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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짱 Mar 02. 2022

드라이브 마이 카

침묵의 양면 틈에서 묵묵하게 나아가는, 살아남은 사람들

출처: 네이버 영화



아주 멀고 먼 길을 차 한 대를 타고 떠난 적이 있다.

차멀미가 심한 나는 먼 길을 떠나야 할 때면 늘 멀미약을 먹고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잠을 청했다. 그러고 나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금방 갔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고, 운전자를 제외한 사람들은 전부 기절하듯 잠든 채였다. 나 홀로 핸들을 잡은 채로 나아가는 차 안의 침묵이란 어떤 것일까.


적어도 영화에서, 침묵은 그저 텅 빈 텍스트가 아니다. 가후쿠의 침묵이 가득 들어찬 자동차 안은 사실 그의 모든 비밀과 감정이 밀집된 장소다. 16년에서 17년이 된 자동차를 끔찍이도 아끼는 가후쿠는 다른 사람에게 운전을 맡기는 것조차 꺼릴 정도로 차에 지극정성이다. 가후쿠 오토라는 이름의 사랑스러운 아내와 단둘이 사는, 겉보기에야 완벽해 보이는 부부. 길들인 자동차 안에 타고 있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꽉 맞물려 있다. 오롯이 두 사람만이 채울 수 있는 차 안의 따스한 분위기는, 하지만 차의 뒤쪽에서 바라보면 그 표정을 제대로 분간할 수가 없다. 기저에 무슨 감정이 깔려 있는지,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언어의 뚜껑을 열고 침묵 사이에 존재하는 텍스트를 읽어야 하는데, 딸의 기일에 절에 다녀오는 가후쿠 부부의 표정은 샷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운전을 하는 동안 두 사람은 마주보지 않는다. "운전할 때는 앞을 봐." 가후쿠는 말한다. 오토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 한다. 이것이 그들에게 물 속과도 같은 침묵을 선사한다.


영화의 초반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실제의 마음보다는 서브 텍스트와 오토, 그리고 가후쿠의 '대본'으로 상황을 조형한다. 오토는 섹스를 하고 난 뒤에 가후쿠에게 전생에 칠성장어였던, 좋아하는 남자아이의 집에 몰래 침입하는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가후쿠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차 안에서 반복한다. 우리는 손쉽게 이 두 개의 이야기가 오토와 가후쿠를 각각 대변한다는 걸 알아차린다. 사랑하는 남자의 집에 침입자 신세로 들어와 그와 가까워지기를 열망하는, 하여 진실된 무언가를 교류하길 원하는 오토. 그는 채워지지 않는 침묵의 간극을 채우려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고, 가후쿠는 그 장면을 보고 자신의 자동차로 도망친다. 두 사람의 공간은 집과 차로 분리된다. 그 안에서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은 가득 쌓여간다. 자신의, 맺지 못한 진실이 가득한 집에서 오토는 그곳이 '물속 같다'고 생각한다. "그 물속 같은 침묵에서." 오토는 결국 그곳에 잠겨 죽음을 맞이한다. 두 사람이 채 나누지 못한 말, 결말을 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으니 필연적으로 가후쿠의 발화는 쌓여 간다. 그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안에서.


그리고 2년이 지난다. 아내의 죽음 이후에도 삶을 이어가고 있던 가후쿠는 히로시마에서 진행되는 연극 프로젝트에 연출로서 참여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특징적으로 꼽아볼 수 있는 세 사람이 있다. 수어를 사용하는 배우, 이유나. 이전 자신의 부인과 외도를 했던 젊은 남자 배우, 다카츠키. 그리고 자신의 운전수 역할을 하는 미사키.


그들의 관계는 침묵과 암묵으로 유지된다. 가후쿠는 미사키에게 많은 것을 묻지 않는 것처럼 다카츠키에게도 이전 오토와 함께 있었던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쌓여 가는 텍스트들이 있다. 가후쿠는 자신의 공간을, 꼭 오토가 있었던 공간에서 그랬듯이 침묵의 수면 아래로 만든다. 그의 오랜, 그리고 나쁜 버릇 중 하나다. 하지만 가후쿠의 이 공식을 깨는 사람이 있다. 한국인 출신의 수어 사용자, '이유나.'




출처: 네이버 영화


때때로 침묵이 가져다 주는 게 있다. 언어로 발화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보이고 들리는, 역동하는 인간의 또 다른 언어.

연극 <바냐 아저씨>의 '소냐'라는 역으로 캐스팅된 유나의 등장은 파격적이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고요하다. 하지만 그 표정과 손짓에서 우리는 텍스트를 읽을 수 있다. 유나에게 침묵은 언제나 자신을 뒤따라오는 친구와도 같다. 소란의 틈에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모두가 내 말을 듣지 않는 게 익숙한' 유나. 그리고 가후쿠는 초대받은 윤수와 유나의 집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모두가 자신의 언어를 외면하는 유나를 위해 그의 언어를 익힌 윤수, 그리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보는 것과 듣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발화'하는 유나의 모습에선 침묵의 다른 기능을 선사한다. 타인의 언어를 배제하여 가라앉히는 침묵이 아니라, 그저 입을 다물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그 앞길을 가로막지 않는 행위.


