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작가 <객주>
문경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에 도착하기 전 중요한 장소인 조령원터를 소개하지 않았다. 이번 호에 보부상 이야기를 함께 엮어서 하기 위해 조령원터를 조금 미루었기 때문이다.
길 위의 사람들에게 역과 원은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역은 관리들의 여행길에 편의를 제공하고 도로를 관리하던 곳이고 원은 역의 보조시설로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보통 우리가 길을 갈 때 ‘한참 가야 한다’라는 말을 한다. 여기서 한참이 바로 역참에서 나온 말이다. 역참에서 다음 역참까지 거리가 제법 멀었기에 한참은 곧 멀다는 뜻이다.
문경새재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었으나 매우 험한 고개였다. 때로는 도적을 만나 괴나리봇짐을 빼앗기고 과거도 보지 못한 채 되돌아가는 선비들도 있었다.
새재 옛길은 특히 도둑떼가 많았다. 이들은 지나가는 길손들을 가로막고 통행료를 요구했다. 어리바리 대처하다가는 가진 것을 다 빼앗기는 것은 물론 몽둥이로 맞기도 했다.
그래서 고갯길 아래 주막에서는 먼저 당도한 길손이 다른 길손을 기다렸다. 모여든 사람이 20여 명이 되면 함께 고갯길을 넘었다. 그래야 도적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조령원터는 새재를 넘는 말과 사람들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또 관료들은 특산품을 이곳에 모았다가 중앙으로 보내는 역할까지 했으니 일종의 물류창고이기도 했다.
영남대로에는 이런 역이 30여 개, 원이 165개소 정도 운영되었다. 그중 문경시 점촌의 유곡역은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원이나 역 근처에는 주막이 있었다. 길 떠난 선비들과 보부상들이 국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하룻밤 잠을 청하는 곳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길 위에서 쉼을 얻고 새롭게 충전하여 다시 길을 떠났다.
오늘은 길 위에서 펼쳐진 또 다른 삶의 기록, <객주>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사실 김주영 작가를 논하기 위해서는 그의 고향 청송 일대를 방문해야 한다. 그곳에 그의 문학관인 ‘객주 문학관’과 '객주 문학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객주>는 조선 후기 유랑하는 보부상의 삶과 정서를 민중적 시각으로 생동감 있게 그려낸 10권짜리 대작이다. 특히 이 작품은 민중들의 시각으로 민중 중심의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내가 문학을 공부하던 20대 시절, 당시는 유난히 대하소설이 인기였다. 70년대 박경리의 <토지>, 황석영의 <장길산>을 필두로 김주영의 <객주>, 문순태의 <타오르는 강>, 조정래의 <태백산맥>, 송기숙의 <녹두장군>, 이병주의 <지리산>, 최명희의 <혼불> 등이 쏟아져 나왔다.
다른 소설보다 대하소설을 읽고 났을 때의 그 뿌듯함이란,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그 맛을 알 것이다.
그중에서 <객주>는 시골 장터와 저잣거리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장사꾼들의 살아 있는 언어를 생동감 있게 그려낸 것이 화제였다. 상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걸쭉한 입담과 토속어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소설이었다.
서민들의 애환을 다룬 <객주>는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등 기업인들이 읽고 감명받은 책으로도 알려져 있다.
옛날에도 산불은 많이 났었는지 조곡관 근처에는 ‘산불됴심’이란 글씨가 커다란 돌에 새겨져 있었다. 한글로 새겨진 이 비석은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산길을 걷는 길손들에게 산불에 대한 위험을 일깨우기 위한 비석이 그 당시에도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계곡에는 아주 넓은 너럭바위가 있는데 이곳은 태조 왕건을 촬영할 때 궁예가 마지막 생을 마친 장소였다. 안내판이 있어 사진을 찍었다.
조금 걷다 보니 멋진 소나무가 나타났다. 그 옆에 정자도 하나 보였다. 교귀정(交龜亭)이었다.
