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전(朴文秀傳)-작가, 연대 미상
문경새재는 경상북도 문경시와 충청북도 괴산군 사이에 있는 높이 642m의 고개다. 고개를 넘으면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갈 수 있다.
새재는 ‘조령(鳥嶺)’의 순우리말로 괴산에서는 연풍새재, 문경에서는 문경새재로 불렀다.
옛날 부산, 영남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낙동강에서 배를 타고 상주에 다다른 뒤 문경새재를 넘었다. 그리고 충주 목계나루에서 다시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한양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천리길이었다.
문경의 한자는 ‘들을 문(聞)’, ‘경사 경(慶)’이다. 즉 경사로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에 영남지방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려면 죽령, 문경새재, 추풍령 고개 중에서 한 군데를 선택해서 넘어야 했다.
그런데 과거를 보는 선비들은 대부분 죽령(영주-단양)과 추풍령(김천-영동)을 넘어가지 않고 문경새재(문경-충주)를 택했다.
죽령(竹嶺)은 과거에서 대나무처럼 죽죽 미끄러진다는 이유로, 추풍령(秋風嶺)은 추풍낙엽 떨어지듯 시험에서 우수수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만큼 선비들은 험한 문경새재를 선택해서라도 경사로운 소식, 장원급제 소식을 듣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다.
문헌을 살펴보면 한양까지 걷는 일수가 문경새재는 14일, 죽령을 넘으면 15일, 추풍령은 16일 걸렸다고 하니 문경새재가 이 세 고개 중 가장 직선적인 거리여서 택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문경새재부터 한양까지는 8일이 소요되었다.
과거제도가 시작된 것은 고려 광종 때였으나 체계적으로 시행된 것은 조선시대였다.
조선의 과거제도는 문과와 무과, 잡과로 나누어졌는데 문과는 크게 두 가지 시험을 치렀다. 하나는 유교 경전에 대한 시험, 다른 하나는 당시의 정책에 대해 논술하는 것이었다. 응시생은 이 중 한 가지 시험을 볼 수 있었다.
단계별로는 소과와 대과가 있어 소과에 합격하면 시험 종류에 따라 생원이나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소과 합격생이나 성균관 유생들은 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대과는 각 지방에서 치르는 초시, 초시 합격생들을 서울에 모아 치르는 복시, 임금 앞에서 치르는 어전시 등 3단계가 있었다.
어전시에 오르면 일단 관직을 받을 수 있었는데, 과거를 본 성적에 따라 관직과 승진이 결정되었기에 좋은 성적을 얻으면 유리했다.
백두대간(白頭大諫) 마루를 넘는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중심도로였고 사회, 경제, 문화 등 문물의 교류지이자 국방상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새재’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1. 새(鳥)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2. 억새, 또는 풀(草)이 우거진 고개
3. ‘하늘재’와 ‘이우릿재(이화령)’ 사이(間)의 고개
4. 새(新)로 만든 고개
부산 동래와 한양을 잇는 영남대로와 문경새재 길은 조선 태종 14년(1414)에 만들어졌다. 이후 임진왜란에서 패배한 1594년 선조 때 문경새재 제2 관문(조곡관)을 가장 먼저 설치했고, 1708년 숙종 때 제1 관문(주흘관)과 제3 관문(조령관)을 설치하여 군사적 요새로 삼았다.
1981년, 문경새재 주변 5.5km를 도립공원으로, 1982년에는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길에는 국가지정 문화유산인 문경 조령 관문(사적)과 자연유산 문경새재(명승)를 비롯해 경상북도 지정 문화유산인 신길원 현감충렬비(유형문화유산), 산불뇨심비(문화유산자료) 등이 있다.
문경새재는 영남대로(옛길)와 어우러져 천혜의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다.
오른쪽으로 주흘산(1106m), 왼쪽에 조령산(1026m)을 두고 그 사이 계곡을 구불구불 돌아 약 6.5km의 길이 잘 닦여져 있다. 계곡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물은 낙동강의 3대 발원지의 하나인 초점에서부터 시작된다.
문경새재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어 전국 어느 곳에서나 접근성이 좋다. 서울에서도 2시간이면 닿을 수 있다.
2024년 11월 판교에서 문경까지 중부내륙선이 개통되어 접근성이 더 좋아졌다. 그러나 서울역이나 용산역이 아닌 판교에서부터 시작이라 서울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직 자차가 편하다.
