도 이내 가만히 그 하나하나의 가냘픈 꽃잎과 여윈 몸매가 창창한 추청(秋晴)을 배경하고 하늘대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으면 모두가 모두 사모치는 호소를 그 가슴속에 담고 있는 것만 같애 그만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것이다.

인정 세태가 추하고 미울수록 내게는 이 슬프도록 맑고 고운 것들이 눈물겨운 애련이 아닐 수 없다.

요즘도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기차를 타고 가다 내다볼라치면 정거장마다 화단을 장식한 깨끗하고도 화려한 빛갈들이 이제는 또 하나 다른 의미의 슬픈 음향을 흔들며 내 가슴에 와닿는다.

어느 조용한 바다를 면한 마을! 앞뒤 뜰에다 왼통 코스모스를 심어 피운 아담한 주택이 눈앞에 그려진다.

하루의 직무에 고달픈 몸을 쉬이며 코스모스가 피어 엉클어진 뜰에 나란히 의자를 놓고 시절 이야기, 고서(古書) 이야기, 자라나는 아이들의 지혜 같은 온갖 희망스러운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한 쌍의 나비처럼 즐거운 영혼을 안주(安住)하는 그러한 황혼을 눈앞에 그려 본다. 얼마나 미소로운 인생이겠는가?

그러나 M의 사연과 같이 이 지극히 적은 나의 소망도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 생애가 될는지도 모르는 것인가 생각하니 새삼스리 내 인생이 그지없이 덧없어지는 것이다.

인간 세상이란 인간의 진실을 끝내 허무케 하는 모순의 저자로만 내게는 보여 왔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날 나의 경륜을 스스로 믿어 보지 못하는 불행을 지닌 인간이다. 건강에, 인격에, 사랑에, 또한 조국에 인간으로서의 어느 욕망과 이상에도 나는 아직 이루어 본 기억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코스모스가 아름답게 필수록 내 꿈이 황홀해지고 코스모스가 슬플수록 내 인생이 외로워지는 것은 나의 서정적인 생리의 소치려니와 코스모스가 가져오는 그 아득한 또 하나의 음향만은 그대로 나의 꿈이요, 보람이요, 간절한 생명의 설계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아직도 지니고 가야 할 내 인생의 서룬 훈장이 아닐 수 없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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