조선시대 신임감사의 인수인계는 도 경계 지점에서 실시했는데 이 지점을 교귀(交龜)라 한다. 이곳은 새로 부임하는 경상감사가 전임감사로부터 업무와 관인(官印)을 인수인계받던 교인처(交印處)다.
교귀정은 1470년(성종 초) 경 건립되어 사용되다가 1896년 의병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6월 복원하였다. 건물의 양식은 팔작지붕에 이익공(二翼工),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년 가을 문경문화제 때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사를 이곳에서 하고 있다. 교귀정은 복원된 정자지만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교인처다. 주흘관과 조곡관의 중간 지점에 있다.
교귀정 정자보다 휘어진 채로 자란 멋들어진 소나무가 더 눈길을 끌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제3관으로 향했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제법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대부분 관광객이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책바위를 보기 위해 일부러 옛길로 들어섰다. 잘 닦여진 길이 신작로라면 옛길은 좁고 울퉁불통해서 걷기 힘들었다. 그러나 진짜 옛길을 걷는다는 느낌이 들었고 주변 경치와 어우러져 운치가 있었다.
500m쯤 올라가자 돌을 얹어 쌓은 책바위가 보였다. 이 거대한 돌탑은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기원하며 돌을 하나씩 쌓아 올려 만들었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는 일부러 이 길을 택해 책바위 앞에서 장원급제를 소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책바위를 찾아 돌을 쌓으며 합격을 기원하는 풍습이 계속되고 있다.
드디어 옛길을 빠져나와 다시 큰길로 접어들었다. 한결 걷기가 수월했다.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문경새재의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에 도착했다. ‘조령(鳥嶺)’이라는 이름은 새들이 날아다니는 고개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세 개의 관문 중 가장 높은 곳(해발 약 642m)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을 지나면 충청도 땅이다.
조령관은 조선 후기까지 중요한 국방 요충지로 사용되었고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구조는 돌로 쌓은 성벽과 함께 성문이 있는 전형적인 방어시설로, 비교적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다.
제3관문 조령관 근처에는 왕소나무 마을이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경북 문경군 문경면 상초리로 그 지역 전체가 경북도립공원에 편입되어 현재 인가는 없다. 이 마을은 과거 ‘상푸실 마을’이라 불렸다.
<객주>의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인 조성준은 경기도 광주 송파장의 으뜸가는 쇠살쭈(장터에서 소를 사고팔 때 흥정을 붙이는 거간꾼)다. 그는 바로 이 ‘상푸실 마을’에서 도망친 아내와 정부를 붙잡아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고 성기를 베어버린다. 1권 시작부터 내용이 너무 파격적이고 섬칫했다.
조금 더 올라가 괴산 땅을 밟아본 후 왔던 길을 다시 하산했다. 내려올 때는 힘들어서 2관 앞에서 주차장까지 운행하는 전동차를 탔다.
원래 진짜 트래킹을 하려면 우리가 올라갔던 문경새재 경로가 아닌 괴산 쪽에서 올라와 새재 주차장까지 내려가는 반대의 길을 택해야 한다. 그러면 걷기가 훨씬 수월하다.
소설 <객주>에서 천봉삼과 그의 동료들은 문경새재를 함께 넘어간다. <객주>는 조선 말기 보부상의 삶을 조명한 작품으로, 주인공이 전국을 떠돌며 장사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문경새재는 경상도의 시작이자 조선시대 보부상들이 드나들었던 교역의 관문입니다. 소설 ‘객주’도 여기에서 출발하지요.”
김주영은 장돌뱅이 이야기를 연재하기 위해 스스로 장돌뱅이가 됐다. <객주> 연재를 시작하기 전 5년 동안 전국 200여 개 시골 장터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연재 기간에는 한 달에 이십일 이상 장터를 찾아다니며 현장에서 글을 썼다고 한다.
옛 보부상과 상인들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장 상인들과 먹고 자고 이야기하며 떠돌았다. 그렇게 전국을 유랑하며 여관이나 여인숙에서 원고를 써서 서울신문 지국에 보냈다. 그런 생활이 연재하는 5년 내내 이어졌다.