이번 여행은 뜬금없이 이루어졌다. 원래 문경으로 취재를 갈 일이 생겼기에 혼자 조용히 다녀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때마침 미국에서 나온 큰오빠가 어디든 가고 싶어 해서 같이 가기로 했다.
이후 가족들과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여행 소식을 전해 들은 조카가 자기도 합류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인원이 불어 4명이 출발하게 되었다.
여러 사람이 모인 관계로 평일 여행은 어려워 토요일을 출발일로 정했다. 하필이면 남쪽 나라에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에 고속도로는 많이 밀렸다.
충주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사과로 유명한 고장이라 호두과자도 사과 모양이었는데 단팥 대신 사과잼이 들어있어서 특별한 맛이었다.
이름은 사과빵, 그러나 크기와 생김새는 누가 봐도 호두과자였다. 호두를 사과로 만든 아이디어가 참신했다.
우리는 일찍 출발했기에 10시에 문경새재 도립공원에 도착했다.
주차장은 여러 곳이 있었는데 가장 적게 걷는 곳은 제3 주차장이다. 올해부터 주차비가 무료다.
우리는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옛길박물관이 보였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옛길박물관은 1997년 문경새재 박물관으로 개관하여 2009년 4월 옛길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다.
박물관 1층은 ‘봇짐을 챙기며’라는 주제로 전시되어 있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의 괴나리봇짐에는 과연 무엇이 들었을까 궁금했는데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옛 지도와 길 사진들도 멋있었다.
선비들이 메고 다녔던 괴나리봇짐에는 고지도, 나침반, 먹과 붓, 자그마한 표주박이 있었고 한양까지 계속 바꿔 신었던 짚신이 있었다. 목적지인 한양까지는 총 9켤레의 짚신이 필요했다고 한다.
박물관을 나와 다시 길을 걸었다.
문경새재에는 총 3개의 관문이 있다. 1관(주흘관)에서 2관(조곡관)까지 거리는 3km, 2관에서 3관(조령관)까지 거리는 3.5km로 왕복 13km다.
걸어서 다녀온다면 최소 4시간이 소요되는 트래킹이다. 길은 넓고 평평하게 잘 닦여져 있어서 걷기에 좋았다. 탄탄해도 너무 탄탄해서 오히려 옛길이 그리울 정도였다.
1관과 2관까지는 유료 전동차가 있다. 그러나 편하자고 이 차를 타고 왕복하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으니 가급적 걸어서 올라갔다가 힘들면 내려올 때 이용하기를 권한다. 아니면 반대로 해도 괜찮다.
문경은 원래 광산으로 유명했고 광산업으로 생활하던 도시였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광산은 문을 닫았다. 문경시는 사람들을 유입할 새로운 난제에 부딪쳤다. 그때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관광산업이었다.
자료를 살펴보니 작년 문경을 찾은 관광객은 대략 500만 명, 그런데 관광객이 문경에 와서 머문 시간은 고작 4시간이며 한 사람이 쓰고 간 돈은 평균 3,000원뿐이었다고 한다.
문경시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고민이 깊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관광객이 찾고,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중부내륙 철도 운행, 주흘산을 케이블카로 오르는 방법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왼쪽으로는 물 맑은 계곡이 있고 가운데로 걷기 좋은 길이 있다. 양옆은 넓은 들판으로 각종 조형물이 있어 포토존으로 손색없었다.
계곡 건너편에 문경생태 미로공원이 있었다. 들러보지 못했는데 이곳은 미로공원으로 만들어져 아이들과 함께 방문하면 좋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비석이 있기에 가 보니 20기의 선정비였다. 대부분 관찰사와 현감의 선정비인데 이곳에 선정비가 많은 것은 한양과 영남을 잇는 문경새재로 인해 많은 벼슬아치들과 연이 닿았기 때문이다.
입구에서 1 관문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사진 찍으며 천천히 걸어도 2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전동차는 1 관문 옆으로 난 길을 이용하기에 1 관문을 둘러볼 수 없다. 그래서 전동차를 타면 안 된다.
1 관문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니 왼쪽으로 오픈세트장이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방송되는 많은 사극과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고 있다고 한다. 입장료는 2,000원이다.
다리를 건너 세트장 안으로 들어가니 눈에 익은 광화문이 보였고 광화문을 들어가면 경복궁이 나온다.
비수기여서인지 여기저기서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사진을 찍을 때마다 자동차와 트럭이 들어와 사진을 망쳐놓았다. 각도를 잘 잡고 줌으로 당겨 가급적 자동차를 피해 사진을 찍었다.
