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린손 Oct 29. 2022

기억을 걸어두다

바람머리 노신사, 백기완 선생과의 짧은 만남

환자는 오죽할까만은 대학병원에 부모님을 모시고 가서 접수하고 대기하고 진료하고 계산하고, 처방전을 받아 큰 병원을 가로질러 약국에서 약을 타고 부모님을 서울역까지 모셔다 드리는 일은 정말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지병을 앓고 있어서 매달 정기검사를 위해 어머니와 함께 서울을 오가셨다.


한 날은 꾀가나서 부모님을 서울역까지 모셔다 드리는 대신에 택시를 태워드리는 것으로 긴 병원 일정을 마쳤다. 그날 역시 진이 빠져 잠시 쉴 생각으로 약국 건물 2층에 있는 ‘학림’이라는 커피숍에 올랐다. 한국 현대사에 나오는 학림사건의 그 학림다방이다. 어쩌다 한번 들르게 되는 세련된 ‘다방’ 같은 그곳은 벽, 테이블, 의자에 오랫동안 진한 커피 향이 배어든 것 같은 곳이다.


지금쯤 서울역에 도착하셨겠네, 열차가 바로 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서울역까지 모셔다 드릴걸 그랬나… 걱정과 미안함이 머릿속에 뒤죽박죽 하는 찰나 커피숍 문이 열리고 하얀 한복을 입고 흰머리를 한 노인이 한분 성큼 들어섰다. 한눈에 아우라가 느껴지고 바람을 몰고 온 듯한 그분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백기완 선생이다.


연예인을 보면 그렇게 설레었을까. 그렇다고 내가 그분을 평소존경하거나 그분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항상 한복저고리 차림에 바람이 없어도 바람에 날리는듯한 머리에 카랑카랑한 쇠목소리를 가진, 평생 통일운동을 하신 분’이라는 정도였다. 난데없는 설렘은 그분의 온몸에서 배어 나오는 기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구를 기다리시는 것 같지는 않았고 마치 내 집 사랑채에 온 것처럼 조용히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계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학림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은 그분의 일상이었다고 한다. 나는 펼쳐놓은 책은 읽는 둥 마는 둥 하며 나의 눈은 줄곧 자석에 이끌리듯 그분을 향해있었다. 그분은 그곳의 일부 같았다.

갈 시간이 되어 일어나면서 문득 커피값을 대신 내고 싶어 졌다. 사실 그건 핑계에 가까웠고 그 보다 그분의 목소리를 한 번 들어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커피값을 제가 계산하고 가도 될까요?' 큰 용기를 내어 여쭈었는데 당신의 커피값을 내는 사람이 따로 있다 하시며 대뜸 자리를 권하셨다. 그분의 안광은 무엇이든 꿰뚫을 수 있을 것처럼 강한 동시에 무엇이든 품어줄 수 있을 듯 부드러웠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 어디서 만났는가?'

'아닙니다. 초면이고 선생님의 아우라에 반해서 차 한잔이라도 대접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마운 사람이네, 맑은 영혼이야' 이마의 깊은 주름이 살짝 펴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몇 마디 말씀을 더 하셨는데 아쉽게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가슴에 박힌 한마디는 아직 그분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다.

'가을 하늘에 쪽빛처럼 살아야 하네'


일어나는 게 못내 아쉬워 다시 큰 용기를 내어 싸인을 부탁드렸다. 흔쾌히 승낙하시고 따로 종이가 없던 터라 읽던 책의 맨 뒷장 빈 페이지에 짧고 힘 있는 글을 남겨주셨다.

그로부터 두어해가 지나고 우연히 텔레비전에 그분의 모습이 보였다. 보행보조기를 짚고 계셨고 부쩍 노쇠한 모습에 마음이 쓰였다. 드센 바람 같았던 머리도 한층 잦아든 것처럼 보였다.

문득 그분이 써 주신 글귀가 떠올랐다. 그 글귀가 있는 책을 찾는데 한참이 걸렸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작은 문고판 책의 맨뒤 페이지였다는 것뿐이어서 집에 있는 작을 책을 다 뒤져 찾아냈다.

대학시절에 읽던 책이니 족히 20년은 된 책이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 힘찬 글씨가 징처럼 박혀 있었다. 그분의 쇠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꼭 액자를 만들어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두 해가 흐르고 추운 겨울 아침, 라디오에서 그분의 부고가 들려왔다. 잘 아는 분이 가신 것처럼 묵직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다시 책장으로 가 싸인이 담긴 책을 찾았다. 이번에도 바로 찾지는 못했지만 처음처럼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원래 누런 종이가 부쩍 더 빛이 바랜 느낌이지만 징처럼 박힌 글씨는 여전했다. 이제 정말 액자를 만들어야겠다. 바랠 대로 바랜 종이의 바램이 조금은 더뎌지고 짧지만 인상 깊었던 기억도 조금은 덜 퇴색될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결이 곧은 백참나무를 써서 한복 입은 그분의 모습처럼 단단하고 단정하게 만들어야겠다. 응어리처럼 맺힌 선명한 옹이가 하나 박혀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나무 목'木'은 중국어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