“조선시대 서울 사대문 안에서 장사를 할 수 없었던 보부상들이 전국을 다니면서 겪었던 애환을 체험하기 위해 그들의 행로를 철저하게 답사했어요. 그들이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었는지, 그리고 등짐을 메고 걸으면서 언제 쉬었는지도 생각하면서 걸었죠. 객주가 출간된 후 조선시대 상업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찾아와 내 소설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할 때 보람이 크더군요. 밥도 많이 얻어먹었지요.”
<객주>는 1979년 6월 1일 서울신문에 연재를 시작해 1983년 2월까지 4년 9개월 동안 1465회를 이어갔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은 꼭 발행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그래도 때로는 중압감을 느낀다. 그런데 신문에 연재하는 글은 늦으면 안 되니 작업을 하는 내내 피가 말랐을 것이다.
신문에 연재를 잘하는 사람은 그만큼 성실하다고 한다. 물론 연재를 펑크낼 정도의 배짱이 있는 작가들도 있기는 했다.
<객주>는 소설이 쓰이면서 한 권이 끝날 때마다 책으로 발간되어 1984년까지 창작과 비평사에서 9권으로 출간하였고 2013년 마지막 1권이 더해져 10권으로 문학동네에서 완간되었다. <객주>는 지금까지 10만 질 이상 판매되었다.
“보부상들은 가장 낮은 신분으로 가장 높은 곳을 넘나들며 가장 낮은 곳에서 잠든 사람들이다. 소설 <객주>는 천민들의 애끓는 삶을 기록한 그들의 자서전이며 옛날이야기책이며 박물지이고, 지리지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책을 쓸 때 따로 주인공을 두지 않겠다고 밝혔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개념이다.
<객주>의 첫 문장은 문경새재 주흘산 계곡을 적시는 새벽안개를 묘사했다.
샛바람 사이를 긋던 빗방울이 멎자 금방 교교한 달빛이 계곡의 억새밭으로 쏟아져 내렸다. 계곡에 널린 돌과 바위들이 차갑게 빛났다.
작가는 소설의 도입부를 쓰기 위해 배경이 된 문경새재를 10번 이상 답사했다고 밝혔다.
산길을 따라 천봉삼과 동료들이 걸어간다. 가을바람이 솔잎 사이를 스쳐 지나가고, 먼 곳에서 짐을 싣고 오르는 다른 보부상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놈의 새재는 넘을 때마다 이렇게 힘든지 원….”
“그래도 이 길을 넘어야 돈이 되지 않겠소? 문경새재를 넘으면 한양까지는 탄탄대로라오.”
“그건 그렇지만, 매번 이렇게 짐을 이고 지고 넘어가려니 허리가 휘겠구먼.”
천봉삼은 멈춰서 뒤를 돌아본다. 산 아래로 펼쳐진 길에는 장사꾼들, 유생들, 그리고 관리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안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문경새재를 넘는다는 것이 단순히 고갯길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기회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임을 알고 있었다.
“자,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조령관이다. 거기서 잠시 쉬었다가 가세.”
“조령관이면 새재의 마지막 관문 아니오? 거기만 넘으면 이제 평탄한 길인데!”
“어허, 그러니 힘내서 가세!”
그들은 짐을 단단히 묶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문경새재를 넘으면 새로운 시장이 기다리고 있고, 새로운 거래가 성사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부상들이 넘던 문경새재 옛길은 신라시대부터 있었다. 보부상들은 삼삼오오 모여 문경새재를 넘었다. 그들이 넘던 옛길에는 보부상들의 숱한 애환이 서려있다.
작가는 보부상들이 길 위에서 펼치는 의리, 배신, 복수, 치정 등을 그려내 대하소설을 만들어냈다.
<객주>를 쓰기 위해 작가가 돌아보지 않은 전국의 장터는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두 발로 곳곳을 누비며 많은 사람을 취재했다. 그래서 그는 ‘길 위의 작가’라고 불린다.