초가집 세트장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일지매를 촬영했던 산채가 있다.
세트장에서 나와 제2관인 조곡관에 다다랐다. 길은 조금씩 오르막이지만 충분히 걸을만했다. 조곡관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넘어온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문경새재의 험준함은 예로부터 유명했다. 신라 초기에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을 막는 국경선이었고, 후삼국시대 견훤과 왕건의 격전지 중 하나였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이 충주 탄금대가 아닌 이곳에서 매복했다가 결전을 치렀다면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를 효과적으로 막아냈을지도 모른다.
명나라 장군 이여송은 문경새재의 지형을 보고 이 험준한 고개를 방패막이로 삼아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한 신립 장군을 비웃었다고 한다.
당시 신립 장군은 천혜의 싸움 장소였던 문경새재를 피해 넓은 벌판인 탄금대를 결전장으로 선택했다. 18,500명의 왜군은 문경새재를 넘어 탄금대로 향하면서 쾌재를 불렀다.
신립 장군은 결국 탄금대 전투에서 참패했다. 원래 북방에서 위용을 떨친 신립 장군은 기마전에 능한 장수였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게 전날 비가 내린 충주벌은 땅이 질어서 말이 미끄러져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
그야말로 지략을 짜는 것은 사람이지만 승리를 이끄는 것은 하늘이라는 제갈공명의 말이 딱 맞아떨어진다.
긴급하게 모은 병사들이 도망가면 안 되었기에 배수진을 친 이유도 있었지만 아무튼 신립 장군의 작전은 매우 아쉽다.
결국 임진왜란에서 패한 뒤 선조는 부랴부랴 문경새재에 방어벽을 쌓은 것이다. 사후약방문, 그렇게 쌓아진 성이 바로 조곡관(제2 관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흔히 우리는 박문수를 암행어사로 알고 있다. 그러나 박문수는 임금의 명을 받고 특별한 임무를 수행한 어사(御史)는 여러 번 수행했지만, 암행어사는 단 한 번도 임명된 적이 없다.
이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으로 들어가 검색을 해보았다. 암행어사 박문수를 치자 ‘검색 내용이 없습니다’라고 떴고 어사 박문수를 입력하자 자료들이 죽 나왔다.
조선 백성들은 박문수를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인식하고 있고, 그의 암행어사 행적은 바람결을 타고 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실제 박문수가 어사로 활동한 시기는 1727년~1728년, 1년간에 불과하다. 그 기간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시기로 영남 시찰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어사라고 하면 암행어사를 떠올리지만 실제로 신분을 비밀로 하고 암행어사 일을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 구휼, 감찰 등을 위해 파견이 될 때가 더 많았다. 암행어사는 파견된 어사가 제대로 일을 하는지를 감시하는 역할로 비밀리에 딸려 보내기도 했다.
어사와 암행어사는 사실 동격인데 암행어사라고 권한이 더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분을 노출할 수 없기에 임무를 처리하면서 고생할 확률이 높았다.
박문수는 어사를 하기는 했지만, 암행어사가 아닌 ‘별견어사(別遣御史)’였다. 그러나 박문수는 지방관 시절 행적이 많아 암행어사 이미지가 굳어진 것이다.
박문수는 1727년(영조 3) 9월 영남별견어사(嶺南別遣御史)로 영남(문경새재 이남 지망, 현재 경상도)에 파견되었다. 물론 암행어사는 아니었다.
다음 해 3월까지 그는 안동, 예천, 상주 등지를 순행하며, 지역에 명망 있는 인사들과 공개적인 만남을 가졌고, 이때 나라 양식 배분, 고위 관료 급여 삭감, 백성 구제 등의 행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별견어사 업무 지침에 따라 수령 41명을 조사하여 이 중에서 혐의가 있는 13명을 파직시켰다.
박문수의 어사 활동 시기는 1년도 채 되지 않았으나 어사 직을 담당했을 때 적지 않은 치적과 공훈을 세웠기에 사람들의 칭송이 따랐다. 그래서 그는 암행어사의 대명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박문수가 어사와 관찰사로 활약한 지역은 영남지역뿐이었으나 다른 지방에도 박문수가 다녀갔다는 설화가 있을 정도로 일반 백성들에게 명성을 떨쳤다.
한 번은 박문수가 경상도 수해를 보고는 즉각 구호곡을 거두어 배편으로 보내 함경도의 백성들을 구한 적이 있었다. 구호가 급하다고 생각한 박문수는 “대신들의 재물을 거두어 나라에서 돕자.”라는 상소를 올렸다.
