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지급 명령은 처음이지?
1. 사건 발생
[기록 01] 3월 초, 황금 같은 공강 시간
말도 안 되는 사연을 듣노라면, 똑똑한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나라면 그렇게 안 했을 거야!’
2년 전, 3월. 나도 내가 그런 사람 중 하나, 좀 똘똘한 줄 알았다.
동료 교사에게 백만 원을 빌려 주기 전에는.
겨울은 늘 지난 사건을 돌아보게 만든다.
당시에는 이 일이 몇 번의 겨울을 지나도록 나를 따라올 줄 몰랐다.
그 후 자신이 현명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왜 쉽게 사기를 당하는지 알게 되었다.
2. 최초 진술
[기록 02] 돈 빌려달라는 말은 항상 갑자기 온다
"선생님, 돈 좀 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정신없는 3월 초. 새 학교에 와서 황금 같은 오전 공강 시간이었다.
갑자기 5학년 1반 선생님이 영어실에 올라왔다.
"잠깐 시간 되세요?"
몇 번 말도 나눠보지 않은 남자 선생님이, 나밖에 없는 5층 영어실에 찾아온 것이다.
덜컥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선생님께 우선 앉으시라고 했다.
그분은 한숨을 한참 쉬더니 울먹거리며 본인 어머니 입원 소식을 전했다.
"머리를 다치셨는데 수술비가 부족해서요... 내일모레가 월급날이니 진짜 바로 드릴 수 있습니다."
3. 의심 단계
[기록 03] 삐용삐용, 경고등
머릿속에는 삐용삐용 빨간 불이 요란하게 울렸다. 인간은 감을 믿어야 한다.
하지만 ‘얼마나 급하면 서로 민망하게 여기까지 왔을까...’ 거절을 못하는 호구의 본능이 더 힘이 셌다.
교사라는 직업은, 거절보다 이해를 먼저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그는 나를 고른 게 아니라, ‘거절하지 않을 사람’을 정확히 찾았다.
선의는 그에게 신뢰가 아니라 표식이었을 것이다.
뒤는 뻔한 전개였다.
그분이 온 학교를 돌아다니며 돈을 빌리러 다녔다는 다수의 증언이 모였다. 돈을 빌린 사연이 제 각각이고,
전에도 여러 번 빌렸다는 것에서 이미 사기의 전형이었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교감선생님이 직접 나섰고, 나를 따로 교무실로 부르셨다.
"혹시 000 선생님께 돈 빌려 주셨나요?" 세상 모자란 것을 보는 듯한 표정에 울컥했다.
4. 피해 확정
[기록 04] 피해자 7명, 총액 360만 원
피해자는 총 일곱 명이었다. 거기에는 교장선생님까지 포함됐다는 게 웃을 수도 없는 위로 포인트였다.
교장선생님은 그냥 안 받을 생각으로 주셨다고 해서, 받을 생각으로 한껏 열받은 피해자들이 모였다.
남자 선생님 네 분. 옆반인 2반 선생님과 나만 여교사였다. 조금씩 달랐던 피해액은 다 합하여 총 360만 원. 액수와 상관없이 모두 똑같이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동료끼리 이럴 수가 있는가? 그것도 교사가, 학교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 없었다.
5. 대면 조사
[기록 05] 반 교실에서 첫 대질
결국 그 선생님 반으로 다 같이 찾아갔다. 소름이 돋고 손이 떨렸다. 엄마, 나 사기꾼 처음 봐.
그분은 그저 죄송하다, 노력하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어떻게 갚을 것인지를 물으면 방법을 찾아보는 중이라고. 술술 대답에 막힘이 없었다. 돈 주겠다는 말 빼고는 다 했다.
그 순간, 화가 난 건 돈 때문이 아니라 내가 믿었던 ‘동료’라는 단어가 너무 쉽게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동료는 개뿔, 면전에서 욕을 안 하는 것으로 평생 쌓아온 인내심을 다 쓴 듯한 기분이었다.
6. 증거 수집
[기록 06] 각서, 신분증 사본, 그리고 문자
점잖은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나는 독촉 문자와 학교 메신저를 보내기 시작했다. 증거 확보를 위해 각서를 받고 신분증 복사도 했다. 다른 선생님들도 곧 나를 따라 했다. 일주일 만에 나만 40만 원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금이나마 받은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사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분이 본인 학급의 학부모에게까지 돈을 빌려달라고 말한 것이다. 그 학생은 ‘이런 학교에는 더 이상 다닐 수 없다’며 결국 전학을 갔다.
7. 사건 확대
[기록 07] 학교 밖으로 번진 진술
이번에는 내부에서 덮을 수가 없었다. 교감선생님은 피해자의 편이 아니었다. 학교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를 치우는 쪽을 택했다. 그분은 결국 학기 중에 학교를 떠나야 했다.
갚겠다는 날에 전화를 했더니 ‘제가 진짜 먼저 갚아야 하는 곳이 있어서요...’라는 대꾸가 돌아왔다.
드디어 나는 포기(?)를 하고 법적인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리고 충격을 받았다.