“제가 그 소설을 연재할 때 원고료를 많이 받았는데요. 전국을 돌아다니느라 그걸 거의 다 썼습니다”
다음은 그가 여러 언론과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30여 년 전 신문사와 장편소설을 연재하기로 합의한 이후 나는 무척 초조해졌다. 제목을 <객주>로 하겠다는 결정까지 이르렀으나, 정작 고민하고 있었던 것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걱정거리란 바로 소설의 출발점을 어느 곳으로 잡아야 할 것인지였다.”
“기차와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면서 이곳저곳을 무작정 헤집고 다녔다. 그 시절 나는 헤적헤적 걸어 다녀야만 머릿속에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 그 이전까지 전국의 장터풍경을 섭렵한 터이지만, 다시 장터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한 달 정도를 정처 없이 그렇게 헤매 다니던 끝에 한 가지 상념이 떠올랐다. 소설의 주제가 되는 보부상들의 기구한 생애는 태어나서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모두가 길 위에서 떠날 수 없는 운명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문경새재 옛길을 걸어서 넘고 있었다. 제1관문인 주흘관과 제2관문인 조곡관을 지나 제3관문인 조령관까지 얼추 7㎞에 가까운 길을 이틀에 걸쳐 문경 땅과 괴산 땅을 번갈아 넘어갔다 넘어오는 것을 숙맥처럼 반복하였다.”
이렇게 고민하던 그는 문경새재를 배경으로 <객주> 1권을 시작했다.
김주영은 조선 후기 보부상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철저한 자료 조사와 현장 탐방을 병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방대한 역사적, 언어적, 문화적 연구를 함께 정리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보부상이라는 계층이 남긴 기록이 거의 없다는 현실이었다.
“객주의 주인공들이 이른바 천민에 속하는 ‘장돌뱅이’들인데 그들의 입에서 고고한 단어들이 나온다면 어울리겠어요? 소설의 사실성(reality)을 살리기 위해서는 장돌뱅이 말을 찾아야 했지요. 너무 힘들어 마흔 나이에 몇 번이나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부지런히 장터를 다니면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기록하고 사전을 찾아서 주인공들의 입으로 되살려냈어요.”
그는 전국의 장터를 직접 찾아다니며 철저한 현장 조사부터 시작했다. 과거 보부상들이 활동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장터의 구조, 거래 방식, 상인들의 생활 등을 살폈다. 또 조선 후기 상업 활동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찾기 위해 도서관과 고문헌을 읽었다.
조선시대 보부상들은 천민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들의 역사를 숨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증조부나 조부가 보부상이었다는 보부상 출신 가문을 찾게 되면 일단 찾아가서 정중하게 사정을 설명하고 자료를 요청했다.
그러나 많은 후손이 조상이 천민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꺼려하며 협조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가문에서는 과거 보부상과 관련된 기록을 없애버리기도 해 자료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무엇보다 당시의 생생한 언어를 재현하기 위해 조선 후기의 옛말과 생활 속 표현을 찾아내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어떤 날은 국어사전을 밤새 뒤져 겨우 한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내기도 했다.
가령 조선시대의 욕설인 ‘천좍할 놈’이 있는데 이 뜻이 ‘천주학을 할 놈’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구들막농사’는 자식은 방구들 위에서 만든다는 우스갯소리에서 유래된 말이다.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역사소설만 200여 권을 읽었다. 독자나 전문가가 소설을 읽으면서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역사적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문학적 상상력을 적극 활용했다.
그는 “이 소설은 어느 역사소설보다 상상력이 많이 들어가 있다”라고 언급했다.
“걷고 또 걸어도 문득 고개를 들면 그런 길바닥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였다.”
<객주> 10권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작가의 고백이기도 하다.
이러한 작가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객주>라는 훌륭한 소설을 만날 수 있었다. 오늘날 <객주>는 단순한 소설이 아닌, 한국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김주영은 경상북도 청송군 월전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가 살던 지역은 청송에서도 오지였다. 그는 문을 열면 바로 시장인 곳에서 살았다.