문제는 박문수가 절차를 무시하고 영조에게 바로 상소를 보낸 것이었다. 박문수는 예상대로 노론의 엄청난 공격을 받았으나 영조가 용서하였고, 구호를 받은 고장에서는 박문수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 송덕비가 세워진 덕에 전국으로 소문이 퍼져나간 것도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백성들 사이에는 그의 어사 시절에 관하여 갖가지 민담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때문에 그가 직접 빈민 구제 활동을 활발히 펼친 영남 지역에서는 신격화되었고 특히 경상북도 영양군에서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신 서낭당을 만들어 지금도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쯤 해서 박문수의 인격을 검증할 수 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반란 진압군으로 참여한 군인이 쓴 기록인 <난리기>에서는 박문수가 병사들을 아끼고 사랑한다고 칭찬하고는 일선 병사들의 고름을 직접 입으로 빨아 치료해 준 일을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의 이런 행동은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충성심을 높이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박문수는 영조 임금의 편애를 많이 받은 신하였다. 정치적으로도 영조의 탕평책과 맞닿아 있었다.
영조는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박문수이며, 박문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잠잘 때 외에는 언제나 경을 생각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박문수는 영조가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할 때 명문벌열(名門閥閱) 중심의 인사정책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했으며, 4색(四色, 남인·북인·노론·소론)의 고른 인재 등용을 강조했다.
조선 후기의 한글 소설, 일종의 역사 전기 소설로, 조선 영조 때 어사 박문수가 왕의 명을 받아 무주 구천동에 가서 부사(府使) 천운서(千云西)의 횡포를 징계하고 유안거(兪安居)의 분을 풀어주었다는 내용이다.
<박문수전>은 어사 박문수가 악한 사람을 다스리는 내용을 담은 작자·연대 미상의 고소설이다. 박문수를 암행어사로 등장시켜, 현실이나 허구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과 그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유 씨가 마을에서 자신의 며느리를 빼앗길 사건을 해결해 준다는 내용이 있다. 박문수의 사건 해결을 통해서 죄를 지은 죄인은 정당하게 징벌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제 의식을 보여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조선 영조 때 박문수는 암행어사를 제수받고 전국을 암행하며 돌아다닌다. 한 번은 충청도를 거쳐 무주 땅에 들어가 늦은 밤에야 덕유산에 이르렀다.
박문수는 하룻밤 유숙하기 위해 여러 집을 찾다가 한 노인이 젊은이에게 죽여 달라며 소리를 지르는 것을 목격한다. 이 노인과 젊은이는 부자지간이었다.
박문수는 그 연고를 듣는다. 사연인즉, 이 마을은 구 씨와 천 씨가 많이 살아 ‘구천동’이라 불리는데, 노인만이 유 씨였다. 천 씨는 유 씨를 모함하여 유 씨의 며느리를 탈취하려 계교를 썼다.
계교에 빠진 유 씨는 며느리를 빼앗기게 되자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박문수는 무주 관아로 출도(出道)해서 문제를 해결했다.
세월이 지나 박문수는 구천동을 다시 찾는다. 그러다가 옛날 유 씨 노인이 살던 곳에 커다란 기와집이 들어선 것을 보게 된다. 기와집이 생긴 이유를 마을 사람들에게 묻자, 천 씨가 관아에 끌려간 뒤로, 모든 재산을 동네 사람들과 유 씨에게 나누어 주었고 이를 밑천으로 유 씨가 큰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어느 날 영조는 조정 신하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겪었던 특이한 경험을 말하게 한다.
이때 박문수는 구천동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을 말하고, 이에 왕을 비롯한 신하들은 크게 감탄하였다.
이 일을 배경으로 이 소설이 쓰였다.
지금 온라인 검색을 해보면 암행어사 박문수라는 타이틀이 달린 책이 부지기수다. 내용은 보통 박문수전에 나오는 것처럼 억울함을 당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어사 박문수가 출두하여 풀어준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이 박문수를 암행어사로 기억하는 반면 정약용, 이황, 채제공, 김정희, 조광조가 진짜 암행어사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암행어사는 조선시대에 임금이 특별히 뽑은 비밀 조사관이었다. ‘암행’이란 몰래 다닌다는 뜻이고, ‘어사’는 임금의 심부름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암행어사가 한 일은 지방 관리 감시, 민심 파악, 비리 조사, 세금 확인, 군사 시설 점검, 긴급 상황 해결 등의 일을 수행했다. 또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나라에 중요한 정보들을 모으기도 했다.
