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짱 Oct 11. 2022

허공에의 질주

나는 길의 감별사야, 평생 이 길을 맛볼 거야



소년과 청년의 섬세한 선 아래. 나는 그 시기를 떠올리면 종종 길을 잃는다. 19세, 눈을 감았다 뜨면 하루가 다르게 어른에 다가서는 어리숙하고 불안한 시기에, 밤이 오면 언제나 길에 나가 모두가 잠들고 나다니지 않는 텅 빈 곳을 헤매곤 했다. 내가 사는 작은 집, 그보다 더 넓은 한 도시의 길목을 빼곡하게 내 안에 되새기던 나날. 그런 날을 생각하면 나는 리버 피닉스의 <아이다호>를 떠올리곤 한다. 길 모양을 보면 내가 어디 있는지 알지. 분명히 와본 적이 있어. 그 언제인가 여기 머문 적이 있거든. 이런 길은, 정말 이렇게 생긴 길은 어디에도 없어. 단 하나 밖에 없는 사람의 얼굴이 그렇듯이. 일그러진 사람의 얼굴! 나직한 독백은 그 시기의 청년들이라면 흔히 겪을 수 있는 보편과, 그럼에도 개인적일 수 밖에 없는 삶의 길을 조용히 이야기한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나만의 이야기. 나만의 외로움과 슬픔.


태어나 완벽하게 유지될 수 있는 공동체가 있을까. 길 위에서 함께 차를 몰고 이리저리로 떠다니며 사는 포프 가족에게도 완벽하게 이어지는 조직이란 없었던 모양이다. 60년대, 히피와 록, 그리고 변화를 주장하며 일어난 젊은이들은 기존의 보수주의와 함께 전쟁이라는 국가에 의한 거대한 폭력에 반대하며 반전운동을 시작했다. 대니의 부모인 아서와 애니 역시 반전운동에 참여하던 인물로, 운동 당시 의도치 않은 실수로 민간인에게 상해를 입힌 뒤 FBI에게 쫓기며 살고 있다. 권력에의 항변과 보수적인 공동체에서 탈피하기를 요구하는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기초적이며 보수적인 공동체 단위인 가족에게 집착한다. 특히 아버지인 아서 포프가 가정을 유지하고 지키려는 시도는 가히 가부장적이라고 불릴 만큼 권위롭고 다소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말했듯, 공동체는 언젠가 해체되거나 다른 모양으로 변형된다. 자식이 자라 성인이 될 나이가 되면 그들은 필히 가족의 품을 떠나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하고, 보편의 틈에서 개인적인 길을 또 다시 찾아내야 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대니 포프의 서사인 동시에 불합리한 권위의 해체, 즉 보수적 가치에 안주하려는 태도에서 탈피하는 이야기가 된다. 말 그대로의 변혁. 세상은 달라져 가고, 더불어 우리의 세상이 온전히 우리의 것일 수 없다는 걸 인정해가는 애니와 아서의 성장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제 가서 세상을 바꿔, 우리는 노력했어. 아서가 대니에게 마지막으로 전한 이 문장은 다면적이다. 반전운동을 하고 세상을 바꾸려고 애쓰는 운동가들인 동시에 한 가정을 지키는 의무를 안고 있던 그들. 어쩌면 그들의 삶이란 허공 속에서 오래 질주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더는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어다니며 그럼에도 인간의 보편적 성취에 따라 무언가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럴 수 없다. 그들에게 성취란 오로지 자식의 성장만이 남아있는데,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다. 자식의 성취는 자신의 성취가 아니오, 그들의 질주는 오랫동안 공허를 헤맨 것임을. 그런데도 이별하는 가족의 모습은 눈물 사이에서도 그저 웃음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이것이 과연 그저 공허이기만 한가.


세상은 바뀌고 세대는 교체된다. 우리가 이루어놓은 것들이 기어코 텅 빈 공허처럼 느껴져도 언젠가 새로운 것은 우리를 떠밀고 그 세상을 차지한다. 흐르는 영화 속에서 나는 내내 썬시커라는 배의 이름을 생각했다. 떠나는 길목을 쨍하게 비추는 태양, 그 태양을 쫓던 우리의 시대. 영화 <로건>에서 울버린이 로라에게 마지막으로 전하는 말인 '저 놈들 뜻대로 살지 마'와 아서 포프가 대니 포프에게 전하는 '다른 사람 얘기는 듣지 마'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일견 비슷한 모양새를 지닌다. 싸우고 투쟁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언제든 타인에게 나의 목표와 의지를 비난당하고 닳아 없어지고 마는데,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므로, 그것은 아주 보편적인 동시에 개인적인 일이므로, 텅 빈 길 위에서 싸우는 건 오롯이 너 혼자의 몫이므로 할 수 밖에 없는 말.


그래서 우리는 공허 속에서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을 가득 채워넣는다. 투쟁하고 도망다니며 사는 삶이라도 그 삶이 나의 신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를. 가족과 헤어지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이별 속에서도 자신이 바라던 것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길. 마이크 워터스는 <아이다호>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난 길의 감별사야. 평생 길을 맛볼 거야. 이 길은 끝이 없어. 이 세상 어디든지 갈 수 있어. 평생토록 우리는 길 위에 서 있을 텐데, 그 길 위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것은 바로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일 텐데. 그럼에도 이제 새로운 질주를 시작할 대니 포프의 행운을 빌어주며, 영화의 감상 역시 막을 내리고자 한다. 결코 집으로 아주 돌아오지는 못하지만, 친한 길들이 서로 만나는 곳, 거기서는 온 세계가 잠깐 고향처럼 보인다는 데미안의 문장 하나가 생각났다. 사랑과 가족, 우애와 동료의 모든 문장이 삶의 길에서 찰나의 고향과 같으니, 그외의 것이 공허처럼 보일지라도 걸음을 멈추지 말고.


그래서 아서와 애니는 말한다. 이제 가서 세상을 바꿔. 우리는 노력했어. 걸음을 멈추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영화 속에서 찰나를 떠나보내고 자신의 세상을 꾸릴 힘을 얻기를. 결국 아주 개인적인 나의 삶을 꾸리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가장 첫 걸음이기 때문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