그는 늘 시장에서 상인들이 물건을 파는 것을 보고 자랐다. 때로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움도 불사했다. 이런 장면들은 그의 <객주>에 고스란히 담겼는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그에게는 딱 맞는 사례였다.
평소 먹을 것이 없어 술지게미(술을 빚고 남은 찌꺼기)를 먹으며 허기를 달랬던 그는 이 때문에 술 냄새가 나서 학교에 가면 선생님께 혼나기 일쑤였다.
그는 너무 배가 고파서 수돗가를 자주 찾았다. 물이라도 배불리 먹기 위해서였다. 책을 살 돈은 당연히 없었고 창호지를 묶어 노트를 만들어 공부했다. 심지어 교과서까지 빌려서 봐야 할 정도였다.
가난에 대한 그의 에피소드는 부지기수다.
“초등학교 때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는데 크레파스가 어딨습니까. 다른 아이들이 안 쓰는 색을 빌리려니까 흰색밖에 없어요. 흰색으로 칠했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내 귀를 잡아당겨 창문으로 끌고 가서 ‘바깥을 봐라. 저게 흰색이냐?’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소풍을 갔는데 도시락을 싸 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엄마에게 도시락을 싸달라고 졸랐습니다. 엄마가 뚜껑 있는 밥주발에다 잡곡과 고구마를 싸서 노끈으로 묶어줬어요. 소풍 가서 놀이하고 도시락을 먹으려니까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애들이 내 도시락을 축구공처럼 차다가 모래밭에 처박아버렸어요. 그걸 주워서 고구마를 물에 씻어 바위 뒤에 숨어 울면서 먹었습니다. 너무 슬펐지요.”
“저에게 유일한 재미는 장날이었어요. 장터 구경하느라 학교를 안 갔습니다. 처음에 배가 아파서 못 갔다고 선생님께 거짓말했습니다. 5일마다 배가 아프다고 빠졌습니다. 선생님이 계속 속겠습니까?”
“어릴 때 우산이 없어 늘 비를 맞고 다녔고 가방이 없어 보자기에 책을 싸서 등에 메고 다녔지요. 그게 한이 돼서 디자인 좋은 우산이나 가방만 보면 필요 없어도 사고 마는 버릇이 생겼어요. 그렇게 수집한 우산과 가방이 60개가 넘어요.”
친구도 많지 않아 책이 유일한 친구였고, 간혹 돈이 생기면 책을 사기 위해 80리(약 32km)를 걸어 안동까지 다녀왔다. 그는 책을 읽으면서 걸었는데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새로 산 책을 다 읽을 정도로 독서광이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가난은 그의 문학적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장터의 활기, 서민들의 삶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이야기들로 쓰였다.
김주영 작가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살았다.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결국 어머니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재혼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작가는 큰 상처를 받았다.
그는 어머니와 40대가 될 때까지 거의 연락하지 않고 지냈다. 시간이 흐르고 자신의 창작 원동력이 결국 어린 시절과 어머니의 영향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고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보내며 관계를 회복했다. 이러한 애증 관계는 <잘 가요 엄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처음부터 소설을 쓰지 않았다. 20대부터 30대까지 16년 동안 ‘엽연초 조합’의 경리 직원으로 근무했다.
25살, 안동에서 경리를 하던 시절 새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슬픔에 꽤 오랜 시간을 방황했다. 술을 너무 마셔 장 파열이 왔으나 병원에 가지 않았고 죽어도 좋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자기 학대를 했다.
힘든 가족사에 부정부패가 심한 회사 생활은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내가 나를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이 세상엔 나를 거둬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직장을 더는 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나온 그는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대학 1학년 때 스승인 박목월 시인에게 자신의 시 10편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스승은 "자네는 운문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운문이 아니라면 소설밖에 없었다.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
“먹고 살길이 막막했지만, 그래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결국 그는 31세에 단편소설 ‘휴면기’로 등단하면서 작가의 길을 걸었다.