암행어사는 신분증으로 마패를 가지고 다녔다. 말 모양으로 생긴 나무 조각인데 여기에 임금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따라서 마패를 보여주면 누구나 암행어사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마패는 처음에는 나무였다가 나중에 청동으로 바뀌었다. 마패는 말의 수에 따라 등급이 달라졌는데 보통 2마리부터 10마리까지 다양했다.
우리나라에서 암행어사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은 명종 5년인 1555년이다. 암행어사는 이후 350여 년간 600여 명이 임명되었다.
암행어사는 당하관(3급 이하) 관리 중 왕이 추생(抽牲, 임의로 추첨)하여 임명했지만, 당상관(고위공무원)을 암행어사로 임명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 제도는 1892년(고종 29) 전라도 암행어사인 이면상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암행어사는 봉서(封書, 밀봉된 문서)와 사목(事目, 임무목록), 마패(馬牌, 역마를 갈아탈 수 있는 패)와 유척(鍮尺, 놋쇠로 만든 자)을 받았다.
이 물품들은 한 개의 상자에 담긴 채로 왕이 비밀리에 직접 주거나 관리를 통해 자택으로 전달하였고, 선발된 암행어사는 봉서를 받는 즉시 출발했다.
밀봉된 표지에는 도남대문외개탁(到南大門外開坼, 남대문 밖에 도달하면 열어볼 것). 또는 도동대문외개탁(到東大門外開坼, 동대문 밖에 도달하면 열어볼 것)이라고 써서 내용은 한성 밖에서만 열어볼 수 있었다.
정조는 전국의 관리들이 백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지 알고 싶어 정약용을 암행어사로 보냈다. 정약용은 전국을 다니며 백성들의 비참함을 보고 슬픈 나머지 시를 지었다.
놋수저는 벼슬아치가 가져가고
무쇠솥은 양반이 빼앗아갔네
아 이런 집이 천지인데
궁궐은 너무 멀어 알지도 못하네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였던 퇴계 이황도 암행어사였다. 이황은 34세 때 대과에 급제한 후, 대제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다.
특히 40대 초반에는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충청도에 파견되었다. 이황은 충청도를 돌면서 탐관오리의 횡포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했다.
이황은 평생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베옷에 칡으로 엮은 신을 신고 다녔고, 높은 관직에 있을 때도 집에 재물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만큼 검소한 청백리였다.
그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기본을 세운 학자로 유명하다.
조선 최고의 명필인 추사 김정희는 세 살 때 붓을 잡고 글씨 쓰는 흉내를 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문신이자 실학자였고 글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리는 서화가였다.
김정희는 자신만의 개성을 살린 글씨체 ‘추사체’를 만들었다.
김정희는 충청도 암행어사를 지냈는데, 백성들이 과도한 세금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이를 바로 잡아서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박문수(1691~1756)의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박항한(朴恒漢)의 아들로 증조부는 현종 대에 이조판서를 지낸 박장원(朴長遠)이다.
어려서 전염병으로 어머니를 여의고 6살 때부터 아버지께 글을 배웠다. 그러나 아버지도 9살 때 세상을 뜨고 외가 쪽에 의지하여 자랐다.
외숙부 이태좌는 소론의 중심인물로 좌의정까지 올랐다. 어려서부터 외가에서 글을 배운 박문수 역시 정치 노선이 소론으로 기울었다.
1723년(경종 3년) 33세에 증광 문과 병과(丙科) 16위로 급제해 사관(史官)이 되었다. 전체 합격자 41명 중 26위를 했다고 한다.
그가 급제한 시문은 ‘낙조(落照)’다.
지는 해 푸른 산에 걸려
붉은 해를 토하고
찬 하늘에 까마귀가
흰 구름 사이로 사라진다
나루를 묻는 길손
채찍질 급하고
절 찾아가는 스님의
지팡이도 바쁘다
뒷동산 풀어놓은 소
그림자 길기만 하고
망부대 위로 아낙네 쪽(머리)
그림자 나지막하다
오래되어 예스런 고목들이
줄지어 선 남쪽 냇길에
짧은 머리 초동이
피리 불며 돌아온다.
관직 생활 초반기인 이때 박문수는 당시 왕세제 연잉군(후일의 영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집권한 소론과 연잉군은 서로 긴장 관계에 있었다.
