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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짱 Mar 02. 2022

화양연화

미완의 열망이 조작하는 아름다운 기억에 대해서


출처 : 네이버 영화



화양연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 오는가.

나도 모르게 시작되는 일이 있다. 인연과 욕망, 희망처럼 소소하게 피부에 침투해오는 것들. 혹은 음악처럼 길을 걷다 어느 순간 가사를 깨닫게 되는, 절묘하고 당연한 순간처럼. 우리 스스로 모든 걸 선택하고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다. 어떨 때는 고개를 드는 것만으로도 내가 듣고 싶지 않던 거리의 음악, 설렘을 깨달을 테니까. 쏟아지는 비처럼 어찌할 도리 없는 속도로 나를 젖게 하는 그것, 우연과 운명. 그 알갱이가 수없이 모여 만들어진 모래사장에 우리는 몸을 뉘고 있다. 바로 이곳, 홍콩의 복닥복닥한 다가구 주택 안에 들어찬 차우와 수 리첸처럼.


아내와 남편의 불륜은 두 사람이 원하고 선택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야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나 차우와 수에게는 날카롭게 스미는 폭력처럼 갑작스러웠다. 두 사람의 배우자가 함께 놀아나고 여행을 떠나는 등 본격적인 외도를 시작하며 두 사람의 관계도 시작된다. 처음의 짧은 마주침, 비이성적인 끌림, 그런 것들이야 그들이 '만나고자' 선택하도록 끌고 가는 알갱이들이었다. 우연과 운명. 두 사람은 얄궂은 단어를 앞에 두고 마주보고 앉아 대화를 한다. "당신의 가방은 어디서 샀나요." 수의 가방은 차우가 자신의 아내에게서 보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수의 가방은 그녀의 남편이 아니고서는 사올 수 없는 물건이다. "당신의 넥타이는 어디서 샀나요." 차우의 넥타이 역시 마찬가지다. 앞에 놓인, 저릿한 상흔을 두고 남자와 여자의 기이한 만남은 이어진다.


두 사람은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우연이 쌓여 결과를 낳은 걸까. 두 사람은 연극을 한다. 두 가지의 상황을 두고.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요." 질문에 답변은 두 개로 갈린다. 차우는 자신의 부인을 유혹하는 수의 남편 역할을 맡고, 수는 자신의 남편을 유혹하는 차우의 아내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누가 먼저 손을 뻗어 상대를 잡았는지, 대체 중요할 게 뭔가. 우연이든 운명이든 두 사람의 앞에는 이미 실패한 사랑이 놓여 있다.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은 이미 꽃처럼 졌고, 비가 와서 꽃몽우리는 떨어진 지 오래.




출처 : 네이버 영화



그러니 두 사람은 선택을 한다. 서로를 만나기로.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하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거나 손을 맞잡는다. 때때로 같이 글을 쓰고 서로의 배우자 역할을 맡으며 이런저런 가정假定을 세우기도 한다. 무의미한 가정과 미련이라는 걸 알면서도 지속하는 건 결국, 다른 가정假定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함께하게 되면 어떨까, 하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그때에 찾아온다. 두 사람이 두 사람의 미래를 상상할 때에. 또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고 싶어 욕망할 때에. 두 사람은 '불륜'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앞에 두고 머뭇거리며 표면을 맴돈다. 입을 맞추지 않고 몸을 섞지 않아도 사랑은 사랑일까. 이루어지지 않아도 아름다움은 있을까. 영화 <화양연화>의 답은 바로 그곳에 있다. 당연히,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되는 것이라고.


이미 사랑에 실패한 두 사람이 여기 있다. 차우와 수는 서로에 대한 강렬한 끌림을 느끼지만, 동시에 사랑의 결말이 실패로 치닫는 것을 경험했다. 그들은 겁 먹고 나약하지만, 가정假定은 나약하지 않다. 상상은 언제나 강하게 두 사람을 옭아맨다. 분명히 이 사람과의 사랑은 아름다울 거야. 나를 끝도 없이 불태우고 따뜻하게 해줄 거야.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결코 헤어지지 않을 거야. 우리는 어찌할 도리 없이, 귀를 파고드는 음악처럼 희망을 품고 소망을 갖는다. 차우와 수 역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희망과 소망을 품었다. 그것을 손에 쥐고 있을 때는 그보다 달콤할 수가 없어, 이미 모든 걸 다 이룬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결국, 순간은 순간이며 시절은 시절이다. 영원한 건 어디에도 없다. 비는 그친다. 시절은 진다. 떠나갔던 연인은 돌아온다. 차우는 수에게 말한다. 영원한 건 없으니, 우리, "미리 이별 연습을 합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이루어지지도 않은 사랑의 이별을 연습하는 일은 버겁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그렇게 마지막 연극으로 빛 바래 사라진다. 꿈을 꿀 때 누구보다 아름답고 가빴던 마음은 엉망으로 내동댕이 쳐지지만, 둘 중 누구도 그걸 제대로 집어들어 도전해볼 용기는 없었을 테다. 입술 닿을 일 없는 여백을 남겨둔 채 두 사람의 화양연화는 끝이 났고, 다만 마찬가지로, 미련의 가정假定만이 다시 남는다. "나요. 배표가 한 장 더 있다면, 나와 함께 가지 않겠소." "나예요. 배표가 한 장 더 있다면, 나를 데리고 가지 않을래요." 그들을 속절없이 사랑으로 내몬 우연과 운명에 대한 마지막 선택은, 아름다운 시절을 그저 고스란히 아름답게 남겨두는 것. 그래서 더 아름다워지지 못하도록,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처럼 나무 구멍 안에 대고 고요히 속삭이곤 진흙으로 그 비밀을 묻어두는 것이다.


홍콩으로 돌아왔다가 수를 떠올리게 된 차우는, 1966년 캄보디아로 돌아가 진흙 사이에 비밀을 묻어둔다. 1966년, 자신들을 식민지배하던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하는 장면의 뒤쪽에 들어가는 씬이다. 1960년대 당시 홍콩을 둘러싼 혼란스러운 상황에 영화를 대입해본다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이루어지지 않는, 선을 넘지 않는 기어코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대해 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중국 내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으며 홍콩 역시 극심한 빈부격차와 빈곤층의 시위 등으로 연일 몸과 마음의 가난이 이어졌다. 영국의 손아귀에 있을 테냐, 중국의 손아귀에 넘어갈 테냐. 선택의 코앞에 오기까지 홍콩인들은 우연과 운명의 이치에 따라 휩쓸려 왔고, '대체 누가'라고 물을 즈음에는 그게 우연인지 운명인지가 중요치 않았다. 그러니 선을 앞에 두고 서로가 동상이몽을, 혹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었던 순간의 화양연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열망할 때의 아름다움을 2000년의 감독은 과거를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마치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사랑의 문턱에 있었던 두 사람이 자신들의 시절을 회상하는 것처럼.


그때는 정말 아름다운 시절이었지.


혼란과 빈곤, 눈앞에 닥친 절망 틈에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열망이 시대를 앞섰기 때문일 거라고.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 어디서 오는가. 영화는 이야기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열망할 때, 무형의 존재로 이미 우리 앞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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