사실 10권이나 되는 <객주>의 줄거리를 요약한다는 것 자체가 별 의미 없는 일이기는 하다.
그의 책은 줄거리보다 주인공들의 대사와 심리묘사 등 문장에서 얻을 수 있는 재미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천봉삼은 평안도 의주에서 활동하는 거상(巨商) 박주성이 운영하는 대천무역소 일꾼이었다.
상업계의 부정과 음모로 인해 박주성이 몰락하자 천봉삼은 장사를 시작한다. 그는 보부상으로 전국을 떠돌며 점차 사업을 확장해 나간다.
천봉삼은 보부상의 생활을 몸소 체험한다. 이 과정에서 상인들의 규율, 장터의 거래 방식, 금난전권(금지된 상업 활동)과 같은 당시 상업 구조를 배우며 성장한다. 또 장사꾼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교활한 상술과 협상을 익힌다.
그는 의협심 강한 보부상들, 탐욕스러운 상인들, 비열한 권력자들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며 현실의 냉혹함을 깨닫는다.
천봉삼은 장사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수많은 갈등을 겪는다. 난전(불법 상업) 상인들, 사상(私商)들과의 대립 속에서 목숨을 위협받기도 한다.
여인과의 사랑과 배신도 반복된다. 한때 사랑했던 여인에게 배신당하고 감정적으로도 큰 변화를 겪는다. 그는 점점 냉혹한 장사꾼으로 변해간다.
천봉삼은 뛰어난 장사 수완을 발휘하며 큰 성공을 거두지만, 부패한 관리들과 유력 상인들의 모략에 의해 위기에 처한다. 기존 상업 세력과의 대립이 심화되며, 보부상 사회 내에서 음모와 배신이 끊이지 않는다.
천봉삼은 결국 장사판에서 밀려나고 몰락힌디.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장사에 나서며 스스로 재기하려 한다.
소설 후반부에서는 조선 후기 상업의 변화와 함께 개항 이후 외세(특히 일본 상인들)의 경제적 침략, 전통 보부상들의 몰락, 새로운 상업 구조로의 변화 등을 보여주며 이야기의 막을 내린다.
김주영(金周榮, 1939년 1월 26일~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에서 출생하였으며 서라벌예대를 졸업했다.
1971년 <월간문학>에 ‘휴면기’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요 작품에 <객주>(10권), <홍어>,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머저리에게 축배를>, <도둑 견습>, <천둥소리>, <활빈도>(6권), <화척>(4권), <붉은 노을>, <겨울새> 등이 있다.
주요 작품 중의 하나인 <객주>는 1983년(MBC 드라마)과 2015년에 KBS 2 TV에서 드라마화됐으며 만화가 이두호에 의해 만화로도 그려졌다.
김주영 작가는 장편소설, 대하소설, 단편소설, 동화 등 다양한 장르를 집필했다. 현재까지 약 40권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객주>(1981~1983) - 총 10권
<활빈도>(1991~1993) - 총 6권
<화척>(2000~2003) - 총 4권
<천둥소리>, <멸치>, <홍어>, <잘 가요 엄마>, <빈집>, <뜻밖의 生>, <광덕산 딱새 죽이기>
<아라리 난장>,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지리산 사람들>
<객주> → KBS 드라마 <장사의 신> (2015~2016)
<객주> → MBC 드라마 <객주> (2001)
<객주> - 조선 후기 경제사 연구 및 국어 교과서 수록
<활빈도> - 조선 후기 의적 활동 연구 자료
<천둥소리> - 한국 근현대사 관련 문학 연구
<객주> - 연극 및 무대극으로 공연
2013 제4회 김만중문학상 대상
2007 은관문화훈장(2등급)
2007 제1회 가천환경문학상 소설부문
2002 제5회 김동리문학상
2000 제2회 무영문학상
1998 대산문학상
1996 이산문학상
1993 대한민국문학상
1984 유주현문학상
1982 한국소설문학상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