소론은 경종이 세자였던 시절부터 경종을 지지하였고,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였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자 노론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봉하고 대리청정을 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나, 소론 강경파가 이를 역모라 비판하여 노론이 실각하고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성격이 온유한 경종은 이복동생 연잉군을 보호하려 하였으나, 정치적 지지기반이 없는 연잉군은 위기에 봉착했다.
바로 이즈음 소론계 박문수가 1724년(경종 4년)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의 관원으로 임명되어 왕세제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영조는 박문수를 가장 총애하게 되었다.
1724년(경종 4년)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으나 노론이 집권하자 삭직 당했다. 이어 1727년(영조 3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득세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어 영조의 명으로 영남 어사로 나가 부정 관리들을 적발했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 때는 당시 병조판서였던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해 반란군 진압에 전공을 세웠고 난을 진압한 후에도 홀로 마을에 남아서 민심을 수습하는데 앞장섰다.
이 공으로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었다.
1730년(영조 6년) 호서어사(湖西御史)로 기민(飢民) 구제에 힘썼으며 1734년(영조 10년)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는 과거 성적은 그리 우수하지 않았으나 급제 후 병조판서까지 오르는데 15년이 걸려 비교적 빠른 진급을 한 셈이다.
1738년(영조 14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안동서원(安東書院)을 철폐시킨 일로 인해 탄핵을 받아 풍덕부사(豊德府使)로 좌천되었다.
1741년(영조 17년)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이어 함경도 진휼사(賑恤使)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가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당시 이 일은 사전에 보고하지 않아 불법이었으나 그는 “내가 처벌받는 것은 작은 일이나 백성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큰 일에 속한다”라고 말했다.
박문수가 호조판서로 있을 때 한 번은 어영대장(노론)에게 어영청에서 꿔간 군량미를 갚으라고 독촉한 적이 있었는데 어영대장이 나름의 논리로 반박하여 임금 앞에서 싸웠다. 그러나 이때도 영조는 박문수의 편을 들었다.
1752년(영조 28년) 왕세손(王世孫)이 죽자 약방제조(藥房提調)였던 박문수는 추궁당해 제주(濟州)에 안치되었다가 1753년(영조 29년) 풀려나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1755년(영조 31년) 소론이 주도한 나주괘서 사건에 휘말려 옥사를 치렀는데 영조는 직접 박문수를 불러 여전한 신임을 보여주었다.
박문수는 스스로 죄인을 자처한 후 세수와 빗질도 하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살다가 이듬해인 1756년(영조 32년) 4월 세상을 떠났다.
그가 지금까지 칭송받는 점은 양반도 군포를 내라고 주장하는 등 백성의 편에서 입바른 말을 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아생전 정승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가 죽자 영조는 박문수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내렸다.
실록에 실린 박문수의 졸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졸(卒)하였다.
박문수는 춘방(春坊)에 있을 때부터 이미 임금이 알아줌을 받았으며, 무신년 역변(逆變) 때에 조현명(趙顯命)과 더불어 함께 원수(元帥)의 막부(幕府)를 도와 개가를 아뢰고 돌아오니 임금의 권우(眷遇)가 날로 융숭하여 벼슬이 숭품(崇品)에까지 이르렀다. 나랏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해이하지 아니하여 병조·호조 양부(兩府)에서 이정(釐正)하고 개혁한 것이 많았으며, 누차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사졸의 환심을 얻었다. 그러나 연석(筵席)에서 때때로 간혹 골계(滑稽)를 하여 거칠고 조잡(粗雜)한 병통이 있었다. 또 이광좌(李光佐)를 사표(師表)로 삼아 지론(持論)이 시종일관 변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때문에 끝내 정승에 제배되지 못하였다. 그가 졸함에 미쳐 임금이 슬퍼하여 마지않았다. <영조실록 87권, 영조 32년 4월 24일 신유 1번째 기사>
영조는 박문수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영성(박문수)이 춘방(세자궁)에 있을 때부터 나를 섬긴 것이 이제 이미 33년이다. 자고로 군신(君臣) 중에 비록 제우(際遇)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 나의 영성과 같음이 있으랴?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영성이며, 영성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그리고 그가 언제나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깊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영조실록> 영조 32년(1756년) 4월 24일.
글을 마치며
이 글을 쓰면서 그가 진짜 암행어사였던 관찰사였던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는 진심으로 백성들을 염려했고 자신이 벼슬을 날릴 위기에서도 올바른 행동으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이런 관리, 이런 지도자가 꼭 필요한 요즈음이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