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결혼 전 회사에 다녔다. 당시에 그 회사가 어떤 위치였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지금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기업이었다. 그 시절 여자들이 으레 그랬듯 엄마도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고 공무원인 아빠를 뒷바라지했다. 할머니는 타지로 발령 난 아들을 챙겨줄 사람이 필요하다며 결혼을 서둘렀고, 20대 초반이었던 엄마는 그렇게 ‘주부’가 됐다. 주부가 된 엄마는 남편의 옷가지와 밥을 챙기고 집을 돌보았다. 엄마는 평생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보험 판매나 다단계 같은 일에 잠깐 발을 들이기도 했지만, 전문적인 기술이 없던 중년 여성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좁았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지 못한 것이 엄마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는 종종 내게 말했다.
“여자도 자기 일을 하고 살아야 해.”
내게 직업을 가진 여자로 사는 것은 선택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고 난 뒤, 나에게 주어진 6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했다. 아이 없이 혼자 보내는 시간. 달콤하기만 할 것 같던 그 공백이 막상 닥치자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처음에는 집에 돌아와 밀린 빨래와 청소, 설거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가 매달리지 않아 가사 노동의 속도는 붙었지만, 그뿐이었다. 꿈꾸던 자유의 시간에 나는 여전히 집안일에 매여 있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이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내가 일을 쉬는 명분이 사라지는 것 같아 마음이 불안했다. 물리적인 자유는 얻었으나, 마음은 여전히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남편은 집안일을 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거나,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언가를 열망할 에너지조차 말라버린 시기였다. 한동안은 아이를 보내고 돌아와 침대에 누워 멍하니 릴스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의미 없는 영상들을 넘기다 보면 하원 시간은 금방 다가왔고, 그제야 허겁지겁 집안을 정리하는 내 꼴이 우스웠다. 고립감을 탈피하려 비슷한 처지의 엄마들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카페 옆 테이블에서 “요즘 엄마들은 애들 보내놓고 다 저렇게 노네”라는 뉘앙스의 수군거림을 들었을 때, 나는 위축되었다. 아이를 낳은 여자를 환대해 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 이 세상에서 내가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3년 동안 가정 보육을 하겠다던 다짐은 이미 14개월 만에 꺾였다. 그 다짐을 지키는 것이 무의미해진 마당에, 밀리고 밀려 도달한 생각의 끝에는 결국 ‘일’이 있었다. 내가 이 사회에서 온전한 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내 자리를 찾을 수 있는 통로는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나는 복직 계획을 앞당기기로 했다.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었다.
복직 시기를 결정하고 나자, 나에게 주어진 6시간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시간을 필사적으로, 그리고 영리하게 활용해야만 했다.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순간 나는 '워킹맘'이 될 것이고, 그 길은 지금보다 훨씬 험난할 것임을 짐작으로 알고 있었다. 이제 그 6시간은 단순한 휴식의 시간이 아니었다. 폭풍 전야 같은 고요함 속에서 오직 나만을 위해 써야 하는, 내 생존을 위한 마지막 비축의 시간이 되었다.