대한민국에서는 돈을 빌려줘도, 상대방에게 재산이 없거나 숨기면 현실적으로 돌려받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급 명령을 신청할 수는 있다. 다만 그 제도를 끝까지 밀어붙일 체력은,
피해자인 내가 전부 감당해야 했다.
법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내 돈과 법 사이에는 너무 많은 서류와 갈 곳 없는 분노만이 남았다.
8. 형사 절차
[기록 08] 사기죄 접수, 조용한 창구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변제 의지가 안 보이자, 선생님들과 다 같이 경찰서로 갔다.
"그러니까 각각 360만 원이 아니라, 총 합쳐서 그 금액인 거죠?"
우리는 약소한 금액에 고개를 숙였다. 조용히 창구에 옹기종기 모여 사기죄 접수를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검찰에서 사기죄로 벌금형 200만 원을 선고받았다.
벌금을 내지 않으면 감옥에 가야 하고, 그 돈을 내도 전과가 남는다는 설명을 들었다.
사기 판결을 받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내가 느낀 감정은 통쾌함보다도, 위안이었다.
그건 돈이 아니라, 내가 당한 일이 ‘범죄’였다는 확인이었다.
9. 민사 절차
[기록 09] 지급 명령, 그러나 실익 없음
이렇게 형사 고소는 일단락되었지만 민사는 계속 진행했다.
혼자 민사 소송법을 공부했다. '나 이러다 법조인 되는 거 아닌가?'
주소 보정과 송달 불능을 반복하며, 변호사 없이 지급명령정본을 채무자에게 송달시키는 데 성공했다.
뿌듯해서 더 자괴감이 들었다.
결국 지급 명령이 확정됐고,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도 손에 넣었다.
게다가 여섯 달이 지나면 채무불이행자 등록이 가능했다.
그 이후에는 대출이 막히고, 기존 대출도 상환하라는 연락이 간다.
의료보험도 제대로 쓸 수 없게 된다.
2반 선생님은 "그 돈 없어도 사는데... 신용불량자까지 만들면 정말 인생 놓을까 봐..." 우려했다.
그분은 그때쯤 감자탕집에서 일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나는 동정심은커녕 차라리 감자가 걱정됐다.
감자들 조심해, 돈 빌려주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리고 000 선생님. 치질, 족저근막염 등등 조심하십쇼. 앞으로 병원 못 가는 수가 있으니까...
10. 사후 기록
[기록 10]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소식들
그 뒤로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그분 소식이 들려왔다. 하루는 교무실로 약혼녀라고 하는 분이 전화가 왔다.
학교를 그만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물론, 자기는 여자친구가 없다고 했었다.
교사 사이트에서 000 선생님은 이미 사기꾼으로 유명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돈 빌린 수법도 가지각색, 창의적이었다. ‘오... 이 정도 사연이면?’ ‘적성에 맞는 건가?’
나중에는 다들 놀랠 기력도 남지 않았다.
"선생님, 원래 돈 빌려 줄 때는 앉아서 주고, 받을 때는 엎드려서 받는 거야."
학교에서 가장 존경하는 상담선생님께서 홍차를 타주며 말씀하셨다.
그리고도 한참 인간관계와 금전 거래에 관해 더 혼이 났다.
"선생님, 저는 제가 똑똑한 줄 알았어요."
"헛똑똑이지! 그 정도면 싸게 인생 수업 한 셈 쳐."
실행하지 않은 권리
코인이다, 도박이다 말이 많았고, 그 정도면 0약 아니냐길래
풍채가 좋은데 보약 중독 같다고 즉시 반박했다.
이제 와서는 진실이 중요한 사람은 없었다.
사실 나는 마지막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등록만 하면, 그 사람은 돈을 안 갚는 대신 일상을 잃게 되는 쪽을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혼자 '치질 조심해라...' 생각하며 어둠 속에서 음울하게 웃는 게 다였다.
11. 결론
[기록 11] 이 사건은 겨울 파일에 보관한다
나는 아직도 세상이 넓고 크고 무서움을,
선량한 마음만으로 이길 수 없는 것이 많음을 떠올린다.
금융 사기범을 추억하며 나는 가끔 기도해 본다.
혹시 형을 살기로 했다면,
그곳에서는 에어컨도 히터도 자주 고장 나기를.
밥에 들어가야 할 콩은 늘 빠지기를.
그 대신, 정당하게 죄의 값을 치르고 다시는 사기 치지 않는 법을 몸으로 먼저 배우기를 바란다.
돈을 끝내 안 갚지 않았으니 그 사람은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겪고도 내 마음에 아직 선의가 남아 있다는 사실 하나로,
이 사건에서 나의 패소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계절의 증거
나는 앞으로도 누군가를 도울 때 겁먹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나눌 수 있는 것은 돈 말고도 많고, 그걸 분간할 만큼은 똑똑한 편이니까.
그 결심은 다짐이라기보다, 겨울마다 꺼내보는 채무 회수의 기록 같은 것이다.
겨울이 올 때마다, 첫 보일러를 틀 때마다.
나는 그분을 한 번쯤 떠올린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아직 지키고 있는지부터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