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스터디
근래에 읽고 있는 다프나 조엘의 <젠더 모자이크>에서는 여태껏 우리가 알아왔던 '남자의 뇌'와 '여자의 뇌' 연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뇌에서 '남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과 '여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사회적 인식에 따른-을 모자이크로 만들어 분류했는데, 그 결과가 재밌다. 남성과 여성의 '평균'적인 뇌가 '남성적' 그리고 '여성적'이었다고 표현할 수는 있으나 그 평균치에서 벗어난 예외가 너무도 많았다는 것이다. 즉, 보편적인 남성과 여성의 뇌가 아닌 남성, 여성의 존재가 평균값을 웃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보편'이란 무엇인가?
정치적으로 볼 때, 보편이란 '널리 두루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이런 의미도 있다. '모든 것에 들어맞는 것, 모든 것에 공통되는 것.'
우리는 사람을 몇 가지 적은 범주 안에 넣고 분류한다. 가령 여성과 남성. 그리고 그것에 해당하지 않는 것들은 무시하거나 예외적으로 두고 하나로 뭉뚱그린다. 이렇게 뭉뜽그린, '보편에서 벗어난 보편'을 '보편적으로' 소수자라고 칭한다.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는 '소수자'라는 표현마저도 하나의 폭력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던진다. 두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와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보고 나면 이런 의문은 더욱 명확한 모양새를 갖는다. 트랜스젠더로서의 정체성으로 다시 삶을 구축하기를 바라는 로렌스와 레즈비언-혹은 바이섹슈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고 그 삶을 살고자 하는 아델은 언뜻 보면 소수자의 대표적인 캐릭터로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 가지 단어로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특성을 지닌다. 로렌스는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살고자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여성을 사랑한다. '여성스럽다'고 규정된 옷 입기를 즐기나 그 이외의 행위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름을 바꾸거나 성전환 수술을 하는 것 역시 영화 내에서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보다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로렌스와 프레드 사이에 있는 '사랑'이다.
정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나가려 할수록 로렌스와 프레드의 관계는 삐걱거린다. '정확한' 모습에 동반되는 부정적 시선이 그들 관계의 주된 방해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중요한 건 처음 사랑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프레드가 로렌스에게 갖게 된 '사랑의 모양'이다.
아델의 경우를 보자. 그가 처음으로 남자와 로맨스적 관계 맺기를 시도할 때, 그는 그게 '맞지 않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남학생과 함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려 시도해보지만, 그는 결코 아델의 관심사에 자신을 맞추지 못한다. 그러다가 만나게 된 '엠마'라는 여성은 그가 바라는 '사랑'이라는 환상에 꼭 맞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이 들판에 있을 때, 엠마가 아델을 그리고 아델은 그와 함께 문학과 철학에 대해서 논할 때는 더욱 '사랑'이 갖는 환상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사랑이 끝나는 순간은 언제든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환상'을 깨뜨리는 건 늘 개인의 정확성이다.
로렌스가 여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 프레드에게는 노력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었듯이, 엠마는 아델의 삶에 대한 태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이 그들의 '정확한 모습'임에도, 각자의 사랑이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그들의 정확성을 저해하는 것이다. 결국 로렌스와 아델은 각자의 '정확성'을 되찾기 위해 사랑을 떠난다. '정확하게 사랑 받고 싶었다'라는 말의 비현실성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사랑이 왜곡하곤 하는 보편적인 '너'가 갖는 강대함에 대해, 그 폭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란 결국 정확하게 자신을 찾고자 하는 여정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정확하고자 노력했다면, 프레드가 자신이 하는 모든 노력이 너무도 버겁지 않았으며 엠마가 정확한 아델의 모습에서 눈돌리지 않았다면 그들의 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모든 사랑의 여정은 기어코 정확한 자신을 찾고 정확한 상대를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3시간, 혹은 몇 십 년의 삶으로 밖에 그를 설명치 못하기를. 아주 정확한 방식으로 우리가 서로를 알기를.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늘 기원하고 기도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