듣기만 하던 유나는 가후쿠와 만나 발화자로 변하고, 귀를 닫고 타인의 이야기에서 멀찍이 떨어지려 하던 가후쿠는 청자로 변한다. 이 변화가 가후쿠의 다음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잠시, 가후쿠가 배우들을 트레이닝하는 방식에 대해 떠올려보자. 처음의 그는 배우들을 앉혀두고 감정조차 전부 삭제한 채 대본을 '읽으라'고만 말했다. 가혹할 정도의 주문이었다. 타인이 무어라 질문하든 가후쿠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이유에 대한 대답을 돌려주지도 않았다. 다양한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는 연극,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로의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말을 온전히 읽어야 한다. 즉, '청취'의 중요성이다. 그 사람의 감정을 읽기 전 텍스트를 확인하는 단계를 오래 진행한 가후쿠는 변화 이후에야 새로운 단계로 넘어간다. 감정과 행동을 사용한 연습으로. 여기, '서브 텍스트'가 연극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서서히 가후쿠를 둘러싼 서브 플롯들이 움직인다.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텍스트의 수용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상황을 둘러싼 여러가지 별개의 서사를 이해해야 한다. 언제나 무감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미사키도, 자신의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어 하는 다카츠키에게도 이야기가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가후쿠의 자동차 안에서 시작된다. 발화되지 못한 감정들이 가득 차 있던 차 안은 드디어 누군가의 이야기가 실제로 쌓인다. 자동차는 가후쿠의 마음이다. 찰랑일 만치로 차오른 타인의 서사와 감정이 가후쿠를 짓누른다. 그 무거운 분위기 사이에서 다카츠키는 말한다. 우리는 실제로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나 자신을 들여다 볼 수는 있다고.


이야기 틈에서 반응하는 나 자신.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건 고작 그 정도의 틈일 테다. 자동차 창 밖으로 보이는 작은 풍경, 그 정도.

하지만 영화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자동차의 창틈으로 본 미사키의 이야기는 다카츠키의 범죄 사실이 밝혀지고 가후쿠가 연출이 아닌 '바냐' 역을 연기까지 하게 되며 점점 더 넓어지는데, 이 부분에서 우리는 미사키의 존재 의의에 대해 다시 되새길 수 있다. 미사키는 가후쿠에게 죽은 딸을 떠올리게 하는, 그래서 정을 품게 되는 존재이면서도 가후쿠의 자동차 그 자체의 의미도 지닌다. 가후쿠가 세상을 보는 좁은 창, 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아득바득 쌓여 있는 곳. 하지만 쌓여만 가는 이 자동차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자동차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점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두 사람은 미사키의 고향으로 향한다. 

눈이 가득 쌓인 그의 고향은 침묵으로 뒤범벅되어 있다. 비밀은 눈 아래에 묻히고 비명조차 그 아래 사장된 곳.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고요한 장소에서 두 사람의 감정은 터져나온다. 이 거대한 마을, 침묵의 물 속에서.


하지만 과연 물이 가후쿠 부부의 집, 가후쿠의 자동차, 미사키의 마을에 차올랐던 걸까.

아가미로 호흡하며 삼킨 물이 그저 나를 점점 채웠던 게 아닐까. 벗어날 수 없는 침묵이라는 늪에. 지상에 발을 디딘 가후쿠는 드디어 눈물과 함께 소리를 지른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오토를 만나고 싶어. 만나서 화를 내고 싶어. 사과하고 싶어.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어. 무슨 수를 쓰든 돌아갈 수가 없어. 그래도 살아가야 해.


영화는 지상에 발 딛고 선 자들에게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최종적으로 전달하며 끝난다. 어찌 보면 뻔한 이야기다. 삶의 시련에 고통받던 두 사람이 그럼에도 '살아가자'라고 말하면서 끝나는, 전형적인. 침묵의 틈을 파헤지고 지상으로 올라온 가후쿠가 얻어낸 단 하나의 '사실'이기도 하다.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에서는 그것이 사실인 명제.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자신의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사실'을 찾는다. 마지막, 연극의 장면에서 결국 바냐 역을 연기하게 된 가후쿠는 여태껏 영화에서 보여줬던 어떤 모습들 보다도 가장 감정적이고 생동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영화는 내내 현실을 무감각하고 잔잔하게, 연극을 감정적이고 격정적이게 연출하며 두 사안을 대조시킨다. 연극 밖의 인물들은 기계적이고 짜여진 배역 같지만, 오히려 연극 안에서는 그들 모두가 살아있는 하나의 캐릭터로 발전한다.


이것은 영화와 연극, '타인을 위해' 일하는 모든 것의 의미가 된다. 그들은 타인을 듣고, 자신의 안에 체화하며, 기어코 그것을 발화한다. 누군가는 짜여진 플롯 내에서 위안을 받는다. 우리는 객석에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필연적인 침묵 사이에서. 그러다 보면, 무언가가 그곳에서 자라나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내가 쌓아둔 감정의 잔잔한 물결에 파문을 일으키며 말하는, 여기로 나와.


지상으로 올라와.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해. 나중이 되어 우리 모두가 절대적인 침묵 사이로 기어들어갈 때, 그때에 고통스럽고 괴로웠다고 울고 따질 수는 있어도 지금 우리는 차를 몰고 입을 열고 마음을 움직이며 살아야 한다는. 명백한 메시지를 이중의 깨달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영화의 카피가 말하듯, 그래. 우리는 조용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 각자의 자동차를 타고서 가야할 길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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